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그렇게 한 차례 진통을 치러낸 지안은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식당으로 향했다. 너무 많이 입어서 그런지 걸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 지안을 보고 있던 악시온이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발목에 문제가 있는가?”
“그냥 옷을 너무 껴입어서 그래요.”
대꾸한 지안의 눈에 악시온의 옷차림이 들어왔다.
“그런데 공작님은 왜 그렇게 차림이 가벼우세요?”
“나는 추위를 잘 타지 않는다.”
확실히 체온이 높은 사람이긴 했다. 이건 처음 접촉 가이딩을 시도했을 당시에도 인지했던 사실이다.
“그래도 고작 가죽조끼랑 망토 가지고 되겠어요? 춥지 않을까요?”
“충분하다. 이보다 더 많이 껴입으면 유사시 전투에서 움직임이 둔해진다.”
“전투요?”
지안이 불안한 얼굴로 되묻자 악시온은 얼른 말을 바꾸었다.
“비교적 공작성에서 가까운 마을이라 아무 일 없을 거다.”
악시온의 말에 말없이 뒤따르던 헤롤드와 루시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북부인이라면 만달렌으로 향하는 길에 이리 떼가 달라붙는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순록을 키우는 것을 업으로 삼는 마을이라 자연스레 근방에 이리 떼가 어슬렁거리게 된 것이다. 재수가 없으면 눈트롤을 만나기도 한다.
그래서 만달렌은 중요한 볼일이 없으면 북부인들도 자주 방문하지 않는 마을이었다. 순록의 가죽과 고기를 얻기 위해 방문해야 할 때는 반드시 서른 이상의 건장한 남자들이 집단을 이루어 향한다. 이것이 통상의 원칙이다. 순록의 고기와 가죽을 싸게 구입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긴 하지만, 이외엔 딱히 장점이랄 게 없는 마을인 것이다.
그나마 장점을 하나 꼽으라면 공작성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란 점을 꼽을 수 있겠다. 다만 도보로 사흘이란 여정이 걸린다. 썰매를 이용해도 하루가 꼬박 걸리는 거리다.
할 말이 많았으나 헤롤드와 루시는 근질대는 입을 다물었다. 신하 된 도리로서, 공작가의 봉록을 먹고 사는 자로서 감히 제 주인이 말하지 않은 사실을 지적할 순 없었다.
* * *
공작이 성문을 열라고 지시하자 거대한 도르래가 거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육중한 성문이 사람 한 명이 지나갈 정도의 틈을 허용하자 그 너머로 끝없이 쌓인 눈평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안은 앞서 걷는 공작의 뒤를 따랐다.
공작은 거대한 짐을 등에 짊어지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단연 압도적인 것은 검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정신이 없어 잘 살펴보지 못했는데, 검의 크기가 무려 성인 남성의 키에 육박한다. 넓이는 지안의 두 손을 쫙 펼친 것만큼이나 컸다.
그야말로 대검 중의 대검이라, 사람이 쥐고 휘두른다기보다는 장식용으로 더 적합할 것 같았다. 하지만 지안은 공작이 그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단칼에 뎅겅뎅겅 몬스터의 목이 날아간 것도 기억한다.
그런데 갑자기, 공작이 등에 매단 검을 빼 들었다.
뭐지? 근처에 몬스터라도 있나? 아니지. 눈이 이렇게 높이 쌓였는데 어떻게 몬스터가 접근한단 말이야? 의아해하는 지안에게 악시온이 말했다.
“조금 물러나 있는 게 좋겠다.”
“근처에 몬스터가 있나요?”
“그런 건 아니다. 검풍에 그대가 다칠 수도 있어서 그렇다. 뒤로 열 발자국만 물러나 주면 좋겠다.”
검풍이라니? 영문을 몰랐으나 지안은 공작의 말에 따라 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지안은 공작이 빼든 대검의 용도를 깨달을 수 있었다. 공작이 검을 들어 크게 휘두르자, 그 궤적을 따라 상식을 넘어서는 압력이 생겨난 것이다. 고작 검 한 번 휘두른 것뿐인데 가슴 높이로 쌓인 눈이 둘로 쩍 갈라지며 길을 터 주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기예였다.
잠시 넋을 잃은 지안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악시온에게 충고했다.
“너무 힘을 많이 사용하면 그만큼 가이딩 주기가 빨라지고 가이딩 중독이 생길 수도 있어요. 길이 생긴 건 좋은데, 계속 이런 방식으로 가야 하는 건 아니죠?”
“가이딩 중독?”
“모르시나요? 어머니께서 가이드셨다면 분명 들어보셨을 텐데요.”
“……어머니는 내가 어릴 적 돌아가셨다.”
“아.”
그렇다면 가이드 중독에 대한 설명을 듣지 못한 것도 이해가 간다.
“가이딩 중독은 너무 자주 가이딩을 받았을 때 생기는 현상이에요. 가이딩에 중독되면 가이딩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죠.”
그리고 가이딩 중독은 높은 확률로 가이딩 착취로 이어진다. 중독자들은 애매한 가이딩으론 절대 만족하지 못한다. 필연적으로 그들은 가장 고강도의 가이딩을 원하게 되고, 최악의 경우 강제력을 동원한다. 말인즉, 가이딩 착취다. 지안은 침을 삼키며 마저 설명했다.
“참고로 가이딩 주기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가 좋아요. 능력을 과다 사용했다면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그 이상은 좋지 않아요. 가이드인 제게도 무리가 오니까요.”
무리가 온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 정도 안전장치는 해 두는 게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뱉은 말인데……. 공작의 표정이 돌연 심각해졌다.
“무리가 온다고?”
“조금요.”
“증상은?”
“……그때그때 달라요.”
“그렇군. 명심하겠다.”
괜한 말을 꺼냈나? 지안은 긴가민가하며 공작의 눈치를 살폈다. 가슴 어디쯤에서 양심이 나 여기 있다고 외치는 것 같기도 했다.
지안은 애써 공작의 심각한 얼굴을 외면했다. 이런 사소한 거짓말, 분명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데 저 얼굴에는 계속 마음이 약해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안의 거짓말은 확실하게 악시온의 머리에 틀어박혔다. 악시온은 지안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고, 검풍을 일으켜 길을 만들어내는 기예를 다시 선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길이 만들어지긴 했다. 앞서 보여준 것처럼 백미 터쯤 되는 길이 단번에 만들어지진 않았지만, 검 한 번 휘둘렀다고 십 미터 십오 미터 정도로 길이 생겨나는 건 여전히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장면이었다.
어떻게 사람의 완력이 굴착기와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일까? 순수한 힘만으로 가능한 일이냐고 묻자 공작은 이렇게 답했다.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데 집중하면, 가능하다.”
지안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그냥 그렇구나 하면서 넘기는 것 외에 달리 무슨 방법이 있을까. 적어도 공작과 비슷한 수준의 에스퍼 정도는 돼야 저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만달렌까진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지안의 질문에 악시온은 지안의 발걸음 속도를 가늠해보았다. 털신에 아이젠을 끼운 지안의 걸음은 악시온의 기준에서 몹시 느렸다. 서해엔 거북이란 것이 산다던데, 지안은 바로 그 해양 생물처럼 느렸다. 확신하건대 북부의 일곱 살 어린아이도 지안보다는 빨리 걸을 수 있을 것이다.
“사흘, 아니, 닷새 정도 걸릴 것 같다.”
“네? 그렇게나 오래요?”
지안이 화들짝 놀라자 악시온은 그제야 지안이 북부의 생활양식을 전혀 모른단 사실을 떠올렸다. 북부에서의 마을 간 이동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다니, 그의 실책이었다.
한편, 지안은 낭패한 얼굴로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간 공작성 바깥으로 나가려고 시도하긴 했으나, 항상 성문 앞에서 가로막히거나 번번이 추위로 좌절된 탓에 북부의 실정에 대해 잘 몰랐던 것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껏해야 하루 안에 다녀올 수 있는 마을인 줄 알았다.
“만달렌은 오데르겐 공작성에서 가장 가까운 영지다.”
난처함이 묻어나는 공작의 설명이 이어졌지만, 이런 추위에 지붕도 없는 곳에서 잠들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벌써 공작성의 벽난로가 그리워지려 했다.
“제가 거기까지 갈 수 있을까요? 잠은 어떻게 하죠?”
“걷기 힘들다면 업어 주겠다. 잠은 눈 속에서 청하면 된다. 그대는 모르겠지만, 눈을 벽돌처럼 만들어서 쌓으면 훌륭한 피난처가 된다. 생각 이상으로 아늑하니 춥지 않을 거다.”
이글루를 말하는 거구나. 그래, 잠자리는 그렇다 치자. 하지만…….
“이미 메고 있는 짐은 어쩌고요?”
지안의 말대로 가벼운 짐가방 하나 메고 있지 않은 지안에 비해 악시온의 등에는 커다란 배낭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잠시 고민한 악시온이 말했다.
“짐은 앞으로 메면 그만이다.”
공작의 말에 지안은 그의 등에 업혀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차라리 봄이 오길 기다리는 게 낫지 않을까? 날이 풀이고 눈이 녹으면 그때 만델린으로 가는 거다. 봄이 돼서 길이 녹은 후에 방문해도 늦지 않다.
‘하지만….’
문제는 공작이 공무를 수행하는 중이란 사실이다. 그의 일정에 끼어든 건 어디까지나 자신이다. 중간에 그만두고 싶다느니, 벌써부터 앓는 소리를 할 순 없었다.
지안은 결심을 마쳤다. 절대로 공작에게 업히는 일은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 * *
그러나 어떤 결심이란, 깨지라고 있는 것이다.
만달렌을 향해 걷기 시작한 지 딱 세 시간이 되었을 무렵. 지안은 공작의 등에 업히는 걸 택했다. 발이 너무 아프고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운동이라곤 일절 하지 않는 지안에게 쉼 없는 세 시간의 여정은 너무 가혹한 것이었다.
춥고, 힘들고, 발이 아팠다. 게다가 공작이 자꾸만 뒤를 돌아보면서 그만 업히는 게 좋겠다고 종용했다. 처음 한두 번은 그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었지만, 눈길을 걸은 지 두 시간이 넘어서자 도무지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만 업히라는 공작의 말은 거절하기 힘들 만큼 유혹적이었다. 다리가 저릿했고 발바닥은 너무 홧홧했다. 발 여기저기에 커다란 물집이 잡혀 있어도 전혀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