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199)

19화

악시온의 결단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다음 날 지안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것이다. 내내 불퉁해 있긴 하지만, 확실히 열이 내렸다. 이후로 몰래 약을 버리려고 시도한 것만 제외하면 달리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지안이 아프지 않은 걸로 충분했다.

반면 지안은 구역질 나는 약을 충격적인 방식으로 섭취하게 된 것에 따른 반감을 지우지 못했다. 형용할 수 없는 쓴맛이 나는 약을 이후로 두 번이나 더 먹게 된 것도 이 반감을 키우는데 한몫했다.

공작이 그간 극진한 병간호를 해 주었다는 걸 알지만, 그건 정말 분노를 유발하는 맛이었다. 술주정뱅이의 토사물도 그것보단 맛있을 것 같았다. 대체 뭐로 만들었길래 그런 맛이 나는 걸까.

그 끔찍한 맛은 공작의 입맞춤을 아무렇지 않은 일로 치부해버리게 할 만큼 위력적이었다. 부정적인 인상을 주더라도 제 마음을 확고히 표현하고자 결심한 악시온에겐 안 된 일이다.

지안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악시온은 지안을 잘 훈련된 순록의 등에 태웠다. 지안이 자신의 발로 걸을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만달렌의 치료사가 말하길, 발의 물집이 가라앉으려면 족히 이틀은 더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나마 이 외출도 눈이 멎고 바람이 잦아들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만일 추위가 기승을 부렸다면 이렇게 지안을 데리고 나오는 일은 없었으리라. 이 사실을 지안만 몰랐다.

공작은 말없이 순록의 고삐를 잡고 만달렌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장소를 찾았다. 털옷으로 꽁꽁 싸매어진 지안은 눈만 빼꼼히 내놓은 채 그 절경을 구경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만달렌의 절경은, 똘똘 뭉쳐 있던 지안의 반감을 해소시키기에 충분했다.

“와…….”

대체 어딜 가야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을까? 하늘을 찌를 것처럼 솟아오른 산맥 위로 얼음과 눈이 덮이고 그 아래 깎아지른 절벽 사이론 얼어붙은 강이 흐른다. 드문드문 녹색 이끼와 함께 어떻게 자라났는지 모를 나무들이 우뚝 솟아 있는 게 보였다.

이러한 설경을 배경으로 이끼를 찾아 이동하는 순록 무리는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경이롭다고 해도 손색없을 풍광이었다.

감탄의 기색을 읽어낸 악시온이 말했다.

“……북부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알려주고 싶었다.”

“확실히, 추위를 감수할 만한 풍경이긴 하네요.”

지안의 긍정에 악시온이 기쁜 얼굴로 말했다.

“밤중에 바람이 불지 않으면 다시 나오지. 지금과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대화를 이어나가려는 공작의 의도가 읽혀졌으나 지안은 모른 척 되물어 주었다. 저렇게나 호감을 드러내면 아무래도 무시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다른 모습이라면?”

“만달렌에선 오로라가 자주 나타난다.”

오로라라니. 이건 좀 솔깃한 이야기다.

“정말인가요?”

“북부에선 주로 녹음의 커튼이라고 부른다. 가끔은 보라색이나 짙은 청색도 볼 수 있다. 북부 샤먼들은 오로라의 색상으로 다음 해 사냥의 성과를 예측하지.”

샤먼도 있구나. 북부의 여신을 숭앙한다기에 내심 신관이 있겠거니 했는데, 명칭이 좀 다른 건가? 어쩌면 민간에서는 샤먼에게 주로 의지하고 귀족들은 신관을 가까이하는지도 모른다. 북부의 초대 공작도 신을 위한 신전을 지어 바쳤다지 않는가.

“이곳 사람들은 신을 믿나요?”

“대체로 믿는 편이다. 나 역시 그렇다.”

“의외네요. 신앙이 있으신 줄은 몰랐어요.”

“신앙은 신관들이 가지는 것이다. 내겐 허락되지 않은 것이지. 애초에 나는, 신을 믿지도 않았다.”

“네? 방금 전엔 신을 믿는다고 하셨잖아요?”

“그대가 나타났으니까.”

“…….”

“그대는 존재 자체로 내게 신에 대한 믿음을 일깨운다.”

난감하다. 하지만 게이트를 통해 차원을 넘어버린 마당에 단정하듯 부정하기가 어려웠다. 지금의 상황을 야기한 게 과학으로 설명 가능한 시공의 꼬임이나 차원의 연결인지, 아니면 신의 농간인지 진실을 알 재간이 지안에겐 없었다.

게다가 자신을 두고 신에 대한 믿음을 운운하는 공작의 말은 부담 그 자체이다. 지안은 대화의 주제를 슬며시 바꾸었다.

“그, 신의 존재유무는 둘째치고, 샤먼과 신관의 명칭이 나뉘어 있는 이유가 있나요?”

정말 쓸데없는 질문이었지만 당장 생각해낸 것이 이것밖에 없었다. 잠시 설명을 고민하던 악시온이 말했다.

“명칭이 갈라진 것은 북부가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면서부터다. 제국의 종교는 주신 에다를 기본으로 한다. 제도 파가디안에는 대신전이 있고, 대신전은 교황의 직속 기구지. 제국민들은 주신 에다를 믿지만 북부는 다르다. 샤먼은 북부의 여신을 모신다. 본래라면 이들 역시 신관이라고 불려야 하겠지만, 신성력을 북부에 한정해 사용할 수 있다는 한계가 명확했다. 에다의 신관들과는 달랐지. 때문에 차별을 두어 샤먼으로 격하되었다.”

“반발이 있었을 것 같네요.”

“있었으나, 수백 년 전의 일이다. 옛날에는 멸칭으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샤먼이라는 명칭이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지. 이젠 샤먼들도 자신들이 샤먼으로 일컬어지는 걸 불쾌해하지 않는다.”

“신성력을 북부에 한정해 사용할 수 있단 건 무슨 뜻인가요?”

“말 그대로다. 이들의 신성력은 추위와 얼음을 다루는데 특화되어 있고 그조차 북부에 한한다. 때문에 샤먼들은 북부를 떠나지 않는다. 이 땅을 벗어나면 그들이 평생 수련해온 힘이 무용해지기 때문이다. 북부에선 한해의 사냥이나 경작을 위해 샤먼들의 힘을 빌리곤 한다. 굳이 표현한다면, 샤먼은 사냥꾼과 농부의 친구라 할 수 있다.”

생각보다 더 상세한 설명이었다. 북부역사와 문명의 발전을 본의 아니게 엿본 기분이었다. 떨떠름해지는 지안의 표정을 본 악시온이 말했다.

“그대는 신을 믿지 않는 것 같군.”

“네. 믿지 않아요.”

“어째서인가? 그대 본인이야말로 신이 보낸 사자가 아닌가.”

저런 질문엔 무슨 말을 해도 알맞은 대답이 되지 않는다. 지안은 대꾸 대신 입을 다물었다.

* * *

지안과 공작이 만달렌 마을 인근의 언덕에서 절경을 감상하던 무렵, 만달렌에는 일단의 무리가 들이닥쳤다. 순록의 모피를 목적으로 찾아든 달락샤의 상단이었다.

순록의 모피라면 이미 달락샤로 보냈을 텐데.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이 무리를 살펴보는 촌장에게 티아낙이 다가왔다. 우울한 눈빛을 하고 있는 그는 앞서 만달렌의 순록 가죽을 달락샤로 옮기는 임무를 맡았던 마을 제일의 사냥꾼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촌장님.”

“티아낙.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상인들이 왜 여기까지 왔는가?”

“그게…… 제닝스 상단에 넘길 가죽이 사라졌습니다.”

침울히 답하는 티아낙의 말에 촌장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가죽이 사라지다니?”

“……말 그대로입니다. 달락샤에 도착하기 사흘 전, 가죽이 든 썰매가 사라졌습니다.”

“습격이라도 당했단 말인가?”

“아닙니다. 도난당했습니다.”

“도난?”

“아마 능력자나 마법사의 소행인 것 같습니다. 한밤중에 썰매가 사라진 것도, 집단 간 무력 충돌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 이동하던 도중 썰매를 끄는 순록의 걸음이 너무 빨라지기에 뒤를 돌아봤는데…… 썰매가 통째로 사라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썰매에 가득 실려 있던 순록의 가죽도 통째로 사라졌다. 이 영문 모를 사태를 맞이하게 된 티아낙은 고심 끝에 달락샤의 상인들에게 사실을 그대로 전했고, 상인들은 순록 가죽을 받아가기 위해 달락샤에서 만달렌까지의 이동을 감행했다.

모든 사실을 전달받은 촌장의 입에서 긴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허어…….”

“죄송합니다. 저로선 방도가 없었습니다.”

당연하다. 능력자나 마법사의 개입이 분명하다면 티아낙이 뭔가 수를 쓸 여지는 없었을 것이다. 촌장은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잠자코 기다리는 상인들의 면면을 티 나지 않게 살피며 미간을 구겼다.

“……예년과 달리 제닝스 상단은 대금을 미리 지불했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영락없이 가죽을 내주는 수밖엔 도리가 없겠군. 내 말이 맞나?”

면목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티아낙의 모습에 촌장은 끌끌 혀를 찼다.

이 일은 티아낙의 잘못이 아니다. 마법사와 능력자들은 우리 같은 일반인이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신기한 비술과 능력을 다루는 자들 아닌가. 상황이 이렇게 되니 전해와 올해의 대금을 미리 지불한 제닝스 상단의 결정이 새삼 의심스러워질 뿐이다.

작년, 제닝스 상단을 새로이 물려받게 된 상단주는 신용과 거래의 유지를 위해서 미리 대금을 지불하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그것이 오늘을 위한 노림수였다면?

의혹은 생겼으되 속단할 순 없었다. 우선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게 먼저다. 촌장이 고개를 빼 들자 먼 거리에서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던 상인이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상단주님의 대리자, 에길입니다. 만달렌의 촌장 되십니까?”

“그렇소.”

“저희가 받지 못한 물품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대금은 이미 지급된 것으로 압니다.”

“알고 있소. 어떻게든 맞춰 드리리다. 하지만 순록을 잡아서 가죽을 손질하는데 시간이 좀 걸릴 거요.”

촌장의 말에 티아낙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제닝스 상단에 넘길 순록 가죽을 마련하려면 순록을 백여 마리 이상 잡아야 한다. 그렇게 많은 순록을 한 번에 잡을 순 없는 일이다. 그리하면 부산물인 고기를 한 번에 소비할 수도 없지 않나.

그간 만달렌의 사람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순록을 잡아서 고기를 소비하고 가죽을 보관해왔다. 백 마리에 이르는 순록을 한꺼번에 잡으면 당장은 저장고가 풍족해질지 모르나 장기간에 걸쳐 마을의 식량 사정이 위축될 것이다. 순록의 머릿수가 늘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제약도 생긴다. 자칫 잘못하면, 내년에 상단과 거래할 순록 가죽을 마련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사정은 전적으로 만달렌의 것이다. 제닝스 상단의 대리자 에길이 헤아려주어야 하는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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