23화
다음 날, 지안은 공관의 마당에 준비된 견고한 썰매를 목격할 수 있었다. 순록 여섯 마리가 끄는 근사한 대형 썰매였다. 남자 일곱이 동시에 앉아 갈 수 있고, 잘하면 두 명 정도는 반듯하게 누울 수도 있을 것 같은 크기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저 썰매를 이용할 사람은 따로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지안은 아무런 반응 없이 썰매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조바심이 난 악시온이 물었다.
“썰매를 원한 것이 아니었나?”
조심스러운 물음에 지안은 자신이 방금 본 썰매가 공작에 의해 준비된 거란 걸 깨달았다. 어쩐지, 보여줄 것이 있다며 마당으로 나와보라 하더니. 그게 저 썰매였단 말이야?
“그 말씀은, 저 썰매가 저희가 타고 갈 썰매란 말인가요?”
“그렇다.”
“왜 갑자기…… 어젯밤엔 순록으로 충분할 거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생각이 바뀌었다.”
머뭇거린 악시온이 말을 이었다.
“그대가 썰매를 더 선호하는 것 같아 준비했다.”
뭐지? 어젯밤의 가이딩이 효과적이었던 건가?
아무렴 무슨 상관인가. 공작이 마음을 바꿔 썰매를 마련했다. 본래 노렸던 목적이 달성된 것이다.
“……감사해요.”
“이외에 원하는 것이 있다면 지금 말해 주길 바란다. 최대한 준비해보겠다.”
지안은 고개를 저었다. 당장은 딱히 바라는 것이 없다. 없던 썰매가 마련된 것만으로도 예상외의 성과다.
“출발은 언제 하나요?”
“곧 공작가에서 순록 가죽을 보내올 거다. 어제 사람을 보내두었다. 늦어도 이틀 후엔 도착하겠지.”
지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달렌의 순록 가죽을 둘러싼 분쟁에 대해선 일찍이 설명 들은 바가 있다. 그는 공작이고 마을의 일을 살필 책무가 있으니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틀이라면 일정이 아주 늦어지는 것도 아니다.
사실, 이틀 정도 공관에 더 머물면서 안락한 지붕을 만끽하는 건 문제 삼기보단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그간 촌장의 부인이 차려준 식사가 훌륭했던 탓이다.
“일이 잘 해결되면 좋겠네요.”
대충 이렇게 대화를 마무리하려던 사이, 누군가 공관의 문을 두들겼다. 치료사 아슬락이었다. 어깨에 포대 한 자루를 걸치고 들어선 치료사는 악시온을 향해 깍듯이 허리를 숙여 보였다.
“공작님을 뵙습니다.”
“음.”
“요청하신 약재를 마련해서 찾아뵈었습니다.”
아슬락의 말에 악시온은 포대를 건네받아 끈을 열어보았다. 매듭이 열리자 알싸한 향기가 확 퍼지며 코끝을 찔렀다.
“상등품이군.”
“알아보시는군요. 남부산 약차에 체력을 보할 약재를 배합해두었습니다. 하루에 두 번씩 끓여 드시면 됩니다.”
“수고했다.”
대금을 받은 아슬락이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공관을 나섰다. 악시온은 치료사가 떠나자마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물을 길어와 무쇠로 주물된 주전자에 채우고 불을 지피는 솜씨가 능숙했다.
지안은 악시온이 내미는 차를 마다치 않았다. 향이 꽤 그럴싸했기 때문이었다.
“감기의 예방에 도움이 될 거다.”
“그런 효능인가요?”
“그렇다.”
차를 홀짝거리며 지안은 포대 자루에 한가득 담겨 있는 약차를 응시했다. 저걸 다 먹으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바라건대, 저 포대의 약차가 다 떨어져 갈 즈음 이 대륙 어딘가에서 가이드를 찾아낼 수 있길 소망할 뿐이다.
* * *
찻물이 지안의 속을 뜨끈하게 데우고 있을 무렵, 티아낙은 공작저에 당도해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있었다.
공작의 필체가 분명한 쪽지는 훌륭한 증거가 되었고, 만달렌의 티아낙은 신원이 정확히 파악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순록 가죽의 반출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마법사의 소행으로 피해가 야기되었단 정보에 공작가의 기사 넷이 호위로서 함께 따라나섰을 정도다.
갑주를 갖춰 입은 기사와의 동행에 티아낙은 별수 없이 위축되면서도 등 뒤가 든든해짐을 느꼈다. 무려 공작가의 기사가 동행하니 달락샤에 당도할 무렵 겪었던 황망스러운 피해는 없을 것이다. 티아낙은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티아낙의 믿음은 만달렌으로의 도착을 하루 앞둔 날. 순록 가죽을 실은 썰매와 함께 송두리째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어이없는 사태에 헤롤드는 우두커니 선 채로 눈을 껌뻑였다.
가죽이 실린 썰매에서 눈을 뗀 건 아주 잠깐이었다. 식사를 챙기느라 잠시 경계가 소홀했던 건 사실이지만, 기사 서넛의 감각을 피해 썰매를 통째로 훔쳐내는 마법사라니? 등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몰랐다.
이 초유의 사태에 만달렌의 사냥꾼은 완전히 얼이 빠진 얼굴이었고, 이는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헤롤드는 낭패한 얼굴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런 마법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어지간한 고위 마법사가 아니고서야 이런 일이 가능할 리 없다. 능력자의 소행임이 틀림없었다.
“뭔지는 몰라도 고위 마법사 아니면 능력자의 행각이다. 이쯤 되면 제닝스 상단에 원한이 있거나. 아니면 만달렌 마을에 원한이 있는 자의 소행이 분명하군. 단순 사고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어, 어쩌면 좋습니까?”
티아낙의 물음에 헤롤드는 혀를 차며 답했다.
“우리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공작님께 보고드리는 게 우선이다.”
다행히 만달렌에 거의 도착한 직후였다. 헤롤드는 눈 덮인 설원을 둘러보았다. 만달렌은 지형이 험해 짐이 실린 썰매를 숨겨놓을 그늘이나 언덕이 많았다. 공작성에서 병사를 불러 수색을 명하면 저 어딘가에 숨겨진 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법사인지 능력자인지 모를 인물이 계속해서 방해해 올 테니 짐을 되찾더라도 의미 없는 수색이 될 터. 당장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순록 가죽이 눈 쌓인 설원 너머 어딘가에 숨겨져 있으리란 것뿐이다.
“일이 귀찮게 됐군.”
그렇게 중얼거린 헤롤드는 사색이 된 티아낙을 달래며 걸음을 재촉했다.
“이 일은 네 탓이 아니다. 호위에 소홀한 우리의 책임이니 너는 책망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헤롤드의 말에 티아낙의 얼굴에서 근심이 덜어졌으나 어두운 표정만은 어쩌지 못했다. 막대한 양의 순록 가죽을 두 번이나 도둑맞았기 때문이었다. 순록의 가죽은 북부에서도 귀중한 재화였고, 그만한 재화를 두 번이나 잃은 것은 몹시 심각한 일이었다.
서둘러 사태를 보고해야 했으므로 이들은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 만달렌에 도착했다.
마침 이들이 도착한 시간은 막 저녁 식사를 시작할 무렵이었고, 그 탓에 헤롤드의 보고는 식탁에서 이어지게 되었다.
“갑자기 짐 썰매가 사라졌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기사들의 감시를 쉬이 따돌릴 정도라면 필시 능력자의 소행이겠군.”
“제 예상도 그와 같습니다. 그리고 두 번이나 같은 짓을 반복한 건…… 우연이라 보기 힘듭니다. 누군진 몰라도 만달렌 혹은 제닝스 상단에 피해를 끼칠 목적을 가진 놈인 듯합니다.”
잇따른 보고에 촌장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공작 역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듯 침묵에 빠졌다.
이 무거운 분위기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사람은 지안뿐이었다. 지안은 아쉬운 얼굴로 식어가는 고기 스튜를 응시했다. 막 식사를 시작하려던 무렵이었는데, 심각한 얼굴을 한 기사들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빵 하나 집어 들기 힘든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다들 근심 어린 얼굴로 식사를 뒤로 한 채 논의를 거듭하는데 눈치 없이 혼자서 스튜나 떠먹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안은 가만히 앉아 눈을 굴렸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잠자코 듣고 있는 척하고 있지만, 어쨌건 자신이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참견할 재간도 없고,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 사정의 내막을 어찌어찌 알게 되었다 해도 이 일은 어디까지나 만달렌의 촌장과 공작이 나서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외부인인 자신의 일이 아니었다.
분명 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일순간 나타난 파장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지안은 별안간 느껴지는 감각에 슬쩍 얼굴을 구겼다. 착각이 아니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공작의 파장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파장이 느껴지고 있었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순식간에 나타난 파장이라니…….
지안은 직감했다. 새로운 에스퍼다. 그리고 이 에스퍼는 높은 확률로 공간계 능력자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갑작스럽게 나타난 파장이 설명되지 않는다.
사태의 수습과 대안을 논의하느라 바쁜 공작과 촌장의 대화 사이로 지안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범인을 잡으면 수색 없이도 순록 가죽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되면 좋겠으나, 어떻게 범인을 잡는단 말인가? 누구도 범인을 목격하지 못했다.”
“범인은 이미 마을에 들어와 있어요.”
지안의 대답에 공작은 주변을 물렸다. 촌장과 헤롤드가 자리를 비우자 악시온의 질문이 쏟아졌다.
“설명을 부탁한다. 그 사실은, 어떻게 알아낸 거지? 그것도 일종의…… 가이드로서의 능력인가?”
“가이드는 에스퍼의 파장을 감지하기 마련이니까요. 예시를 하나 들자면, 예전에 공작성에서 공작님이 저를 피해 도망 다니실 때 제가 귀신같이 공작님이 어디 있는지 파악해내지 않았던가요?”
기억한다. 지안을 아무리 따돌리려 해도 소용없었다. 거기에 더해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가이딩이 갑작스레 시작되었다가 끊어지길 반복했다. 그 탓에 지안을 피하기는커녕 제 발로 모습을 드러내는 실책을 범하고 말았다.
기억을 반추하다 말고 악시온이 말했다.
“범인이 어디 있는지 찾아낼 수 있단 말이군.”
“맞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