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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15/199)

15화

지안은 한입 크기의 스테이크를 연신 입으로 가져갔다. 그사이 악시온은 샐러드와 수프를 덜고 스테이크 한 접시를 더 썰어서 지안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음식을 나르던 시종들은 작게 경악했으나, 정작 그들을 경악케 한 공작과 지안은 각자의 일에 열중하느라 시종들이 어떤 표정인지 알지 못했다. 지안은 먹느라 바빴고, 공작은 지안이 조금이라도 눈길을 준 음식을 먹기 좋게 썰어서 지안에게 밀어주기 바빴다.

두 종류의 샐러드 한 접시, 호박 수프 한 접시, 정체를 모르는 야채 볶음과 샌드위치, 그리고 스테이크 두 접시가 지안이 해치운 음식의 목록이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케이크까지 야금야금 해치웠다.

아니, 정정한다. 해치우는 중이다.

지안은 마지막 케이크 조각을 포크로 찍으며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리 배가 고팠다지만 이렇게 많이 먹을 생각은 없었는데……. 너무 과식해버렸다. 온종일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은 데다, 침대 위에서 한가로이 입에 넣은 쿠키도 상당하지 않은가. 먹어 치운 쿠키의 개수를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하아…….”

이런 지안의 한숨은 악시온이 착석한 의자를 가시방석으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악시온은 안절부절못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회해야 한다. 공작이 서둘러 말했다.

“내일, 함께 성 밖으로 나가지 않겠나?”

“네?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불가능할 거라고 하던데요.”

실제로 성밖에는 허벅지 높이만큼 눈이 쌓여 있었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쌓여 가고 있는 중일 것이다.

성안에 쌓이는 눈은 공작성의 사람들이 제때 치워내고 있지만, 그렇게 해도 눈은 늘 발목 언저리까지 쌓여 있었다. 실로 지긋지긋한 겨울 날씨였다. 군인들이 왜 눈을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라고 하는지 절절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나와 함께라면 가능하다.”

공작의 말에 지안의 머리가 갸우뚱 기울었다. 가능하다니? 어떻게?

성 밖에 눈이 너무 높이 쌓여서 이동을 하려면 무슨 땅굴을 파듯 눈을 파내며 가야 한다. 지난 며칠간 공작성 밖으로 나서려는 헛수고를 수차례 반복 확인한 끝에 얻은 결론이었다.

“가능하다니 어떻게요?”

“검으로 눈을 밀어내면서 가면 금방이다.”

무슨 말이지 대체? 검을 삽처럼 이용해 눈을 파내기라도 하는 건가? 그런 비효율적인 짓이 가능하단 말이야?

잠시 상상하던 지안은 생각하길 그만뒀다. 어쨌든 공작이 하는 말이다. 동행이 전제로 깔려 있단 점이 좀 거슬리긴 하지만, 먼저 제안해준 게 어딘가. 게다가 그는 공작이기 이전에 에스퍼였다. 평범한 사람은 눈 쌓인 길을 파헤치며 이동할 수 없지만, 공작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나요?”

“몬스터가 각 마을에 입힌 피해를 조사할 예정이다. 조사를 위해 성 밖의 마을을 순회하는 것이니 전혀 무리 없다.”

공무 수행에 끼워주겠단 거구나. 그런데 원래 마을의 피해 조사 같은 걸 공작이 직접 하나? 북부의 주인이고 공작이라면 분명 꽤 높은 지위일 텐데?

아무래도 피해 조사는 급조된 핑계 같았다. 확인을 위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잠시 기다리자, 공작의 파장이 서서히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싫은가?”

싫다고 하면 안 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지안은 서둘러 답했다.

“잠시 딴생각을 했네요. 죄송해요. 그래서 내일 출발이라고요? 어느 마을로 가는 거죠?”

지안의 말에 악시온의 표정이 밝아졌다.

“만달렌이다.”

급격히 밝아진 목소리에 지안은 떨떠름히 웃었다. 얼굴에 감정이 다 드러나고 있단 걸 말해 줘야 하나? 요청한 적 없는 호의와 배려가 고맙긴 한데…… 퍽 난감했다.

사랑 고백 같은 걸 들은 건 아니지만, 눈빛만으로도 공작이 품은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리 눈치 없는 사람도 저런 얼굴, 저런 눈빛을 보면 직감하고 말 것이다.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걸.

사실, 예정된 일이긴 했다. 가이드와 사랑에 빠지는 에스퍼가 얼마나 많은가. 하도 이런 현상이 도드라지다 보니, 고등급 에스퍼들 몇몇은 첫 가이드에게 속절없이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매칭률이 낮은 가이드 여럿을 불러 동시 가이딩을 요청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적어도 그렇게 하면 첫 가이드에게 집착하지 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일종의 편법을 쓰는 것이다. 가이드에게 휘둘리는 에스퍼들을 생각하면 이런 대처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애를 썼는데도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에스퍼가 수두룩하다. 그리고 가이드들은, 에스퍼들이 쏟아붓는 애정과 관심을 이용해 편의를 추구한다. 어쩌면 지금 이 상황도 그에 부합하는 것 같았다.

공작을 이용하는 것에 거리낌을 느끼진 않았다. 공작성에 감금당한 걸 생각하면 피장파장이었으니까. 나름 책임감을 발휘해 전담 가이드가 되어 주겠노라고 하긴 했지만, 그 이상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 서로 받은 것도, 준 것도 없는 관계라야 집으로 돌아가기 쉬우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지구로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돌아가 봤자 각성자 협회에서 맹탕 가이드라는 놀림이나 들으며 살아야 하지 않나.

반면, 눈앞의 공작은 말도 안 되는 매칭률 수치를 보이는 에스퍼였다. 상성이 좋아도 이렇게나 좋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만일 지구로 돌아가면 두 번 다시는 공작과 같은 에스퍼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나쁜 사람도 아니고.’

공작성에 감금당하며 받은 충격과 그로 인한 반감이 워낙 커서 그렇지, 공작이 강제로 가이딩을 요구하거나 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공작이 자신에게 준 것이 하나 있긴 있었다. 내가 정말 가이드가 맞긴 맞구나 하는 자각. 공작은 바로 그 자각을 주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설산에서 멀쩡히 살아 내려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공작이 제때 나타나지 않았다면, 수십 개의 기둥이 세워진 그 동굴에서 게이트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에 떨며 느리게 굶어 죽어갔으리라. 그도 아니면 동굴에 몬스터가 들이닥쳐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지도 모른다. 지안은 늦게나마 이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고 나니 새삼, 눈앞의 공작이 달라 보였다.

걷다 마주치면 반드시 돌아보게 될 것 같은 얼굴에 결 좋은 은발, 각도에 따라 언뜻 색이 달라 보이는 신비한 보라색 눈동자. 덩치들만 있는 이곳 북부인들 중에서도 단연 압도적인 체격. 눈앞의 공작이라면 눈보라 치는 성 밖에서 맨손으로도 열흘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일 뿐이다.

그날, 공작과 조우함으로써 공작은 폭주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자신 역시 비참한 최후를 피할 수 있었다는 걸 인정하되, 여기서 더 나아가는 건 옳지 않다. 최대한 건조한 관계를 유지하며 이곳 세상에도 가이드가 있단 걸 공작에게 증명해 보이는 것. 이외엔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다.

익숙해졌다곤 하나 공작성은 자신의 집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낯선 세상에서 잘 살아갈 자신 따윈 없다. 지안은 정신을 단단히 붙잡았다.

“만달렌은 어떤 곳인가요?”

“순록을 키우는 곳이다.”

“순록이요?”

“그렇다. 이맘때 겨울이 되면 순록의 새끼를 노리는 눈표범이 자주 나타나곤 하지. 혹시 마주치게 되면 사냥한 후에 털가죽으로 새 모자를 만들어 주겠다.”

지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의 말도 안 되는 추위를 떠올리면 털모자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클 것이다.

“감사합니다.”

* * *

일어나자마자 창밖의 풍경부터 확인한 지안은 가볍게 좌절했다. 밤새 눈이 몰아친다 싶더니, 허벅지 높이까지 쌓여 있던 눈이 가슴 언저리까지 쌓였다. 게다가 지금도 계속해서 내리는 중이다!

이래서야 공작이 동행하건 말건 저 눈을 헤치고 나가기란 요원해졌다. 지안은 상심하느라 루시가 몇 번이나 문을 두드리다 방 안으로 들어왔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영애님.”

그 부름에 지안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일어나 계셨군요. 얼른 세안하시는 게 좋겠어요.”

어제와 다를 바 없이 조급함이 드러나는 루시의 얼굴에 지안은 설마 하며 물었다.

“혹시 오늘도 공작님이…….”

“네. 문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만달렌으로 향하신다 들었어요. 늦지 않게 출발하실 수 있도록 준비를 서두르겠습니다.”

“갈 수 있을까요? 이렇게 눈이 많이 내렸는데…….”

“공작님이 동행하신다면 가능합니다.”

“가능하다고요?”

“우선 세안부터 하시죠. 저는 적당한 외출복이 있는지 찾아보겠습니다.”

지안은 반신반의하며 세수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었다. 루시는 추위를 견딜 수 있어야 한다며 울로 만든 내복을 세 벌이나 겹 껴입게 했다. 그 위에 털조끼와 바지, 외투를 걸치자 정말 굴러다닐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찌나 껴입었는지 양말을 신기 힘들어 루시가 대신 신겨주었을 정도다. 심지어 양말도 두 겹이나 신었다.

지안은 털신에 발을 집어넣으며 질린 얼굴로 말했다.

“이렇게까지 입어야 해요?”

“북부의 추위를 만만히 보시면 안 됩니다.”

“그건 그렇지만……. 그런데 옷이 왜 죄다 하얀색이에요? 실수로 얼룩이 남거나 하면 어쩌죠?”

지안의 말에 루시가 가볍게 웃었다.

“북부에서는 흰색을 최고로 여깁니다. 쉽게 구할 수 없기도 하고, 맹수나 몬스터를 만나더라도 눈 위에 엎드려 있으면 모르고 지나치거든요. 공작님이 동행하시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몬스터와 마주치면 눈 위에 미동 없이 엎드려 계십시오.”

“그럴게요.”

마지막으로 지안에게 목도리를 둘러준 루시는 다시 한번 지안의 옷차림을 점검한 뒤 말했다.

“모자와 장갑은 식사를 마친 뒤에 챙겨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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