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지안은 고심하며 다음 질문을 꺼냈다.
“혹시 내가 두 번째로 북부에 나타난 가이드인가요?”
악시온의 파장이 답했다. 아니라고. 바로 이 지점에서 지안은 경악을 삼켜야 했다. 내가 두 번째가 아니라면, 나처럼 차원을 넘어온 가이드가 더 있단 말이야?
하긴, 공작은 북부에 모습을 드러낸 가이드 모두 차원을 넘어 나타났고, 다 죽었다고 말했다.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가이드가 죽었다고 표현한 게 아니라 ‘모두’ 죽었다고 말했단 사실이다.
이는 차원을 넘어 북부에 나타난 가이드가 한 사람이 아님을 뜻한다.
“혹시 저처럼 차원을 넘어온 가이드가 더 있나요? 제가 그 사람을 만나는 게 가능할까요?”
“……불가능하다. 다만, 원한다면 묘비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겠다.”
“살아 있는 가이드가 한 사람도 없단 말인가요?”
“없다.”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애초에 질문을 들어만 달라고 한 거였으니까. 자, 다음 질문을 하죠. 나는 몇 번째로 북부에 나타난 가이드인 거죠? 두 번째가 아니면 세 번째인가요? 혹은 네 번째?”
질문을 던지기 무섭게 지안은 곧바로 답을 얻었다. 네 번째다. 자신은 북부에 네 번째로 나타난 가이드였다. 앞서 차원을 넘어 온 세 명의 가이드가 있었고, 눈앞의 공작은 그 덕에 가이드의 존재와 가이딩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분명하다.
이제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질 차례였다.
“가이드인 제가 본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 공작님은 알고 있나요?”
“…….”
가장 피하고 싶었던 질문이 귓전을 파고들자 악시온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할 수만 있다면 질끈 눈을 감고만 싶었다. 대답하길 요구받지 않았는데도 질문 하나하나가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태연하게 굴어야 한다. 눈 하나 깜짝 않고 질문을 흘려 넘겨야 했다. 그래야 그녀가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 지안의 싸늘한 무표정을 확인한 순간, 악시온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안이 말했다.
“이곳에도 공작님과 같은 에스퍼, 즉 능력자가 있다고 하셨죠. 그런데 제가 알기론 에스퍼는 가이드가 없이는 살 수 없거든요. 보통은 폭주로 죽어요. 그렇죠?”
서늘하기가 눈보라와 같은 물음이었다. 악시온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지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부드러운 터치였으나 가이딩은 조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악시온은 놀란 얼굴로 지안을 올려다보았다. 가이드와 접촉하는 것만으로 가이딩이 되는 게 아니었던가? 물음과 동시에 지안의 감정이 그에게로 흘러들었다. 가이딩은 조금도 스며들지 않았지만, 접촉을 통한 감정의 전이만은 선명했다.
악시온이 느낀 것은 분노였다. 격렬한 분노. 그리고 분노의 뒤를 따르는 것은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적의였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 알면서도 속아 주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알 수 없는 방법을 통해 진실을 알아차렸음이 분명하다.
고요한 지안의 눈빛이 악시온을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악시온은 자신의 목덜미를 짚은 지안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무릎 꿇었다. 발치에 엎드려 빌어서라도 분노에 물든 그녀의 마음을 돌려놓고 싶었다.
“내가…… 내가 잘못했다. 내가 거짓말했다.”
“……갑자기 왜 이러실까?”
“당신이 떠나면, 나는 다시 폭주하겠지. 그리고 죽을 것이다. 처음부터 거짓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단지, 무서웠다. 오데르겐이 묻은 추악한 진실을 그대가 모르길 바랐다.”
추악한 진실이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일까. 공작의 갑작스러운 태도 돌변 역시 사뭇 당황스럽다. 거짓말을 한 게 들통났다는 걸 알긴 한 것 같은데……. 어떻게 그걸 알았지?
알았다 하더라도 이토록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이라니. 대체 뭘까. 기존의 거짓말을 고수하며 뻔뻔하게 굴어도 상관없었을 텐데. 대체 왜? 접촉을 했는데도 가이딩이 되지 않은 게 충격적이었나?
아니면…… 혹시 알았나? 앞으로 그가 폭주하건 말건 가이딩을 해 주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실을?
……하다 하다 안 되면 각인을 한 후 그걸 깨뜨려버릴 생각도 했다. 가이드와의 각인이 파괴되면 에스퍼는 대개 그 충격으로 죽어버리니까. 그래선 안 되지만, 잠깐 그런 생각이 든 건 사실이다.
솔직히 어느 정도는 진심으로 그러고 싶었다. 가이드 윤리고 뭐고, 열불이 터지다 못해 뒷목을 붙잡고 쓰러져야 할 것처럼 뒤통수가 얼얼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이런 사과라니. 그것도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다니. 돌연 마음을 바꾼 이유가 뭘까.
의문과 함께 문득, 연구소장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와 에스퍼 사이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커넥션이 생긴다고 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단번에 가이드의 위치를 특정해내는 에스퍼도 있고, 가이드가 상처나 부상을 입으면 그것을 자신에게로 전이시킬 수 있는 에스퍼도 있다고 했다.
대부분 가이드를 지키거나 보호하기 위해 생겨나는 특성이었다. 혹시 이 남자에게도 그런 특성이 개화한 걸까?
……모르겠다. 우선은 지구로 돌아가는 방법이 먼저다.
“저는 어떻게 하면 돌아갈 수 있죠?”
“제발…… 부탁이다. 가지 마라.”
“여태 나를 공작성에 가둬둔 거론 부족했나요?”
“뭐든 하겠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게 뭐든 그대의 손에 쥐여주겠다. 보석을 원하나? 아니면 드레스를? 원한다면 그대를 위한 별장을 짓겠다. 그러니, 제발…….”
“내가 원하는 건 돌아가는 방법이에요.”
단호한 지안의 응수에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구차하단 걸 알지만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악시온이 말했다.
“……당신이 떠나면, 나는 죽는다.”
처연히 떨리는 음성과 눈물에 지안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한때 공작에게 품었던 동정심이 되살아났기 때문이었다. 선명해지는 망설임이 달갑지 않았다. 그리고 악시온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아.”
조그만 절규에 가까운 그 말이 지안의 두 발을 묶어놓았다. 의식적으로 차단하고 있던 가이딩이 스르르 풀려나갔다.
그간 가이드 교육을 받으며 수십 번도 더 들었던 말이 왜 하필 지금 생각나는 걸까.
‘에스퍼는 가이드가 없으면 죽습니다. 대부분의 가이드는 이 사실을 빌미로 에스퍼를 휘두르는 특권을 쥐게 되지요. 특권을 쥐고 휘두르는 것까진 좋습니다. 다들 알다시피 가이드 비위 안 맞춰주는 에스퍼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에스퍼의 생명을 쥐고 휘두르진 마십시오. 최소한 이것만은 지키세요.’
“……후.”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지안은 말없이 악시온을 내려다보았다. 두 다리를 꽉 끌어안고 있는 공작 때문에 제대로 서 있기가 힘들었다.
“우선 이것부터 좀 놓죠.”
지안의 말에 악시온은 순순히 두 팔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떨리는 몸만은 어쩌질 못했다. 공작은 처분을 기다리듯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늘진 그의 얼굴 위로 굵은 눈물 자국이 자꾸 만들어졌다.
공포에 질렸거나, 공황상태에 빠졌거나…… 혹은 둘 다인 것처럼 보였다.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위압적이던 남자가 저토록 초라해 보이다니. 아무래도 지금 당장 돌아가는 방법을 캐묻는 건 무리인 듯싶었다.
공작의 꼴을 보니 알아내려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지만…… 내키지 않는다. 이미 심리적으로 내몰릴 대로 내몰린 사람을 벼랑 끝으로 밀어버릴 순 없는 일 아닌가.
어쩔 수 없지. 나중에 다시 캐물을 기회가 있을 거다. 기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 순간이 아니라면 공작이 실토하지 않을 법한 걸 묻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마침 궁금한 게 하나 생기긴 했다. 오데르겐이 묻은 추악한 진실이 뭘까. 무슨 비밀이기에 그렇게 열심히 숨기려 한 걸까? 오데르겐은 이곳 공작성의 이름이다. 북부 전체를 아우르는 지명이기도 했다. 그 부분을 새삼 떠올리며 지안이 말했다.
“오데르겐이 묻은 진실을 말해요.”
“그건…….”
“말해요.”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망설이는 악시온을 지안은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었다. 지안에겐 잠깐의 기다림이었지만 악시온에겐 지옥을 순례하는 것만 같은 긴 시간이었다.
몇 번이나 입술을 열었다 붙이길 반복한 악시온은 얼마 남지 않은 용기와 만용을 모두 긁어모아 조건을 걸었다.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말하겠다.”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조건이었다. 지안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알겠다고 대답하지 않은 건,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기 때문이었다.
“일단은요.”
그야말로 새하얀 거짓말이었으나. 악시온은 지안이 건성으로 한 고갯짓을 믿었다. 믿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 북부에 가이드가 나타난 건…… 오데르겐 가의 초대 가주가 북부를 지배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북부는 제국에 귀속되지 않은 작은 공국이었다. 초대 가주는 공국의 왕이자 능력자였다. 뛰어난 능력으로 북부의 몬스터를 섬멸해 왕으로 추대되었지만, 폭주로 죽어가는 처지였지.”
이어지는 이야기에 지안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초대 가주는 폭주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전을 지었다. 당시는, 막 신앙이 태동하던 시대였다. 아마 그는…… 신전을 지어 북부의 여신에게 바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여긴 것 같다.”
지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신이 팽배하던 시대라 이거군. 척박한 환경에 몬스터까지 있으니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신을 믿는 것도 당연하다.
“믿기 힘든 일이지만, 그 선택은 옳았다. 신전의 완공과 함께 가이드가 나타났으니까. 구전에 따르면 신전의 한가운데서 갑자기 나타났다고 한다.”
“게이트를 통해서 말이군요. 그리고요?”
“처음엔 북부의 여신이 현신한 줄 알았다고 하더군. 그녀는 초대 가주의 폭주를 가라앉혀 주었고, 북부에 삼 년간 머물다 사라졌다. 아마…… 본래 세상으로 돌아간 것이었겠지.”
“흠. 이게 오데르겐이 숨겼던 진실. 뭐, 그런 건가요?”
악시온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중요한 이야기는 지금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