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일체의 불편함이 없는 호위와 하녀가 딸린 생활이라지만 열하루에 달하는 하루하루는 무척 길었다. 낯선 공작성이 조금씩 익숙해지고, 제국의 이름과 대륙의 이름이 뭔지 알아가기에 부족함 없는 시간이었다.
마침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있었던 지안은 악시온이 성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빠르게 포착할 수 있었다. 공작의 귀환으로 성이 어수선해지지 않아도, 시종이 소식을 알려다 주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멀리서부터 에스퍼 특유의 파장이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지안이 벌컥 문을 열고 나오자 보초를 서던 헤롤드가 영문을 몰라하며 지안의 뒤로 따라붙었다.
“어어? 갑자기 어딜 가십니까.”
“공작이 돌아왔어요.”
공작님이 돌아왔다니? 성 밖에서 파발마도 전서구도 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안은 확신하듯 당당했다. 헤롤드는 난감해하며 지안을 가로막았다.
“공작님이 벌써 귀환하셨을 리 없습니다. 적어도 일주일은 더 있어야 합니다. 오늘 밤 귀환하실 거란 소식도 없었단 말입니다.”
만에 하나 부득이한 이유가 있다 해도 지금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한밤중이다. 몬스터 무리의 남하로 지쳐 있을 공작님이 무리한 귀환을 결정할 리 없었다.
북부에서 잔뼈가 굵은 데다 북부 부기사단장인 헤롤드의 설명엔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피부로 에스퍼의 파장을 느끼는 지안에게 그 설명은 아무 소용 없었다.
“오고 있다니까요. 내기해도 좋아요.”
“하아. 이렇게 눈보라 치는 밤엔 아무도 귀환하지 않습니다.”
“됐으니 안내해요. 공작성 정문 앞으로. 내가 이 저택 밖으로만 나가지 않으면 아무 상관 없는 거잖아요.”
헤롤드는 한숨과 함께 지안의 뒤를 따랐다. 어째 오늘 하루 잘 넘어가는가 했는데 아닌 밤중에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그러나 지안의 말대로, 공작은 그날 밤 돌아왔다. 지안이 말을 꺼낸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헤롤드가 말없이 놀라는 동안 지안은 피 묻은 갑옷 차림의 악시온을 가로막고 섰다. 열하루 전 가이딩을 해 준 것이 무색할 정도로 위태로운 파장이 코앞에서 피부를 따끔따끔 찔렀다.
당장 응급 가이딩부터 하자고 말해야 할 것 같았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용건이 있었다. 공작이 성을 비운 동안 확신하고 부정하길 반복했던 진실. 그걸 확인해야만 했다.
“이제야 왔군. 계속 당신을 기다렸어요.”
“……나를 말인가?”
“물어볼 게 있어요.”
“듣겠다.”
“나는, 차원이동을 한 건가요?”
말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차원이동이라니. 한때 전 세계 사람들이 게이트 사태를 부정했던 것처럼, 지안도 자신의 가설이 부정되길 빌었다. 착각이라고, 오해라고. 헛다리를 짚은 거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악시온의 대답은 지안의 기대를 훌륭하게 배신했다.
“……그렇다.”
악시온의 말에 지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 말을 들으니 더는 태연을 가장할 수 없었다. 지안의 눈동자 위로 절박함이 떠올랐다.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있다. 있지만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차마 거짓말을 할 수 없어 악시온은 침묵을 택했다.
하지만, 악시온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자신의 파장이 한층 불안정해진 것까진 그도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에게서 파장이 흘러나오는 이상, 지안은 악시온 한정으로 거짓말 탐지기를 가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방법이 있군요. 그렇죠?”
“…….”
“대답해요. 무슨 방법이죠?”
지안의 추궁에 악시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돌아가고 싶나?”
“당연한 것 아닌가요? 나는 이곳 사람이 아니에요.”
기껏 찾은 매칭률 98%의 에스퍼가 아쉬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세상의 사람 아닌가.
여긴 와이파이도, 가이드를 보호하는 협회도 없다. 문화도 한참 낙후되어 보이고, 신분제라는 기막힌 사상이 공기처럼 깔려 있다. 눈앞의 에스퍼가 탐나긴 하지만 그게 이곳 세상에 남을 이유가 되진 못했다.
확실한 건, 남아야 할 이유보다는 돌아가야 할 이유가 더 많다는 것이다.
한층 더 어둑해진 눈빛으로 악시온이 말했다.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나? 부족함 없이 대우하겠다. 나는…… 그대가 필요하다.”
“다른 가이드를 찾아요.”
“싫다.”
“뭐라고요?”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다.”
못 박듯 단정하는 악시온의 말에 더럭 겁이 났다. 무해한 척 굴고 있긴 하지만 그는 에스퍼였다. 공작성의 주인이기도 했다. 만일 그가 힘으로 강제한다면 일반인에 가까운 지안으로선 대항할 수 없었다.
에스퍼가 가이드를 폭행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지만, 지안보다 머리통 하나가 더 큰 악시온인지라 말만으로도 충분히 협박처럼 들렸다.
서늘한 위기감이 엄습해오자 지안은 애써 정신을 환기하려 노력했다. 돌려보내지 않겠다니. 그럼 난 계속 이 성에 갇혀 지내야 한단 말인가?
“왜죠? 다른 가이드를 찾으면 되잖아요!”
“그럴 수 없다. 내가 알기로…… 가이드는 당신뿐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에스퍼가 있다면 가이드도 당연히…….”
말하다 말고 지안은 멈칫 굳어버렸다. 거짓 한점 없는 악시온의 눈빛 탓이었다.
질 나쁜 장난이길.
거짓말이길 바랐으나, 아무리 찾으려 해도 거짓의 흔적이 없다. 피하지 않고 시선을 마주쳐오는 공작의 모습에 지안은 설마 설마 하며 물었다.
“설마. 정말로…… 이곳엔 가이드가 없는 건가요?”
“그렇다.”
세상에! 그래서 내게 집착하는 거구나!
아니. 잠깐만, 이건 이렇게 납득할 문제가 아니다. 가이드가 없다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에스퍼가 존재하는 세상에 가이드가 없는 게 말이 되는가?
에스퍼가 여러 이능으로 몬스터를 사냥하고 게이트를 처리할 만큼 강한 건 사실이지만, 가이드 없이는 그 강력함도 무용지물일 뿐이다. 힘이 있으면 뭘 하나. 얼마 살지도 못하고 죽는데.
절대 그럴 리 없다. 지안은 불안을 삼키며 재차 물었다.
“……혹시, 내가 당신의 첫 가이드인가요?”
악시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지안은 할 말을 잃었다.
이제야 그와의 첫 만남이 이해된다. 대체 어디 소속이길래 가이딩이 하나도 안 되어 있나 기함했었지. 심지어 그는 폭주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가이딩을 받았으니 고집부리는 게 당연하다. 에스퍼에게 첫 가이드란 몹시 특별하다지 않는가.
첫 가이딩을 해 준 가이드와 결혼한 에스퍼의 통계가 이것을 증명한다. 이는 각성자가 아닌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보편적인 이야기다. 각성 이후 첫 가이드와 사랑에 빠진 에스퍼의 이야기를 다룬 로맨스 영화가 매년 상영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에스퍼들이 입을 모아 주장하는 걸 지안도 들은 적 있었다.
에스퍼에게 첫 가이드란 첫사랑과 같다.
그래서 첫 가이드와 이뤄지지 못한 에스퍼들은 한동안 크게 방황한다. 에스퍼로서의 능력이 저하되는 건 기본이고, 감정의 폭이 스스로 제어하지 못할 정도로 커져서 정신과를 다니는 에스퍼들도 적잖이 있다. 대부분은 다시 매칭률이 맞는 가이드를 배정받고 안정을 찾게 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들었다.
이 때문에 각성자 협회에선 에스퍼들에게 첫 가이딩에 너무 감정적으로 얽매이지 말라는 권유와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가이드에게 반한 것이 아니라 가이딩에 사로잡힌 것뿐이라고, 이성적으로 그 사실을 주지하라고 말이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게 교육으로 맺고 끊어지는 것이던가. 협회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에스퍼들은 늘 첫 가이드에게 빠져버리곤 했다. 워낙 고질적인 문제라 협회도 어느 정도는 손을 떼 버렸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하지만 사랑과 가이딩을 분리해서 생각하라는 협회의 가이드라인에는 변함이 없다. 그것이 정론이다.
게다가 자신이 첫 가이드란 점을 어렵사리 감안하더라도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 몇 있다.
“가이드가 없다고 말했으면서, 내가 가이드인 건 어떻게 알았죠?”
그래. 바로 이게 마음에 걸렸다. 심지어 그는 가이딩이 뭔지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지안은 가늘게 뜬 눈으로 악시온을 노려보았다.
“설명해요.”
“나중에…… 나중에 다 설명하겠다.”
“아니, 지금 해요. 난 이미 열흘 넘게 기다렸어요. 영문도 모른 채 멍청하게 이 성에 갇혀 있었다고요. 인내심 같은 건 진작에 다 썼으니까. 지금 설명해요.”
악시온은 머뭇거렸다. 가이드의 존재는 오데르겐 공작가의 직계에만 대대로 내려오는 비밀이었다. 세상에 폭로되면 어떤 파문을 일으킬지 알 수 없어 수백 년간 어둠 속에 진실을 묻어두었다.
지안이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있었지만, 그는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북부에 나타난 가이드가 모두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는 걸 그녀가 알면……. 어떻게든 성에서 탈출하려고 할 게 분명하다. 추악한 진실에 끔찍해하며 도망칠 것이다.
진실을 안 즉시 뒤돌아서버릴 지안의 뒷모습을 상상하니 더욱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굳게 입을 닫아건 악시온과 지안의 대치를 깨뜨린 건 헤롤드였다.
“저어…… 두 분 말씀하시는데 끼어들어 죄송합니다만, 우선 좀 씻고 환복부터 한 뒤에 대화를 재개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밤도 늦었습니다. 덧붙이는 해롤드의 말에 지안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몰아붙여 대답을 들어낼 생각이었지만……. 피를 뒤집어쓴 악시온의 초췌한 몰골이 지안의 고집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새삼 인식하고 나니 코끝에 감도는 피 냄새가 지독했다.
더구나 그는 몬스터를 처리하고 막 돌아온 참이 아닌가. 어쩌면 부상을 입은 상태인지도 모른다. 혹시 내가 다친 사람을 계속 붙잡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옅은 죄책감이 지안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좋아요. 이 이야기는 내일 이어서 하죠.”
한풀 수그러든 지안의 태도에 악시온은 눈에 띄게 안도했다. 적절히 참견해준 헤롤드에게 상이라도 내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다음 날, 지안은 악시온의 그림자도 발견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