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창피함을 무릅쓰고 공작의 등에 업힌 지안은 더는 고행 같은 행군을 지속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감사했다.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세 시간이나 걸은 터라 체력은 벌써 방전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공작의 등은 예상외로 안락했다. 생각보다 흔들림이 적었고, 옷 너머로 전해지는 체온은 핫팩처럼 따뜻해 사람을 노곤노곤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둘의 조합은 체력이 다한 지안에게 일종의 수면제와 같았다. 지안은 순식간에 악시온의 등에 업혀 잠들어버렸다.
그 덕에 악시온은 닷새 정도의 여정에서 하루를 줄여 계산할 수 있었다. 지안이 잠든 사이 최대한 속도를 내면 적어도 사흘째 되는 날에는 만달렌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다들 만달렌 하면 순록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정작 만달렌에 도착한 사람은 마을 인근의 설산이 보여주는 북부의 절경과 오로라에 더욱 감탄한다. 악시온은 지안에게 바로 그 풍광을 보여주고 싶었다.
물론, 만달렌까지의 여정을 함께하며 지안과 친분을 쌓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악시온은 힘차게 나아갔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지안이 자신의 등에 잘 업혀 있는지, 깨어날 기척이 느껴지진 않는지 확인했다. 등 뒤로 느껴지는 지안의 무게는 털실만큼이나 가벼웠다.
한참을 달게 잔 지안은 늦은 오후가 돼서야 깨어났다. 지안이 잠에서 깨자 악시온은 곧바로 모닥불을 피우고 그 위에 냄비를 걸었다. 지안은 잠이 덜 깬 눈으로 공작의 배낭에서 냄비와 채소, 고깃덩이가 나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놀랍게도 공작은 자신의 손을 도마처럼 쓰고 있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서 채소와 고깃덩이가 쑹덩쑹덩 썰려 나가 냄비에 안착했다. 그 위로 정체 모를 향신료가 첨가되고 물이 끓자 곧 맛있는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지안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공작성에서 먹은 스테이크도 맛있었지만, 냄비 속의 음식도 그 못지않게 맛있을 것 같았다. 냄비에서 피어오르는 향신료의 냄새가 이를 증명했다.
“다 끓었군.”
냄비 안의 상황을 확인한 악시온은 가장 먼저 지안에게 스튜를 떠 주었다. 지안은 숟가락 하나가 무심하게 푹 박혀 있는 그릇을 받아들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식기 전에 먹는 게 좋겠다. 먹고 있어라. 나는 잠시 주변을 살피고 오겠다.”
“같이 안 드시고요?”
“잠깐이면 된다.”
대답을 꺼린다. 화장실인가? 만약 그런 거라면 계속 캐묻는 것도 실례다.
지안이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자 악시온은 검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튜 냄새를 맡은 이리 떼가 슬슬 도착할 때가 되었다. 지금 가서 미리 없애놓지 않으면 지안이 놀랄 것이다.
북부의 척박한 현실이 부끄러운 건 아니지만, 부러 지안에게 이런 현황을 알릴 필요는 없었다. 북부인이라 할 수 없는 지안이 이리 떼와의 불편한 조우를 경험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몬스터도 아니고 고작해야 늑대 무리에 불과하니 처리에 걸릴 시간은 어림잡아 십 분이면 충분했다. 계산을 마친 악시온은 걸음을 서둘렀다. 지안이 눈치채기 전에 몰려든 늑대 무리를 도륙해야 했다.
지안이 자신을 보고 있지 않음을 확인한 악시온은 저 멀리서 슬금슬금 배회하는 늑대 무리를 향해 그대로 쏘아져 나갔다.
그의 대검이 무리의 가장 앞에서 어슬렁대던 늑대를 양단할 무렵, 지안은 연신 감탄하며 그릇 절반을 비우고 있었다.
그냥 육체강화계 에스퍼인 줄로만 알았는데 공작이 이런 요리실력을 갖추고 있을 줄은 몰랐다. 공작쯤 되면 요리와는 거리가 멀 텐데도 맛이 훌륭하다. 배낭에서 이런저런 요리재료가 나온 걸 보면 의외로 미식가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서둘러 먹을 생각이 없었는데도 서둘러 먹게 되는 맛에 지안은 한 그릇을 뚝딱 비워냈다.
그리고 공작은, 지안이 스튜의 마지막 숟가락을 입에 넣던 순간 나타났다. 지안의 그릇이 빈 것을 확인한 악시온은 말없이 스튜를 한 그릇 더 떠서 지안에게 내민 후 자신의 식사를 시작했다.
지안은 조금 찝찝해진 기분으로 그릇을 받아들었으나, 다시 스튜를 맛보고선 찝찝함을 말끔히 잊었다. 점심이라기엔 너무 늦었지만, 평화롭다면 평화로운 점심이었다. 한가로움이 두 사람의 머리 위를 따스히 맴돌다 사라졌다.
다만, 악시온의 손에 몰살당한 늑대들에겐 불운한 하루라 할 수 있겠다.
* * *
만달렌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은 지안에겐 무척이나 색다른 인상을 주었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악시온의 노력이 일궈낸 결과였다.
걷기 힘들면 업혀 가는 데다, 식사는 늘 맛있고, 몬스터 비슷한 것은 그림자도 구경하지 못했다. 이글루에서 청하는 잠은 낯선 동시에 설레고 신기한 경험이었고, 심지어 얼음으로 만들어진 이 견고한 텐트는 전적으로 악시온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지안이 한 거라곤 악시온이 다 만든 이글루에 작은 숨구멍을 뚫은 것이 전부였다.
총평하자면 그야말로 안락한 여정이었다. 지안이 북부를 호의적으로 인식하길 원한 악시온이 갖은 노력을 다한 탓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수월한 여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안의 두 발에는 커다란 물집이 여럿 잡혔다. 개중에 몇 개는 걷는 도중 터져버려서 몹시 쓰라리고 아팠다. 갑작스러운 운동에 놀란 다리 근육이 꽉 뭉쳐 버린 건 말할 것도 없다.
지안의 발이 이토록 엉망이 된 건, 그간 운동이나 여행과는 영 거리가 먼 생활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이쯤 되자 공작성 너머의 마을에서 가이드를 찾겠다는 자신의 계획이 얼마나 무모하고 사정 모르는 것이었는지 알기 어렵지 않았다.
엉망이 된 발을 내려다보며 지안은 이런저런 후회를 곱씹었다.
가장 먼저, 소량이라도 소독 젤을 남겨 놓았어야 했다. 응급 키트를 그렇게 탈탈 털어 쓰는 것이 아니었다.
두 번째로 후회되는 것은 공작성 너머에서 가이드를 찾아내겠다는 무모한 계획을 세운 것이다.
만달렌에 도착한 직후, 아픈 발을 무시한 채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보았으나 성과는 전무했다. 처음부터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하긴 했다. 지구에서도 가이드는 희귀한 편이다. 인류의 1% 이하만이 가이드로 각성한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눈앞이 아득해질 정도다.
그러나 달리 방도가 있는가? 짙은 후회가 동반됨에도 불구하고, 이곳 세상 어딘가에 존재할 가이드를 찾아내겠다는 기존의 결심에는 변함이 없다.
앞으로도 이에 대해 무수한 후회와 고뇌를 하겠지만, 별수 없는 일이다. 힘들 거란 이유로 두 손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공작의 전담 가이드로 살아갈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그나마 휴대용 매칭률 계산기에 가이드 판결기능이 더해져 있어 다행이었다.
지안은 막막한 심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간만에 지붕 있는 집에서 잠들게 되었단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그래도 잘 생각해보면 소득이 전혀 없진 않았다. 북부의 생활상에 어설프게나마 익숙해진 것이다.
다만 아주아주 곤란한 문제가 하나 있는데, 가이드를 찾기 위한 이 여정에 공작의 동참이 필수적이란 것이다.
뭘 잘 모르는 지안이 보기에도 공작은 좋은 여행 동반자였다. 그는 험상궂은 인상의 북부인들보다 더 힘이 셌고, 이곳 세상의 사리와 물정에 밝았다. 북부인 중 가장 신분이 높다는 점도 가산점을 주어야 하는 부분이다. 실제로 만달렌의 사람들은 공작을 존중과 경외의 태도로 대하고 있었다.
이는 공작이 대대로 북부를 지배한 귀족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분제 사회에서 귀족 신분이 얼마나 편리하고 써먹기 좋을지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이것이다. 운이 좋아 가이드를 찾아낸다 해도, 공작은 이 사실을 반기지 않을 것 같았다. S급이고, 매칭률 98%인 자신보다 더 나은 가이드가 나타나리란 보장도 없지 않은가.
어쩌면 운이 나빠 공작과 비슷한 에스퍼와 조우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프랑스에선 가이드를 둘러싼 에스퍼 간의 전투로 인해 도시 하나가 반파되는 사건도 있었다. 생각하니 심란해져서, 지안은 그만 생각을 멈췄다.
이 이상으로 골치 아픈 일이 생기는 건 바라지 않았다. 코앞에 닥친 상황만으로도 충분히 골치 아프지 않나.
그래, 아직 당도하지 않은 상황까지 앞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 만일 공작 외의 인물에게서 파장이 느껴진다면, 그 사람의 상태가 어떻든 일절 관여하지 않고 몸을 피하리라. 과연 이 결심대로 움직일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마음을 냉혹하게 굳힐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상념에 매몰되어 가던 와중, 노크 소리가 지안을 일깨웠다.
“누구세요?”
“들어가겠다.”
통보와 함께 문이 열렸다.
“목욕물이 준비되었다고 한다. 먼저 씻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말하던 도중 악시온의 입이 딱 다 물렸다. 엉망이 되어 버린 지안의 발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화상인가?”
이런 물집은 화상이 아니면 생기지 않는다. 악시온의 상식으론 그랬다. 단순히 오래 걷는 것만으로도 발이 물집으로 뒤덮일 수 있다는 걸 악시온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안은, 별안간 노호성을 터뜨린 공작의 기세에 놀라 말문을 잃었다. 악시온은 자신의 외침에 지안이 놀란 것을 깨닫고 서둘러 목소리를 낮췄다.
“……화를 낸 것이 아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어. 네. 저도 놀라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답지 않게 멍청히 대답한 지안은 이어진 공작의 물음에 정신을 차렸다.
“많이 아픈가?”
“아, 괜찮아요. 참을 만해요.”
“내내 이랬던 건가? 그간 쉽게 지치고 걸음이 느렸던 것도 전부 발이 아파서였나?”
“…….”
“대답해다오. 이건…… 무리하게 가이딩을 한 여파인가?”
마지막 질문이 지안을 창피하게 만들었다. 그간의 게을렀던 생활과 운동 부족이 이런 식으로 폭로되는구나!
“아니요. 이건 그런 게 아니라……. 걷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요.”
“걷는 게 익숙하지 않다니? 발이나 다리에 기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그렇지?”
훌륭하게 지안의 말문을 막아버린 악시온은 다음의 말로 지안을 침몰시켜 버렸다.
“내가 알기론, 부상으로 한쪽 다리가 없는 자도 그대보다 더 빠르게 걸을 수 있다.”
그 말에 지안은 잠시 앓는 소리를 냈다. 아니, 다리가 없는데 어떻게 걷는단 말이죠? 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따져 묻고 싶었다. 체력이 좋지 않다는 걸 스스로도 자각하고는 있지만…… 이렇게 확인을 받으니 없던 수치심마저 몰려올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