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녀장이 창고의 열쇠를 내주다니, 대체 이 여자의 정체는 뭘까. 헤롤드는 놀란 얼굴로 열심히 지안의 신분을 추리해나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안은 냉큼 자신의 옷과 가방을 챙겼다. 창고 구석에 놓여져 있길래 먼지투성이일까 봐 걱정했는데, 옷은 천으로 잘 싸매져 있고 가방도 천으로 잘 덮어 놨다. 예상외로 보관을 꼼꼼히 한 모양이었다.
지안은 보자기를 풀어헤쳐 가방 속에서 응급 키트를 꺼냈다. 뭔가 더 챙길 만한 것이 없는지 확인해보았지만 남은 건 손수건이나 휴지 등 자잘한 물건뿐이다. 헤롤드를 돌아본 지안이 말했다.
“이제 가요.”
부리나케 돌아선 지안은 응급 키트의 약품을 차례차례 확인했다. 소량이긴 하지만 압박 붕대가 있고, 본래 목적했던 가루 지혈제가 한 통. 그리고 에피네프린 같은 전문 의약품이 있다. 소독과 진통 두 가지 역할을 하는 의료용 소독 젤도 대용량으로 하나 있었다.
소독 젤을 바르고 지혈제를 뿌린 뒤 의료용 스테이플러로 봉합, 이후 붕대로 감으면 될 것 같았다. 각성자 협회에서 응급 상황 대응 기초 수업을 들어 다행이었다.
약품 점검을 마치고 부상자들이 산적해 있는 장소에 당도한 지안은 서둘러 두 팔을 걷어붙이고 부상자들을 케어하기 시작했다. 시종들은 그런 지안을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얼굴로 흘끔거렸지만, 당장 고양이 손도 부족한 판국이다. 눈치껏 도우려는 지안을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교적 간단한 부상자부터 치료하기 시작한 지안은 점점 더 부상이 심한 사람 위주로 넘어갔다.
스스로 원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전문 의료인이 아닌 만큼, 지안도 가능하면 부상의 정도가 심하지 않은 사람을 맡고 싶었다.
하지만 지안이 가지고 있는 지혈제가 이곳 사람들이 사용하는 약초 가루보다 더 효능이 좋았다. 의료종사자가 아닌 지안의 눈에도 지혈되는 속도가 눈에 띄게 다른데. 부상과 치료에 도가 튼 북부인들 눈에 그 확연한 차이가 포착되지 않을 리 없었다. 그 탓에 심한 부상을 입은 사람은 자연스레 지안의 앞으로 배치되었다.
전문 의료인도 아니면서 괜히 나섰다는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들어 왔지만, 시작해버린 이상 별수 없다. 지안은 팔을 걷어붙이고 사람들을 하나씩 처치해 나가기 시작했다.
헤롤드는 놀란 얼굴로 벌어진 상처를 봉합하는 지안을 응시했다. 의료용 스테이플러를 모르는 그의 눈에는 지안이 요상한 도구로 찢어진 살을 봉합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간 봉합은커녕 붕대로 둘둘 말아놓고 자연 치유되길 기다린 기존의 치료법과는 차원이 달랐다.
의료용 스테이플러뿐인가. 소독과 진통제의 역할을 다 하는 소독 젤 역시 지혈제 못지않은 성능을 자랑했다. 웬만한 상처는 손톱만 한 크기의 소량으로도 충분히 커버가 가능했고, 진통 효과도 몹시 뛰어났다. 게이트 사태 이후로 눈부신 제약 및 의약품 발전이 이루어진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구에서나 당연한 일이고, 위스로데 대륙에선 달랐다. 단순 의약품임에도 그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지혈의 효과와 소독 및 진통의 효능이 남다른 것 역시 당연한 결과다.
지안이 치료한 사람들의 상태가 눈에 띄게 안정되어 가자, 내심 불안한 얼굴로 지안을 살피던 하녀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간 날이 선 상태로 주변의 모든 걸 경계하던 지안을 그녀도 모르지 않았다. 지안이 사흘간 식사를 거부했을 땐 가이드의 존재를 아는 공작가의 가신과 집사 모두가 모여 작게나마 논의가 이루어졌을 정도다.
하다 하다 억지로 음식을 먹이자는 의견도 나왔다. 가이드가 격분할까 봐 차마 시행하지 못했지만, 지안은 그만큼 중요한 인물이었다.
사실, 성안이 어수선하고 혼란한 틈을 타 지안이 도망친대도 이상하지 않았다. 수긍할 만한 이유도 없이 다짜고짜 끌려와 감금당했으니 사람이라면 어찌 반발하지 않겠는가.
지안이 두 손 놓고 부상자들을 구경만 하고 있는대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지안의 행동을 보건대, 타인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분명했다. 어쩌면 자신이 모셨던 전대 공작 부인처럼 번뜩이는 지혜와 자애로 북부를 다스려줄지도 모른다.
하녀장 요나스는 내심 그러길 바랐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가이드인 그녀가 북부에 뿌리를 내리길 간절히 바라는 것은 악시온뿐만이 아니었다.
그 때였다. 시종들이 헐레벌떡 기사 하나를 실어 날랐다. 그 광경을 본 요나스는 두 눈을 부릅떴다. 부상을 입고 실려 온 건 그녀의 아들이었다. 결혼 후 아들 셋과 딸 둘을 낳았지만 모두 북부의 척박함에 목숨을 잃었다. 그런 하녀장에게 모건은 하나밖에 남지 않은 막내아들이었다.
“모건!”
하녀장 요나스는 날듯이 뛰었다. 그러나 들것에 실려 온 모건의 얼굴은 이미 창백했다. 부상이 컸고 출혈 역시 극심했다. 그의 목숨은 이미 경각에 달한 상태였다. 명백히, 모건은 죽어가고 있었다.
요나스는 공작성의 하녀장을 맡을 정도로 드세고 이성적인 북부 토박이 여인이었다. 그러나 하나뿐인 아들을 잃을 위기 앞에선 그녀도 그냥 어미일 뿐이었다.
“아, 아아! 모건!”
사람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울부짖음이 울려 퍼졌다. 막 부상자의 붕대 봉합을 끝마친 지안은 저도 모르게 하녀장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들것에 실려 온 청년을 대하는 하녀장의 태도를 보건대…… 가족인듯싶었다.
들것에 실려 온 사내가 떨리는 손을 들었다.
“……어머니.”
그게 마지막이었다. 툭. 흰 눈 위로 손이 떨어졌다. 버티고 버티다가 마지막으로 가족의 얼굴을 확인하고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천막이 펄럭이는 소리와 하녀장이 오열하는 소리 외엔 무엇도 들려오지 않았다.
모두가 숙연해진 가운데 지안은 홀로 움직였다. 손에는 에피네프린을 든 채였다. 에피네프린은 심장이 멈췄을 시 사용하는 응급 의약품으로, 게이트 사태 이후 연구 개발을 거쳐 주사제의 형태로 진통제처럼 상비할 수 있게 되었다.
모건의 가슴에 엎드려 우는 하녀장을 밀어낸 지안은 곧바로 모건의 목에다 에피네프린을 꽂았다. 심장이 멈춘 지 한참 지났다면 아무 소용 없겠지만, 이 남자는 젊고 어리다. 에피네프린을 주사하고 흉부 압박을 하면 살아날지도 모른다.
딱 0.5mg씩 주사하게 되어 있어서 용량 조절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약물이 다 들어간 걸 확인한 지안은 숫자를 세며 흉부를 규칙적으로 압박했다.
하나. 둘. 셋.
중간에 갈비뼈가 골절된 듯한 소리가 났지만 멈추지 않았다. 심장이 멈추는 것보단 갈비뼈가 부러지는 게 낫다.
넷. 다섯. 여섯.
긴장으로 어깨가 벌벌 떨렸지만, 그럴수록 지안은 압박 강도를 더욱 높였다.
그리고 마침내, 모건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후…….”
심전도를 확인하는 모니터는 없지만, 가슴에 귀를 대보기만 해도 심장이 살아났는지 아닌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쿵쿵거리며, 규칙적인 고동이 들려왔다.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으니 이젠 문제없다. 부족해진 혈액은 혈액팩의 기능을 하는 주사제로 대신하고 어깨에 난 상처를 처치, 봉합하면 끝이다.
모건의 어깨에 소독제와 지혈제를 아낌없이 사용한 지안은 스테이플러로 벌어진 살을 봉합했다. 수혈이 불가능할 때 주사하는 주사제도 잊지 않고 놓았다. 기절한 와중에도 고통이 느껴지는지 모건은 연신 신음을 흘려댔다.
지안이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할 수 있는 건 어린 시절 게이트 사태를 겪은 덕분이었다. 어릴 적 비극이 성장의 양분이 되었단 사실이 아이러니하지만, 그 경험이 이렇게나마 쓸모가 있어 다행이었다.
봉합을 완료한 지안은 문득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둘러보니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들것에 실린 부상자들 역시 놀란 눈으로 고개를 빼 들고 있었다. 헤롤드가 잠긴 목소리로 외쳤다.
“모건을…… 소생시켰어!”
소생이 아니다. 아니지만 지금은 일일이 원리를 설명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지안이 외쳤다.
“다음 부상자!”
* * *
하녀장의 아들을 살려낸 이후 지안의 위상은 말할 것 없이 높아졌다. 감시역인 헤롤드의 태도가 가시적으로 변한 것도 그 증거였다. 좀 더 정중해졌달까, 조심스러워졌달까……. 아무튼 지안에겐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마냥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응급 키트를 탈탈 털어 썼음에도 성 밖으론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으니까. 소독 젤과 지혈제가 다 떨어진 뒤엔 별 도움도 되지 못했다.
그래도 헤롤드의 태도가 묘하게 정중해졌고, 하인들도 간간이 호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가장 직접적인 도움을 받은 하녀장은 말할 것도 없다.
호의를 샀으니 이용할 차례였다. 지안은 끈질기게 헤롤드에게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하다못해 성벽이나 망루에 올라가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베풀어둔 것이 있으니 잘하면 통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헤롤드는 완강했다. 아무리 구슬려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
“공작님의 지시가 있어야 합니다.”
벌써 다섯 번째 똑같은 소리만 들었다. 그를 설득하는데 열을 올린 시간이 무색할 정도였다. 참을성이 바닥난 지안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대체 그놈의 공작은 언제쯤 돌아오는 거죠?”
“……전사자들의 장례식이 끝나고 나면 돌아오실 겁니다.”
이어진 말은 지안을 입 다물게 하기에 충분했다.
성의 시종과 하녀들이 애써 간호하고 있으나 성안의 부상자들 역시 실시간으로 죽어 나가고 있다. 엉엉 울면서 양동이를 나르는 하녀, 퉁퉁 부은 얼굴로 빨랫감을 나르는 시종들을 하루에도 서너 번씩 목격할 정도다.
몬스터 침공이 저지되었다는 소식이 성으로 날아들었지만, 공작성 내의 슬픔과 비통함은 피부로 느껴지다 못해 눈으로 목격될 지경이었다. 헤롤드가 자신하며 말하길, 북부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공작성이 이 정도다. 성벽 너머가 어떤 모습일지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 한 편의 지옥도가 펼쳐져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 모든 일들도 결국은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북부의 비극은 이곳 사람들의 몫이지 지안의 몫이 아니었다. 참사라면 지안도 익숙했다. 지구에도 게이트와 괴수가 있으니까. 그리고 이런 일엔 거리를 둬야만 마음을 다치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그날 밤. 잠자코 기다린 것을 보상하듯 북부의 공작이 돌아왔다. 봉화가 올라온 이후로 자그마치 열하루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