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99)

8화

억지로나마 대답을 이끌어낸 데 만족한 지안은 그제야 악시온의 가슴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상반신을 가리며 벗어 던진 옷을 대강 껴입은 지안은 그제야 악시온이 가져온 음식을 눈에 담았다.

긴장이 한결 가신 데다 상대가 말이 통하는 사람이란 걸 알아낸 덕분일까, 때늦은 허기가 밀려오고 있었다. 응급 키트의 알약 탓에 일주일간은 아무것도 안 먹어도 괜찮긴 하지만, 그건 말 응급 상황일 때나 그런 거고. 먹을 게 있는데도 안 먹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저거 다시 데워야겠는데, 부엌이 어딘지 알려줄래요?”

지안의 말에 악시온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데워오겠다.”

악시온은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빠르게 사라졌다. 에스퍼 아니랄까 봐 움직임이 놀라울 만큼 빨랐다. 짐승 같은 몸놀림에 놀라워하느라 잠시 말문을 잃었던 지안은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옷은 입고 나가야 하는 것 아닌가?”

뭐, 상의 탈의 정도로 문제가 생기진 않겠지.

* * *

공작성을 돌아다니며 지안은 조금씩 현실을 깨달아갔다. 현대 문물이라곤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 성의 내부와 시종들의 생활상이 지안을 눈 뜨게 한 것이다.

어디를 봐도 전기나 수도시설은 존재하지 않았고, 사람들의 복식은 영화 아니면 드라마에서나 본 것들이다. 제삼세계에서도 이 정도로 문화와 기술발전이 낙후되어 있진 않다.

가스레인지나 인덕션은커녕, 장작에 불을 붙여 음식을 조리하는 걸 보고 얼마나 기함했던가. 연병장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사내들이 훈련하는 것도 그렇고……. 지안이 보기에 이곳 공작령은 말도 안 되는 것투성이였다. 하녀와 기사, 시종과 집사 같은 직책이 있는 것만 봐도 여기가 얼마나 이상한지를 알 수 있다.

결정적으로 지안을 눈 뜨게 한 것은 몬스터들의 침공이었다.

먼 곳에서 봉화가 올라오고 북소리가 울린 것과 동시에 성안의 남자들이 모두 뛰쳐나갔다. 선두에는 악시온 오데르겐, 그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눈싸라기 휘날리는 소리와 함께 아득한 비명이 들려왔다.

“으아악……!”

창칼의 아스라한 울림은 지안을 몸서리치게 했고, 몬스터의 것이 분명한 포효 소리가 지축을 끔찍하게 뒤흔들었다. 어디선가 게이트가 활성화되어 몬스터를 내뱉는 게 분명했다. 지안은 초조한 얼굴로 손톱을 깨물었다.

성안의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걸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당장 자신을 감시하는 기사들조차 긴장과 불안을 숨기지 못했다. 성 주변의 해자와 도르래로 움직여야 하는 거대한 성문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전투는 이틀 밤낮 꼬박 치러졌다. 간간이 공작성으로 이송된 사람들은 대부분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있었고, 그중 반 이상은 산 사람이 아닌 시체였다.

상황이 시시각각 심각해지는데도, 지안이 기다리는 구조팀은 오지 않았다.

이쯤이면 게이트 대응팀이 무더기로 꾸려지고도 남을 시간인데, 왜 에스퍼들이 나타나지 않는 걸까. 대체 왜? 왜 이렇게 늦지?

가장 이상했던 것은, 몬스터를 두려워하면서도 이 상황이 익숙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혼란과 공포 속에서도 사람들은 각자 할 일을 했다. 하녀들은 천과 옷가지를 찢어 붕대를 만들었고, 피에 젖은 붕대를 삶았다. 시종들은 무뎌진 도끼와 칼날을 날카롭게 갈았고, 부상자들을 들어 날랐다.

친지를 잃은 사람들이 울부짖는 걸 듣고 있자니 공작성에 감금당하고 억류당한 게 조금도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오히려 공작이란 그 남자가 나를 지키기 위해 성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게 만든 것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마치 이런 일이 자주 있는 것처럼…….

그러던 와중, 또다시 마차 한 대가 공작성 안으로 들어섰다. 시종들은 들것을 들고 부리나케 마차에서 부상자들을 실어 내렸다. 멀리 창 너머로 보면서도 몸서리쳐지는 광경이었다. 다리가 없는 사람, 머리가 깨진 사람, 갈비뼈가 전부 으스러진 사람들이 한데 뭉쳐져 있다.

상황이 이쯤 되니 더 이상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구경하고 있을 수 없었다.

지안은 자신의 응급 키트를 떠올렸다. 그 안에 지혈제가 있다. 게이트 상황을 대비한 응급 키트라 이외에도 다양한 비상약이 존재한다. 주사제도 몇 개 있고, 의료용 스테이플러도 있다. 사놓고 제대로 확인한 적 없어서 실제로 뭐가 들어있는진 잘 모르지만……. 사태가 이러니 없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지안은 지난 며칠간 자신을 감시한 기사 중 하나에게 물었다.

“제가 원래 입고 있던 옷과 물건들을 돌려받았으면 해요. 누구에게 가면 받을 수 있죠?”

“하녀장에게 가면 됩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바쁘니, 급한 게 아니라면 나중에 요구하시죠.”

“급해요. 그러니 하녀장에게 안내해주세요.”

지안의 말에 기사, 헤롤드의 눈썹이 꿈틀 구겨졌다.

공작님의 손님이라는 이 여자는 하는 일도 없이 공작성 내부를 빙빙 돌아다니는 것으로 유명했다. 말인즉, 객식구다. 성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를 막되 극진히 대우하고 호위하라는 공작님의 지시가 아니었다면 어디서 개가 짖나 하며 무시했을 것이다.

뭣보다 지금은 몬스터가 무리를 지어 남하한 초유의 사태가 아닌가. 북부 얼음산을 넘어온 몬스터들이 인근의 마을을 다섯 개나 몰살시키고 오데르겐령 바로 앞마당까지 몰려들었다.

공작성 내에서 바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마는, 그중에서도 하녀장은 누구보다 더 바쁠 것이다. 그런 사람을 찾아가 하필 이런 순간에 물건을 내놓으라고 해야겠다니. 대체 어느 가문의 영애인진 몰라도 심보가 몹시 고약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당장 나가서 전투에 참여해도 모자랄 판국인데, 고작 이런 사람을 호위하고 있어야 하다니. 북부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씩이나 되어서 처지가 말이 아니었다. 공작님은 왜 이 여자의 호위를 내게 맡기신 건가.

“꼭 지금이어야겠습니까?”

헤롤드가 부러 질책하듯 말했으나 지안의 고집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기껏 좋은 마음으로 좀 도와볼까 했더니 방해를 하시네. 상황이 난장판인 건 제 눈에도 보여요. 그러니 안내해요. 당장.”

눈 하나 깜짝 않는 지안의 모습에 헤롤드는 혀를 찼다. 태도를 보니 어지간히 지체 높은 고위 귀족이신 모양이지?

“따라오십시오.”

뒤돌아선 헤롤드를 뒤따르며 지안 역시 속으로 툴툴댔다. 그가 나름 표정 관리를 한다고 했지만,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눈빛만은 숨겨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지안도 이렇게 나서고 싶진 않았다. 나름 거금을 주고 산 데다, 다시 구할 길도 없는 생존용 응급 키트 아닌가.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가능하면 아껴두고 싶었다. 이렇게 타인을 위해 소모해버리고 싶지 않다.

하지만 눈앞에서 사람이 죽고 다치는데 손가락 빨며 구경만 하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어쩔 수 없다는 핑계는 대고 싶지 않았다.

불친절한 안내자를 감내하며 찾아 나선 하녀장은 피 묻은 앞치마 차림으로 연신 하녀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본인 역시 부상병의 붕대를 가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런 하녀장의 모습을 헤롤드가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눈이 있다면 지금 하녀장이 얼마나 바쁜지 보이시겠지요.”

끝까지 비아냥대는 그 말에 지안은 울컥했다. 확 들이받아?

아니지.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주변을 조금만 둘러봐도 알 수 있다. 저 기사는 그냥 긴장한 거다. 서울에서 게이트 사태가 처음 터졌을 때도 혼란 그 자체였다. 사람이라면, 사람이 맞다면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일반인에게 몬스터의 존재란 두려움 그 자체 아닌가.

지안은 인내심을 십분 발휘하여 헤롤드의 말을 무시하고 본래의 용건을 떠올렸다.

“제 짐을 돌려주셨으면 해요.”

바쁘게 붕대를 갈던 하녀장의 손이 멈칫했다. 가족 중 누가 죽었는지를 묻는 확인도, 다음 부상병의 치료 재촉도 아닌 짐 타령이라니? 누가 이런 얼빠진 말을 하는가? 다들 바쁘게 고함치고 울음을 터뜨리는 와중에 이처럼 홀로 침착한 목소리라니.

고개를 든 하녀장은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고선 붕대를 갈던 것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사람이라면 당장 무시하고 호통을 쳤겠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공작님이 신신당부하고 떠난 손님이었다.

정체도 신분도 알 수 없는, 이국적인 외모를 한 수수께끼의 여자. 그리고 그 ‘가이드’.

공작성의 사람들은 그녀를 일개 손님으로 알고 있지만, 하녀장 요나스와 집사 제라드는 지안이 가이드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전대 공작을 오래 모셔온 덕에 공작가에 일어난 비극을 아는 극소수의 인물 중 하나이기도 했다.

특히 하녀장은 지안이 공작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창 어수선한 때에 이런 요구를 해 오는 것이 수상쩍긴 했지만, 옷가지와 짐 정도라면 내주지 못할 것도 없다. 짐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는 이미 조사를 끝마쳤지 않았나.

용도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라 선뜻 내주기가 내키지 않긴 해도……. 무려 기사 둘이 감시로 붙어 있다. 안에 든 것이 뭐든 지안 혼자서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생각을 마친 요나스는 피 묻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열쇠를 내밀었다.

“창고에 보관해두었습니다. 위치는 기사님들께 물으면 알려주실 겁니다.”

“고맙습니다.”

“짐을 찾고 나면 열쇠는 바로 제게 돌려주셔야 합니다.”

부상자들을 치료하려면 어차피 이곳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열쇠는 그때 돌려주면 된다. 지안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헤롤드에게 말했다.

“창고가 어디죠? 안내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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