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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14/199)

14화

“저. 헌데, 말이 나와서 말입니다만, 그분이 그토록 중요한 분이시라면 공작성 내에 가만히 계시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최근 계속해서 공작성을 벗어나려 하시던데요. 물론 추위가 심해서 모두 수포로 돌아가긴 했습니다만…….”

마지막으로 말을 꺼낸 것은 헤롤드였다. 북부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이자 그간 가이드의 호위를 도맡았단 이유로 가신 회의에 참여하게 된 그는 지안의 정체를 이제 막 안 참이었다.

헤롤드의 지적에 하녀장 요나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아직 북부에 정을 붙이지 못하시는 것 같더군요. 하지만 이는 전대 공작부인께서도 같으셨습니다. 우려스럽긴 하나 시간이 해결해줄 겁니다.”

하녀장의 말에 집사 제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공작님께서 영애의 환심을 사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군요.”

헤롤드는 떨떠름해졌다. 지금은 공작성의 인력을 단순 관리하는 집사장이라지만, 집사장 제라드는 젊은 시절 오데르겐령의 행정 전반을 책임지던 문관이었다.

나이가 들어 머리가 굳었다며 아들에게 문관 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은 공작성의 집사가 되었으나, 공작가에 일평생을 종사해온 만큼 북부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다. 한데 그런 분의 입에서 환심이란 단어가 나오다니.

하지만 지안의 정체가 사실이라면, 그녀는 그만한 대접을 받아 마땅한 인물이었다. 공작님이 직접 호위를 맡기기에 중요한 사람인가보다 하긴 했지만, 지안의 정체는 헤롤드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존재만으로 폭주를 막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그런 사람을 가이드라 일컫는다는 것도, 가이드가 다른 세상에서 건너온 사람이라는 것도 모두 처음 듣는 이야기다.

거기에 더해 지안이 미래 공작가의 안주인이 될 거라니……. 헤롤드는 그제야 지안에게 쩔쩔매던 공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안의 정체를 미리 귀띔해주지 않은 아버지가 새삼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와 원망해봤자 무슨 소용인가? 아직 연륜이 쌓이지 않은 자신이 가신 회의에 참석하게 된 건 모두 아버지 덕택일 텐데. 헤롤드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처음 며칠간 지안을 퉁명스럽게 대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짧은 회의가 파하자 헤롤드는 곧바로 지안의 호위역으로 복귀했다. 새벽부터 열린 가신 회의에 하품이 연신 터져 나왔지만, 새삼 자신이 호위하는 인물의 중요성을 알고 나니 절로 발걸음이 서둘러졌다.

그런데 지안의 방 앞에 세워 둔 보초가 없었다. 놀랍게도, 그 자리를 대신 지키고 서 있는 건 다름 아닌 악시온이었다.

“공작님?”

“아. 헤롤드.”

“여기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물어볼 것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지안은…… 오늘도 성 밖으로 나가는가?”

“아무 말 없으셨습니다만, 아마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가 함께 가겠다.”

“네?”

“그간 지안의 호위를 하느라 제대로 수련하지 못했을 테지. 날 대신해서 기사단의 수련을 전담해라.”

“어…….”

“가라.”

헤롤드는 쫓겨나듯 발길을 돌렸다.

* * *

노크 소리에 반사적으로 잠이 깼다. 부스스 일어나자 지난 며칠간 익숙해진 하녀가 물과 수건이 담긴 쟁반을 들고서 방으로 들어왔다.

지안은 의아한 얼굴로 하녀 루시를 응시했다. 들어오란 말이 있기 전에는 절대로 미리 방 안에 들어오지 않던 사람인데, 대체 무슨 일일까.

“무슨 일이죠?”

“그게, 공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침 준비를 서두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공작이요?”

“네.”

루시의 말에 지안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가이딩 요구인가?”

일전에 확인한 공작의 상태를 감안하면 가이딩이 필요하긴 했다. 그래도 그렇지, 이른 아침부터 부르다니……. 아무래도 늦잠은 글렀다.

입을 가리고 하품한 지안은 느릿하게 욕실로 걸어가 세수를 마쳤다. 그런 지안의 뒤에서 루시가 발을 동동 굴렀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모습에 지안이 얼굴을 닦으며 물었다.

“공작님이 절 부르신 용건이 뭔데요?”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공작님이 지금 문밖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부른 게 아니라 찾아왔다고? 심지어 문밖이라니 정말 급한 용건이라도 있는 건가?

“가서 들어오라고 해요.”

“네? 아직 옷도 갈아입지 않으셨는데요.”

그 말에 지안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가운 차림이긴 했지만 가려야 할 곳은 다 가렸다. 접촉 가이딩을 또 해야 할지도 모르니 굳이 옷을 차려입진 않아도 될 것이다.

“상관없어요. 공작님이 제 옷차림을 두고 뭐라고 하시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어서요, 루시.”

지안의 재촉에 루시는 할 수 없단 얼굴로 공작을 불러왔다.

“좋은 아침이군.”

좋은 아침이라니. 지안은 대꾸 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밤새 눈이 내렸고 지금도 내리고 있는데 좋은 아침은 무슨 좋은 아침인가. 그와 같은 북부인들에게 이 정도 날씨는 그리 거칠지도 않다 이건가?

어쨌건, 아침부터 사람을 찾아온 용건이 궁금했다.

“가이딩 때문에 오신 건가요?”

“그런 게 아니다. 가이딩은…… 아직 참을 수 있다.”

악시온의 말에 지안은 그의 목덜미로 손을 뻗었다. 살펴보니 그간 가이딩해준 게 무색하게 엉망진창이었다. 몬스터 무리와 일전하며 능력을 과다 사용한 것이 틀림없다.

“가이딩, 필요하겠는데요.”

지안의 말에 악시온은 꿀꺽 침을 삼켰다. 참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목덜미에 지안의 손이 닿자 둑이 터지듯 가이딩 욕구가 터졌다. 당장 지안을 끌어안고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싶었다. 아니, 그것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손만 잡고 있어도 좋다.

하지만…… 그랬다간 지안의 일정을 망치고 말 것이다.

지난 며칠간 지안은 성 인근의 마을을 순회하며 자신과 같은 가이드를 찾으려 했다. 악시온은 이를 모르지 않았다. 근래 극심해진 추위로 외출이 번번이 좌절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 탓에 지안이 낙심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이 늘었다고 보고받았다. 악시온은 힘겹게 가이딩 유혹을 뿌리쳤다.

“괜찮다. 이보다 더 심각했을 때도 버틸 수 있었다.”

의외의 말에 지안은 가볍게 헛웃음 지으며 공작을 끌어와 침대에 앉혔다.

“제가 보기엔 당장 가이딩이 필요한 상태예요.”

“하지만…….”

“전 지금 막 일어났어요. 아직 아침도 먹지 않았고, 할 수 있다면 더 자고 싶네요. 옷을 갈아입기 전이니 가이딩을 하려면 지금이 좋겠어요. 대신, 전과 같은 가이딩을 해 드리진 않을 거예요. 그땐 정말 응급상황이라 그랬던 거니까요.”

막 세수를 마친 탓에 잠기운이 다 가셔 버리긴 했지만, 게으름 피우고 싶은 건 사실이다. 지안의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걸 알아차린 악시온은 얌전히 지안이 내민 손을 잡았다.

“아…….”

가이딩이 진행되며 금이 간 정신이 복구되고 폭주를 향해 나아가던 힘이 안정되기 시작하자 그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지안을 성 밖의 마을에 데려다 주겠노란 본래의 계획이 머릿속에서 말끔히 지워질 정도였다.

멍한 얼굴로 정신을 놓는 공작의 모습을 확인한 지안은 대충 침대에 드러누웠다. 루시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대기하고 있는 걸 보고는 자유로운 한쪽 손을 휘적휘적 흔들었다.

“식사는 방에서 할게요.”

“그,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네. 최대한 늦게 가져다주세요.”

* * *

악시온이 정신을 차린 건 막 해가 저물어 갈 즈음이었다. 대체 언제 잠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뜨거운 물에서 막 나온 것처럼 온몸이 노곤노곤했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가 힘들었다. 근육이 다 녹아버린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언제 이런 숙면을 취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이대로 더 자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깜빡이던 도중, 악시온은 지안과 눈을 마주치고 벌떡 일어났다.

“아. 일어났어요?”

엎드린 채로 쿠키를 주워 먹던 지안은 심드렁한 얼굴로 가이딩 강도를 낮췄다.

가이딩을 받자마자 정신을 반쯤 놓길래 이렇게 될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 시간이 걸렸다. 보통 이 정도는 아닐 텐데, 평생 단 한 번도 가이딩을 받아 본 적 없는 특수성 탓이 큰 것 같았다.

그사이 악시온은 영문을 몰라 하는 얼굴로 지안과 창밖을 번갈아 응시했다. 가이딩을 받던 도중 잠들어버린 것까진 기억난다. 하지만 벌써 저녁이라니?

어리둥절해하는 그에게 지안이 말했다.

“저 배고파요. 덕분에 아침도 제대로 못 먹고 하루종일 가이딩만 하고 있었거든요.”

그 말에 그제야 침대의 쿠키 접시와 테이블 위 다 식어버린 식사가 악시온의 눈에 들어왔다. 가이딩을 해주느라 지안이 식사를 거른 것 같았다. 상황을 인지하자 느슨해져 있던 정신이 확 깨어났다.

“지금이…… 몇 시지?”

“저도 잘 몰라요. 저녁이란 건 알겠네요. 곧 어두워질 것 같아요.”

악시온은 좌절했다. 기껏 시간을 냈는데…… 함께 성 밖의 마을로 나가보기는커녕 가이딩을 받다 잠들어버리다니! 지안과 친분을 쌓으려 고심 끝에 세운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순간이었다.

“……식당으로 가지.”

우선 지안에게 뭐라도 좀 먹여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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