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애당초 약차를 급히 구입하러 달려 나온 것도 그 영애에게 챙겨 먹이기 위해서였다. 보신을 위한 일체의 약초를 공작님께서 주문하셨는데 정작 약초의 수급이 어려웠던 것이다.
공작님과 그 영애에게 바치기엔 효능이 형편없는 것들뿐이라 고심하던 찰나였다. 이런 때 나타난 제닝스 상단의 약차는 좋은 방편이자 대안이 되어 주었다. 상단의 수행원이란 자가 찾아온 즉시 서둘러 달려 나온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아슬락은 지안에게 처방한 것과 동일한 처방을 에길에게 전해 주며 말했다.
“잠시 이곳에 있으시오. 내가 바로 가서 약재를 좀 가져오지. 달여 먹고 하루 이틀 푹 쉬면 열이 내릴 거요. 혹시 기침이 멈추지 않으면 말하시오. 약재의 조합을 좀 달리해 보겠으니.”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을을 찾은 손님에게 소홀해선 안 될 일이지.”
이후 에길은 약재를 가지고 다시 찾아온 아슬락에게 부득불 우겨가며 진료비를 지불했다. 이후 난처해하는 아슬락을 술로 붙잡아 놓은 에길은, 벽난로 앞에서 꼬챙이에 꿴 순록 고기를 구우며 연신 아슬락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하우바트산 독주는 사람의 분별력을 흐려 놓기에 충분했다. 아슬락은 얼마 안 가 거나하게 취한 주정뱅이가 되어버렸고, 에길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한데 아슬락 님, 공작님과 영애가 이런 벽지의 마을을 찾으신 연유가 있습니까? 공작씩이나 되시는 분이니 저처럼 순록 가죽을 구하려고 만달렌을 찾으신 것은 아니실 것 아닙니까.”
“연유가 있겠으나 우리 같은 자들이 그걸 어찌 알겠나?”
“그래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공작님이 호위 기사와 수행원 하나 없이 마을을 돌아다니시는 게요.”
“자네가 뭘 모르는군. 공작님이 이번에 남하해 온 몬스터를 도륙하는 걸 보았다면 감히 그런 말은 할 수 없었을 거네. 몬스터의 목을 나무 수저 부러뜨리듯 부수시더라니까? 실로 장관이었지! 북부는 오데르겐 공작가 덕분에 건재한 거야. 암 그렇고말고! 북부인으로서 모쪼록 바라는 것이 있다면 공작님이 광기에 휩쓸리지 않으시길 빌 뿐이네.”
다들 쉬쉬하지만, 오데르겐 공작가의 일원이 대대로 폭주를 이기지 못해 죽었다는 사실은 에길도 알고 있었다. 여느 능력자들이 그러하듯 미치광이가 된 채 주변을 닥치는 대로 도륙한다 했던가?
그래서 공작가의 사람들은 광기를 이기지 못하는 순간이 오면 북부에서 가장 높은 얼음산으로 향한다. 무고한 이들이 참사를 당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다. 아마 북부 빙벽 아래나 빙하를 뒤져보면 그렇게 죽은 옛 북부 공작들의 사체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그랬어야 했는데…….’
에길은 아쉬움을 감추며 술을 들이켰다.
* * *
에길이 아슬락을 이용해 정보를 캐 나가고 있을 무렵, 지안은 악시온의 도움을 받아 순록에 올라타고 있었다. 악시온은 전에 그랬듯 고삐를 쥐었고, 두 사람은 묵묵히 나아갔다.
그들은 일전에 북녘의 풍광을 감상했던 바로 그 자리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때와 다른 것은 한낮이 아닌 한밤중이라는 것뿐.
본래라면 이런 여정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썰매를 두고 생긴 항의로 인해 한바탕 대화가 단절되었으니까. 불만은 지안에게도 악시온에게도 있었다. 지안은 하지 않아도 될 고생으로 크게 앓아누운 것에 화가 났고, 악시온은 오직 자신의 목적에만 충실한 지안의 태도가 불만이었다.
하나 섣불리 지안의 고집을 꺾어놓을 순 없었다. 가이드를 화나게 해서 좋을 일 없다는 걸 악시온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의 불만은 바로 이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는 존재 그 자체로 자신에게 올가미를 드리우는데, 정작 자신은 그녀를 구속하거나 제지할 수단을 얻지 못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불안과 초조함을, 마침내는 불만을 촉발시켰다.
그리고 지안은 바로 그 불만을 정확히 포착했다. 가이딩 착취라는 최악의 경우를 늘 염두에 둬야 하는 지안에게, 공작의 태도는 아무리 미세한 것이라도 민감하게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할 때였다.
감정을 억누르는 건 어렵지 않다. 공작에게 간병 받은 것을 조금 참작하고, 만달렌을 떠나 다른 마을을 방문해야 한다는 사유가 지안을 움직인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지안은 감탄한 얼굴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랏빛 커튼이 바람에 흔들리듯 희미한 빛을 내뿜고 있고, 그 너머론 검은 바다와 같은 하늘이 펼쳐져 있다.
총총히 빛나는 별빛이 오로라를 장식하듯 여기저기서 빛을 발했다. 설경이 주는 감동과는 또 다른 차원의 감격이 저 하늘 위에 있었다. 지안은 고개를 들어 오로라를 두 눈에 담았고, 악시온은 그런 지안의 옆모습을 훔쳐보는 데 열중했다.
공작의 시선을 느낀 지안이 말했다.
“오로라의 색이…… 공작님의 눈과 같은 색이네요.”
“그렇군.”
“아름다워요.”
대체 언제적 작업 멘트인가? 스스로 내뱉은 말이지만 진심으로 혀를 씹고 싶었다. 말이 아닌 기름을 뱉어낸 것 같았다. 지안은 민망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무진 애쓰며 공작의 반응을 기다렸다.
호의적인 신호를 읽어낸 악시온은 잔뜩 굳어버렸다. 그에겐 지안의 말이 인위적인 것인지 자연스레 스며 나온 진심인지 구별할 재간이 없었다. 이성은 진작 마비되어버렸다. 하늘 위 오로라처럼 분명히 드러나 보이는 호의에 심장이 철모르는 아이의 것처럼 두근거리며 뛰었다.
그저 몇 마디 말이었으나. 막 눈을 뜨기 시작한 불만을 눌러버리는 덴 그 말만으로도 충분했다. 차마 말 못 한 야속한 감정들 역시 늪 아래로 재빨리 모습을 감추었다. 지안이 쏘아낸 눈먼 화살이 과녁을 정확히 관통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모르는 지안은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을 추가로 더했다. 이렇다 할 말이나 예고 없이 악시온의 손을 잡은 지안은 그대로 가이딩을 시작했다.
“……헉!”
악시온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지안이 의식적으로 가이딩 강도를 끌어올린 탓이었다. 최대한 정신을 못 차리도록 만들 셈이었다. 접촉으로 인해 그가 감정을 읽어내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지안은 최대한 건조한 감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가이딩에 취해 있는 악시온에게 물었다.
“순록은 구했나요?”
“……구했다.”
“우린 언제 이트레로 출발하나요?”
“공작가에서 보내온…… 순록 가죽이 도착한 후 떠날 것이다.”
“순록 가죽이요?”
악시온은 순순히 순록의 가죽을 둘러싼 마을과 상단의 상황을 알려주었다. 가이딩에 취해 더듬더듬 말해야 하긴 했지만, 듣고 이해하기에 부족함 없는 설명이었다.
사정을 전해 들은 지안은 마법사라는 단어에 조금 놀랐으나, 자신이 생각하는 마법사가 아닌 공간계 에스퍼의 일종일 거라 여기며 인상을 굳혔다. 공작 외의 에스퍼가 북부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니, 주의해야 할 문제다.
어쨌건, 마을 사람들이 순록을 잡게 된 사정을 이젠 알겠다. 그러나 알아봤자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다. 이미 공작이 중재자의 역할을 훌륭히 끝마쳤지 않았나. 지안은 질문을 재개했다. 사실 이 질문이야말로 가장 묻고 싶었던 것이다.
“썰매는 구하셨나요?”
악시온은 무심코 지안이 바라는 답을 대답하려 했다.
그러나 막 썰매를 준비해보겠다는 말을 내뱉기 직전, 악시온은 지안의 눈빛에 깃든 신중함을 알아차렸다. 지안이 드러내 보인 호의가 바로 이 질문을 위한 초석이었단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한 희망 위로 낙석이 떨어진 것 같았다.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다.
“……굳이 썰매가 필요한가? 순록을 타고 이동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불편함은 없을 거다. 아니, 없게 하겠다.”
그렇게 말한 악시온은 곧장 지안의 손을 놓았다. 지안이 제공하는 가이딩은 분명 황홀하고 안락했으나, 지안의 의도를 안 이상 더는 가이딩에 취해 있을 수 없었다. 가이딩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면, 제 의지를 관철하려 드는 지안의 농간에 계속해서 이용당할 것이다.
원망의 기색이 떠오른 공작의 눈빛에 지안은 쓰게 웃었다. 질문의 의도가 노골적이었으니 공작이 눈치챈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가이딩을 포기해버린 걸 보니 어지간히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다.
별수 없다. 사과는 가이딩으로 하는 수밖에.
“아직 가이딩이 끝나지 않았어요.”
“그만두지. 받지 않겠다.”
“받으세요.”
지안은 덥석 악시온의 손을 잡았다. 이전처럼 억지로 강도를 높인 가이딩이 아닌, 좀 더 세심한 가이딩을 시작하자 공작의 얼굴이 한결 누그러졌다. 그도 가이딩에 차이가 생겼다는 걸 안 것이다.
하지만 낙심한 얼굴만은 여전했다. 묵묵히 가이딩을 받던 공작이 말했다.
“……나는 나 자신의 의지만으론 결코 그대를 뿌리치지 못하겠군.”
이어지는 씁쓸한 뇌까림 속에는 지안을 향한 비난이 스며 있었다.
“그대는 어디까지 나를 이용할 셈인가?”
“……그러는 공작님은 언제까지 저를 억류할 생각이시죠?”
질문에 질문으로 받아치자 공작의 입이 다물렸다. 슬픔으로 일그러지는 눈동자를 지안은 안타깝게 응시했다.
가이드에게 집착하는 그를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쪽도 이쪽 나름의 입장과 목적이 있다.
“공작님. 만일 가이드가 나타나면, 대안이 생기면 순순히 저를 놓아줄 거라 약속해주실 수 있나요?”
“그건…….”
“이런 말 너무 이르지만, 제게 기대를 걸지 않으셨으면 해요. 제가 언제까지나 공작님의 가이드일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그 말에 악시온은 무참히 얼굴을 구겼다. 비통함마저 느껴지는 그의 얼굴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말문을 잃게 만드는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절절한 눈빛을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피할 수 없는 죄책감이 움튼다.
지안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아름답다는 말. 거짓말은 아니었어요.”
맞잡은 손에서부터 전해지는 동정과 안쓰러움에 악시온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당신을 이토록 필요로 하는데, 당신에게 나는 동정의 대상일 뿐이란 말인가? 서로를 이용하고 필요로 하는 것 외엔, 우리는 아무런 관계도 형성하지 못하는 것인가? 당신에게 나는, 영영 타인일 뿐이란 말인가?
문득,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본래는, 북부에 남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어. 지금도 내 고향이 자주 그립단다.’
하지만 어머니는 북부에 남는 걸 택했다. 그만큼 자신의 남편을 사랑했던 것이다. 반면, 눈앞의 가이드는 어떤가? 그녀는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숨기지 않는다. 내게 아무런 감정도 없다.
불현듯 악시온은 깨달았다. 동정심을 사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천천히 가까워지려 했던 계획은 폐기함이 옳다. 이런 식으로는 결코 그녀의 호의 한 자락 얻어내지 못할 것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눈앞의 가이드를 유혹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