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199)

20화

에길이 말했다.

“가죽을 새로 마련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족히 보름은 필요하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지.”

“조금 더 빨리 준비될 순 없겠습니까?”

“힘드오.”

마을의 장정이 다 달려들어도 보름 내에 가죽 손질이 끝날 거라 보장할 수 없다. 완강한 촌장의 모습에 에길은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보름으로 알고 있지요. 저희도 일정이 있어 그런 것이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해하오.”

“그나저나 저희 상단의 사람들이 머물 만한 곳이 만달렌에 있겠습니까? 듣기론 여관이 없다던데. 마을의 빈집이나 공관을 빌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물론 대여비는 지급하겠습니다.”

“공관이 있긴 하지. 하지만 이미 손님이 머물고 계셔서 대여는 힘들겠소.”

“그럼 빈집이라도 대여할 수 있겠습니까?”

이어진 질문에 촌장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라면 빈집이 한둘은 있었을 텐데, 불운하게도 최근 밀려온 몬스터들이 죄다 부수거나 불태우고 말았다. 다시 증축하려면 그만큼 돈이 필요했고 그래서 미룬 참이다.

“있긴 하지만 파손이 심해서 사람이 거주할 만한 데가 못 되오. 사정이 이러니 사냥을 나간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보겠소.”

사냥으로 집을 비운 가족이 있는지 확인해보겠단 소리다. 북부에서는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썰매와 무기를 챙겨 함께 사냥에 나선다. 여자라고 사냥꾼이 되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친척이나 이웃집에 맡겨지게 된다.

이러한 북부의 사정을 잘 아는 에길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하면 촌장은 최선의 방편을 찾아다 주었다.

“최대한 있는 듯 없는 듯 머물다 떠나겠습니다.”

“고맙소.”

마음에 없는 감사를 마친 만달렌의 촌장은 서둘러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짧게라도 이 일을 마을 사람들과 논의해야 했다.

* * *

지안은 망연한 얼굴로 만달렌의 마을 중앙에서 일어나는 도축의 현장을 응시했다. 조금 전 북부의 아름다운 풍광을 만족스럽게 눈에 담고 마을로 돌아온 참이다. 그런데 이게 뭐란 말인가?

생각하던 도중 마을의 사내가 도끼를 높이 쳐들고 순록의 머리를 단번에 내리쳤다.

퍽!

피륙을 가르는 끔찍한 소리에 놀란 건 지안만이 아니었다. 도끼 소리에 놀란 순록이 펄쩍 뛰고 만 것이다. 바로 이 순록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던 지안은 그대로 안장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러나 볼썽사납게 땅바닥과 조우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악시온이 순발력 있게 지안을 받아 안았기 때문이다.

“조심해라.”

“아, 네. 감사해요. 그런데…….”

말하다 말고 지안은 마을을 둘러보았다. 고요하던 마을 분위기가 어째 소란스럽다. 이 소란은 그간 구태여 집 밖을 벗어나지 않던 마을 사람들이 갑자기 촌장의 집으로 몰려들어 생긴 것이었다.

“……무슨 일일까요?”

“알아보겠다. 그대는 공관으로 돌아가 있는 게 좋겠다.”

공작의 말에 지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지안을 에길이 눈을 빛내며 응시했다.

‘공관에 머무는 손님이 저 사람인가? 흰 털옷을 많이도 껴입었군.’

얼굴은 물론 손가락 하나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모습이 실로 대단했다. 흰 털옷은 금화를 주머니째로 주어도 구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북부의 지체 높은 귀족이 아니라면 누구도 감당 못 할 차림이었다.

에길이 이런 판단을 내리고 있던 와중, 악시온은 만달렌의 촌장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인가?”

촌장은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북부의 공작께서 직접 사정을 물어오다니 송구스럽기 그지없었다. 답하지 않는 것은 북부 군주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기에 촌장은 순순히 저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이 모든 사태가 사라진 순록의 가죽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안 악시온은 종이와 펜을 꺼내 몇 줄을 끄적인 뒤 촌장에게 물었다.

“마을에서 가장 발이 빠른 자가 누구인가?”

“티아낙입니다.”

촌장의 시선이 도끼를 든 티아낙에게로 향했다. 마을 제일의 사냥꾼도, 가장 발이 빠른 사람도 모두 그였다. 그렇기에 달락샤까지 가죽을 운반하는 일도 그에게 맡겼다.

촌장의 대답에 악시온은 곧장 티아낙을 불러 그의 손에 종이를 들려주었다.

“즉시 오데르겐 성으로 가라. 성의 가신들에게 이것을 보여주면 순록의 가죽을 내어 줄 것이다. 이것으로 상황을 수습할 수 있을 것이니 더는 순록을 잡지 마라.”

수습을 마친 악시온은 근심을 덜어낸 기색을 숨기지 못한 촌장에게 말했다.

“나와 함께 온 영애는 피 냄새에 익숙하지 않다. 순록을 잡을 이유가 사라졌으니 그만 현장을 정리하라.”

“감사드리옵니다. 한데…… 공작님께서 하사하신 순록의 가죽을 저희가 무엇으로 대체하면 좋겠습니까? 지금 내어주시는 가죽은 저희가 바쳐온 세금이 아닙니까.”

촌장의 물음은 타당했다. 그의 말대로 공작이 내어주는 순록의 가죽은 그간 만달렌이 세금의 일부로 바쳐온 것이다. 한데 이것을 다시 내주게 되었으니 다른 물품으로 세금을 대체함이 옳았다.

마을의 여력을 계산하며 세금을 충당할 궁리를 하는 촌장에게 악시온이 말했다.

“타인의 악의와 농간으로 소요된 일이다. 내 판단으론, 일개 마을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군. 올해의 세금을 일부 감면하며 기한은 유예한다. 이외 자세한 것은 성의 문관이 전달할 것이며, 이 일을 일으킨 주범이 잡히면 오데르겐은 그에게서 손해를 충당할 것이다.”

넉넉한 지시에 촌장은 깊이 안도했다. 감면과 유예가 있는 한, 마을에 큰 부담이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심지어 이것은 북부의 주인이 직접 그 입으로 공언한 사실이다. 형편을 살펴 주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공작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여 보인 촌장은 곧장 순록의 도축 현장을 정리하고 이 사실을 에길에게 알렸다. 뜻밖의 상황에 에길은 난처함을 숨긴 채 놀란 얼굴을 지어 보였다.

“공작님이 마을에 머무시는 줄 몰랐습니다.”

“최근 몬스터들이 몰려와 마을에 피해가 있었소. 그 전수조사를 위해 오셨다오. 그대는 운이 좋았소. 몬스터가 물러난 시기에 이곳 만달렌으로 왔으니 말이오. 지금 막 공작성으로 사람을 보낼 참이오. 순록 가죽이 도착하면 그것을 가지고 떠나시오.”

촌장의 답변에 에길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공작가로 향하는 전령을 처단하고 일정이 늦어진 것에 따른 배상을 하라고 억지를 쓰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마저도 이상적인 방안은 아니다. 이 마을에 북부의 공작이 머물기 때문이다.

값비싼 순록 가죽의 산출지인 만달렌 마을을 집어삼키려던 계획은, 애초에 북부 공작의 사망을 전제로 세워진 것이었다. 올해 몬스터 침공이 끝나고 나면 공작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폭주할 거라 예상했는데…… 보란 듯 예상이 빗나가다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북부 공작의 폭주는 오래전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간신히 폭주를 피했다 해도 공작성에 틀어박혀 힘의 사용을 멈춘 채 요양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공작은 공작성이 아닌 이곳, 만달렌에 있다.

타개책을 세우고 포기하길 반복하던 에길은 이내 결론을 내렸다. 무슨 계획을 세우든, 공작이 이 마을에 없어야 일의 진행이 순조롭다. 하지만 눈앞의 촌장에게 공작이 언제 떠나냐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수상쩍음을 드러낼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사태가 원만히 해결되어 다행입니다.”

이렇게만 말한 에길은 자리를 뜨는 척하며 공관으로 들어서는 악시온을 응시했다. 건장한 체격에 은발이라 알아보는 게 어렵진 않았다. 북부 공작의 외양에 대해서라면 이미 들어서 알기 때문이었다. 꼭 외양이 아니더라도, 존재 자체로 눈에 띄는 위압감과 태생적인 고귀함이 가진바 존재감을 부각시킨다.

바로 저 남자가 북부의 공작이다.

에길은 공관 안으로 사라지는 악시온의 뒷모습을 티 나지 않게 노려보았다. 다만 이상한 점은, 아무리 봐도 폭주를 앞둔 능력자처럼 보이진 않는단 사실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길드에서부터 하달받은 정보가 틀렸을 리 없다.

공관을 바라보며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에길은 문득, 공작보다 먼저 공관으로 들어선 사람을 떠올렸다. 옷을 너무 껴입고 있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었으나 체구가 작았으니 아마 여자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여자는 공작의 동행인이거나 공작가의 일원인가? 생각을 마친 에길은 곧바로 자신의 수행원을 불러 지시했다.

“공작이 언제 마을을 떠나는지 알아봐라. 되도록 은밀히.”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공작과 함께 온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아봐.”

이러한 지시가 오가고 있던 사이, 공관의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보던 지안은 티아낙이 창고에서 커다란 눈썰매를 끌고 나오는 것을 보고 충격받았다.

썰매! 저 썰매가 공작성에도 있었다면 사흘간 발을 혹사시키지 않고도 만달렌에 도착할 수 있었을 텐데!

그나저나 어딜 가려는 걸까? 지안은 창문을 살짝 열고 오가는 이야기를 엿들었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공작가로 향하려는 모양이다.

그리고 개중에는 충격적인 정보가 하나 더 있었다.

순록과 썰매를 이용하면 만달렌과 공작성을 하루 만에 오갈 수 있다!

그 말을 들으니 그간 개고생하며 만달렌까지 도보로 이동한 것이 떠올랐다. 그건 대체 무엇을 위한 고생이었나? 충격적인 진실에 지안은 자신을 뒤따라 공관으로 들어선 공작에게 따져 물었다. 손가락으로는 창 너머의 썰매를 가리키면서.

“공작가에는 썰매가 없나요?”

지안의 항의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린 악시온은 서둘러 변명을 떠올리다 그만두었다. 무슨 말을 하든 간파당하니 모면을 위한 거짓말은 좋지 않다. 이실직고 외엔 답이 없었다.

“……있다.”

“썰매라는 훌륭한 이동 수단이 있는데 우린 왜 만달렌까지 도보로 이동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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