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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18/199)

18화

“공작님. 염려해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그런 비교는 달갑지 않네요. 제가 공작님의 괴력을 몬스터와 비교하던가요?”

지안의 지적에 악시온은 움찔했다. 성급한 마음에 부주의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지안의 발이 무리한 가이딩으로 인한 것일까 봐 다급히 추궁했는데 도리어 역효과를 본 것이다. 침음한 악시온이 말했다.

“인정한다. 내 말이 부적절했다. 다음부턴…… 말을 준비시켜야겠군.”

“말이요? 저는 말을 탈 줄 모르는데요.”

“승마를 배우지 못했단 말인가?”

“그게, 승마를 배우지 않아도 이동에 문제가 없는 삶을 살았거든요.”

“그럼 순록을 찾아보겠다.”

“순록이요?”

“여긴 만달렌이다. 찾아보면 탈 것으로 훈련시킨 순록이 있을 것이다. 말보다 덩치가 작아서 훈련 없이도 탈 수 있지.”

그런 것이라면 여차저차 탑승을 시도해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만달렌의 순록이라면 지안도 멀리서 지켜본 기억이 있었다. 회색 털과 솟아오른 뿔이 대단히 멋진 순록들이었다. 이 유순한 초식동물들이 눈 아래 묻힌 이끼를 뜯어 먹는 장면은 지안에게도 꽤 인상적이었다.

“그대는 씻어라. 나는 화상에 듣는 약초를 찾아보겠다.”

그렇게 말한 악시온은 지안이 붙잡을 새도 없이 저만큼 멀어져 버렸다. 지안은 공작의 등에 대고 화상이 아니라고 외쳐야 하나 고민했지만, 관둬 버렸다. 당장 목청을 높일 기운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화상에 드는 약초라면 진정과 소독 효과를 겸할 것이다. 실상은 발을 혹사시킨 결과에 불과하지만 그럭저럭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렇듯 지안은 공작의 반응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가 제 발을 보고 무리한 가이딩으로 인한 것이 확실하단 생각을 하는 줄 알았다면 늦지 않게 오해를 풀었을 것이나, 애석하게도 그런 일은 없었다.

확고부동한 오해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을 모른 채, 지안은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갑갑한 털옷 대신 울로 만든 가벼운 내복을 입자 몸이 한결 가벼웠다. 추위로 위축된 몸에 끼얹어진 뜨거운 물 덕분이었다. 북부에선 감히 있을 수 없는 사치였다.

여기에 더해 따뜻한 온기가 지안을 반겨 주었다. 목욕하던 사이 누가 다녀간 모양이었다. 싸늘히 식어 있던 벽난로엔 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그 옆에는 장작이 한 무더기로 쌓여 있다.

공작일까? 아니면 촌장의 아들인가? 생각하다 말고 지안은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사흘간 혹사한 몸이 여기저기 삐그덕거려 더는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깜빡 잠이 들어버린 것 같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지안은 공작이 벽난로에 장작을 밀어 넣는 것을 보았다. 어째 입 안이 불쾌하게 말라 있었고 온몸이 뜨거웠다. 이마엔 물수건이 올려져 있다.

아픈 것 같았다. 아니, 아프다.

어찌어찌 버텨 준 몸이 파업 선언을 한 것이다. 이는 악시온의 지극한 노력이 가닿지 못한, 지안의 형편없는 체력과 관계된 일이었다. 지안은 흐릿한 눈으로 침대맡 협탁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물 주전자로 보이는 것이 거기 있었다. 한 모금 마시면 다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기껏 손을 뻗어도 헛손질만 할 뿐이다. 바로 그 헛손질이 야기한 소리에 악시온은 장작을 뒤적이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일어날 필요 없다. 더 자라.”

그렇게 말하며, 악시온은 지안의 입가로 물컵을 대어 주었다. 만족할 만큼 목을 축인 지안은 그대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그런 지안을 악시온은 먹먹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가이드가 앓기 시작한 건 전적으로 그의 탓이기 때문이었다.

실상은 지안의 체력이 너무 허약해서 생긴 일이지만, 이를 알릴 당사자는 정신을 잃은 뒤다. 악시온은 침울한 기색으로 지안의 이마에 올린 물수건을 갈아냈다.

다음 날 아침까지 뜬눈으로 지안을 간호한 악시온은 지안이 정오를 넘기고도 눈을 뜨지 않자 마을의 치료사를 불렀다. 간밤에 지안의 화상을 치료할 약초를 준비해준 자였다.

만달렌의 치료사 아슬락은 열에 들뜬 지안의 상태를 확인하고서 감기몸살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단순 감기몸살로 정오가 넘도록 깨어나지 않을 수 있는가?”

“어린아이들은 곧잘 그러기도 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 영애께선 체력이 허약하신 것 같군요. 우선 처방하겠습니다. 계피와 정향, 몬나잎, 비파렌 뿌리 정도면 적당하겠습니다. 약을 먹인 이후에도 이 상태가 지속되면 그때 다시 불러 주십시오.”

“상태가 지속되면, 어찌해야 하는가?”

공작의 질문에 아슬락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약을 먹이고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는다면 이후의 수단은 하나뿐이다.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북부의 추위를 견디기에 부적합하단 뜻이니 요양을 위해 최대한 남쪽으로 내려보내는 수밖에요. 이틀 후에도 나아지지 않는다면 달락샤로 보내는 것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슬락의 권유에 악시온의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그의 말대로 북부에선 체력이 너무 약한 아이와 회복할 수 없는 병자들 대부분은 북부 경계선 마을인 달락샤로 보내진다. 그곳이 그나마 추위가 덜하기 때문이다. 중앙과 가까워 약초의 수급과 물자를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이유도 있다.

악시온도 이를 모르진 않았다. 모르지 않으나, 다른 방도가 있길 바랐다.

“……수고가 많았다. 물러가라.”

상심 어린 목소리에 아슬락은 송구한 얼굴로 공관에서 벗어났다.

그로부터 다시 몇 시간이 지났다. 약초를 달이고, 물수건과 대야의 물을 수차례 갈고, 벽난로 옆에 둘 장작을 다시 마련하기까지 걸린 시간이기도 하다. 지안은 정오를 한참 넘긴 오후 나절에 눈을 떴다.

지안이 가장 먼저 인식한 것은 꽉 잠겨버린 목과 화끈거리는 두 발이었다. 뒤이어 머리가 어질어질한 것이 느껴졌다. 수건을 끌어내려 얼굴을 닦자 조금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으나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길게 숨을 몰아쉰 지안의 코끝으로 방 안을 감도는 약 냄새가 스며들었다.

“일어났군.”

공작님? 지안은 이렇게 말하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악시온은 지안의 입 모양으로 그 부름을 알아들었다.

“말하지 마라. 수프와 약을 준비해 놓았다. 먹고 나면 한결 나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악시온은 지안의 등 뒤에 쿠션을 여럿 덧대어 주었다. 비스듬히 기대앉은 지안은 얌전히 악시온이 떠먹여 주는 수프와 약을 받아먹었다.

본래라면 이런 상황이나 구도를 만들어내지 않았겠으나, 직접 먹겠다고 고집을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두 팔이 축축 늘어지는 건 물론이요, 어질거리는 머리를 가누는 것마저 힘들었다. 그간 공작성에 감금당하며 받은 스트레스와 만달렌에 이르기까지의 무리한 여정이 지금의 결과를 낳은 듯했다.

지안은 수프를 절반쯤 받아먹은 이후 악시온이 입가에 대 준 약을 마셨다. 정확히는, 마시려 했으나 토악질이 나올 만큼 쓴맛에 기침하며 뱉어내고 말았다.

이 한 번의 기침으로 지안의 얼굴과 침구가 엉망이 되었다. 악시온의 소맷부리에도 갈색의 약즙이 튀었다. 악시온은 당황하지 않고 물수건으로 지안의 얼굴을 먼저 닦아낸 뒤 촌장의 아들을 불러 침구를 새것으로 내오라 지시했다. 본인의 소매가 더럽혀진 것은 그에게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악시온은 다시 한번 약을 지안의 입가에 댔다. 기겁할 만한 맛을 경험해버린 지안이 고개를 가로젓자 악시온은 열심히 지안을 달랬다.

“먹어야 한다. 그래야 낫는다.”

그 간청은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했다. 몇 번의 권유와 실랑이와 애걸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힘없는 병자로 전락했음에도 지안의 고집이 생생한 근성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저걸 먹느니 아프고 만다!

이것이 지안의 선택이었다. 혀에 닿는 순간 구역질을 야기하던 끔찍한 맛을 생각하면 이 선택은 몹시 당연한 것이었다.

그 결과, 악시온은 타들어 가는 초조함을 어쩌지 못했다. 글썽글썽한 눈으로 고개를 저으며 완강히 거부하는 지안에게 어떻게 약을 먹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아프도록 내버려둘 수도 없다.

치료사의 말대로 그녀를 달락샤로 보내야 하나?

하지만 달락샤는 상인들이 활발히 드나드는 곳이다. 북부의 요양원인 동시에 물자와 무역이 가장 발달된 곳이 바로 달락샤였다. 그런 곳에 그녀를 두었다가 자신과 같은 능력자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그래서 그녀의 정체가 들통나 버리면 어떡한단 말인가?

고심 끝에 결정이 내려졌다.

“고, 공작님?”

단숨에 약을 들이켠 악시온은 그대로 지안에게 입 맞췄다. 아무리 달래도 먹지 않으니 이 수밖에 없다.

……이 행위에 사심이 없다고 말할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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