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초대 가주는 평생 자신의 가이드를 기다리다 죽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백 년이 지났을 무렵, 두 번째 가이드가 나타났다.”
“이번에도 신전에서? 당신과 내가 처음 만났던 그 동굴 말인가요?”
“그렇다.”
“이것 참. 북부의 여신이 신전을 지어 준 공작에게 정말 보답이라도 한 것 같네요. 그래서, 어떻게 됐죠?”
“당시의 가주는, 가이드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와 접촉하고 있으면 고통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공작성에 가이드를 구금했다.”
“당신이 나를 가둔 것처럼 말이로군요.”
“……미안하다.”
“됐어요. 그래서 그 두 번째 가이드는, 어떻게 됐죠?”
“자살했다.”
“…….”
“가이드를 잃은 가주는 그대로 미쳐버렸지.”
지안은 할 말을 잃었다. 가이드가 자살하다니. 왜? 어째서? 혹시 가이딩 착취를 당하거나 원치 않는 접촉 가이딩을 강요받기라도 한 건가?
그랬다면 자살을 택한 것도 이해가 간다. 어찌 됐든 자세히 캐묻고 싶지 않은 이야기인 건 분명했다. 추악한 진실이라더니…… 공작이 가문에 얽힌 비밀을 실토하길 꺼린 이유가 있었군.
잠자코 기다리자 악시온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북부에 세 번째로 나타난 가이드는…… 내 어머니셨다. 내게 가이드에 대해서 설명해주셨지.”
그 말에 지안은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래. 이제야 이해가 간다. 앞뒤가 맞지 않던 비밀이 베일을 벗고 모습을 드러내듯 정황이 짜 맞춰진다.
“그래서 내가 가이드란 걸 단번에 알았던 거군요.”
“그렇다. 그리고 오데르겐은…… 수백 년간 가이드를 독점했다. 가이드의 존재를 철저히 비밀에 부쳤지. 그 탓에 어머니는 북부에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공작님의 아버지가 그분을 구금했나요?”
“구금하지 않았다. 북부를 벗어나진 못하셨지만, 공작부인으로서 북부 내의 영지 어디든 자유롭게 왕래하셨다. 아버지와 사이가 나쁘지도 않으셨지. 만일 두 분의 사이가 나빴다면 나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지금은…… 두 분 다 돌아가셨다.”
하나같이 무거운 이야기였다. 외부인인 지안이 듣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연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안은 가이드였고, 가이드이기 때문에 지난날 공작가와 가이드 간에 있었던 비밀스러운 일들을 알아야만 했다. 미리 캐물어 다행이었다.
“이야기 잘 들었어요. 그래서, 날 어떻게 할 셈이죠?”
“……어떻게 하다니?”
“공작님의 아버지가 그랬듯, 공작님도 나를 이 성에 묶어둘 계획인가요? 영영 어디로도 떠날 수 없도록?”
악시온은 대답을 주저했다.
당연히 그러길 바란다. 평생 눈에 닿는 곳에 그녀가 있다면, 그래 주기만 한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갑작스레 생겨난 맹목적인 마음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정신을 차렸을 땐 지층에 단단히 뿌리내린 나무처럼 지안에게 온 마음이 뻗어나간 뒤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내 마음을 달갑게 여기지 않겠지.
실제로 악시온을 바라보는 지안의 눈빛은 어떤 감정도 담고 있지 않았다. 살을 찢고 뼈를 부수는 몬스터의 발톱보다 타인을 보는 듯한 지안의 시선이 더 무섭고 힘들었다.
악시온은 침묵했다. 이외엔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대응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사이 지안은 마음을 정했다.
“정말로 여기에 가이드가 없는지 확인해봐야겠어요.”
“……확인이라니?”
“가이드 없는 에스퍼를 두고 떠날 순 없으니까. 당분간 잠시 공작성에 신세를 좀 질게요.”
믿을 수 없는 말에 악시온의 눈이 끔뻑거렸다. 진실을 알고서도 공작성에 남겠다는 건가? 정말로, 그래 주는 건가?
“대신, 저를 공작성에 가둬둘 생각은 하지 말아요. 북부 밖으로 나가게도 해주시고요. 구속과 감금의 역사를 제게도 되풀이하려는 생각은 아니시겠죠.”
악시온은 서둘러 대답했다.
“절대 그대를 구속하지 않겠다.”
“좋아요. 그럼 최소한 공작성에 머무는 동안은 공작님의 전담 가이드가 되어드리죠.”
“……정말인가?”
“이곳에도 가이드가 있단 걸 확인할 때까지만이에요. 제 상식으론 에스퍼가 있다면 가이드도 있는 게 당연해요. 만일 가이드가 나타난다면 그땐 돌아가겠어요. 제가 아니어도 공작님을 가이딩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어때요? 합의하시나요?”
“합의하겠다.”
“그럼 약속하세요. 가이드가 나타나면, 돌아가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약속한다.”
악시온은 즉답했다. 지안이 내건 조건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가 아는 한 위스로데 대륙엔 단 한 번도 가이드가 나타난 적이 없었다. 에스퍼가 있다면 당연히 가이드도 있을 거라는 주장은 그녀의 세상에서나 통용되는 상식이다.
그간 역사에 이름을 남긴 천재와 위인들 모두 가진 바 능력을 맘껏 발휘하지 못하고 단명했다. 가이드가 있었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죽지 않았을 사람들이다.
지금이야 가이드를 찾겠노라 말하지만, 그녀도 결국엔 알게 될 것이다. 이곳 위스로데 대륙에 존재하는 가이드는 오직 자신뿐이란 걸.
진실을 알고 나면 크게 실망할 테지만, 그건 훗날의 일이다. 그보다는 가이드 없는 능력자를 두고 갈 순 없다는 지안의 말을 믿고 싶었다. 악시온에겐 작은 희망과도 같은 말이었다.
어쩌면, 끝내 가이드를 발견하지 못한 그녀가 북부에 남아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흐릿한 기대감에 악시온의 심장이 부풀어 올랐다.
그런 악시온에게 지안이 물었다.
“그런데 제가 화가 난 건 어떻게 아신 거예요?”
“……감정이 느껴진다.”
지안의 고개가 갸웃했다. 자신이야 가이드라서 파장을 통해 에스퍼의 상태를 얼추 파악할 수 있지만, 공작은 물리강화계 에스퍼다. 정신계 에스퍼도 아닌데 감정이 느껴진다니 대체 무슨 말일까.
의아해하는 지안의 표정에 공작이 설명을 덧붙였다.
“가이딩과 함께 감정이 흘러들어오는 것 같다. 아니, 아까는 단순 접촉으로도 감정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악시온의 말에 지안은 뜨끔했다. 그래서 갑자기 태도를 바꾸고 사과한 건가? 설마, 폭주하건 말건 관여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던 걸 들킨 건 아니겠지?
“내 생각이 읽힌다거나. 뭐 그런 건가요?”
“그런 건 아니다.”
“다행이네요. 앞으론, 가이딩을 할 때가 아니라면 접촉은 최소화하는 게 좋겠어요.”
지안의 말에 악시온은 크게 상심했다.
* * *
공작성 바깥으로 나설 수 있는 자유를 얻었지만, 사실상 지안이 얻은 것은 한정된 자유였다.
북부는 지독한 겨울과 몬스터의 침공으로 항시 위협받는 곳이었다. 몬스터가 아니더라도 허리 높이까지 쌓인 눈 때문에 이동이 여의치 않았다. 눈이 내리지 않는 날에는 추위가 발목을 잡았다. 지안으로선 공작성의 성벽 너머에 사람이 사는 마을이 있다는 게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토록 척박한 환경의 지배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작성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밝은 얼굴이었다. 우중충한 날씨와 추위, 거친 눈보라도 오데르겐 성의 가신들을 꺾어놓진 못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대대적인 규모로 몰려왔던 몬스터의 침공이 끝났기 때문이었다. 공작성 인근 마을을 괴멸 위기에 빠뜨렸던 몬스터는 모두 악시온의 검에 썰려 나갔다.
여느 때와 같이 치열한 전투였고, 부상자들이 속출했으나 예년에 비하면 사상자가 적은 편이었다. 작은 출혈로 몬스터의 침략을 막아냈으니 실로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악시온이 홀로 수백 명분의 활약을 했기 때문이다. 가신들은 이를 모르지 않았다.
평소라면 몬스터의 침공을 저지했다는 결과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힘을 과다하게 사용한 악시온의 폭주를 걱정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갑작스레 공작님과 함께 나타난 여인은 그들이 그토록 기다려 온 가이드였다. 그 덕분에 공작은 폭주를 두려워하지 않고 힘을 아낌없이 사용하며 활약할 수 있었다.
지안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악시온은 시한부의 인생을 선고받은 처지였다. 그는 북부를 홀로 지켜낼 정도로 강했지만,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불안정함을 늘 지니고 있었다.
허나 가이드가 나타났으니 더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으리라. 악시온의 무력에 북부의 존망이 달려 있다는 걸 생각하면, 지안은 존재 그 자체로 북부를 수호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비약을 풀어 부상자들의 치료에 도움을 주었다.
이른 예상이긴 하지만 오데르겐가의 후계를 그녀에게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가신들 사이에서 싹텄다. 폭주의 차단과 후계 문제가 한 번에 해결되는 것이다.
공작님께선 이미 가이드에게 마음이 가 있으니. 가이드의 마음만 사로잡으면 되는 일이었다.
가신들은 입을 모아 안도했다.
“가이드가 나타나 정말 다행입니다.”
“동감입니다. 공작님이 그동안 결혼을 거부해오신 게 결과적으론 다행스런 일이 되었군요.”
“만일 혼인하셨다면 가이드를 부인으로 맞이하지도 못했을 테고, 상황이 더 복잡해졌을 테지요. 오데르겐가의 후계가 끊어질까 봐 그간 공작님을 재촉해왔었는데…… 일이 이렇게도 풀리는군요.”
“모두 신의 은총이지요. 에를랑겐 후작 영애와의 혼약이 파기되었을 땐 정말 우울했었는데……. 신께서 아직 북부를 버리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동의합니다. 다만, 에를랑겐 가와 있었던 일은 함구하는 게 좋겠습니다. 모두 예전에 끝난 일 아닙니까. 괜히 입에 올렸다가 영애께서 아시기라도 하면 곤란합니다. 이미 파기된 혼약이라지만 들어서 좋을 일 없을 것 같군요.”
“조심하겠습니다.”
“적당한 명칭이 없어 영애라 칭하고 있지만, 그분은 엄밀히 말해 신이 보내 준 사자요, 곧 북부의 안주인이 될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말조심을 하는 게 좋겠습니다.”
“음. 가장 먼저 사용인들의 입단속이 필요하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