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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7/199)

7화

“이제…… 괜찮다.”

악시온의 말에 지안은 손을 들어 그의 목덜미를 짚었다. 한 시간 남짓의 접촉 가이딩이 썩 효과적이긴 했는지 파장이 많이 안정됐다. 안정화 정도는 대략 20%가량.

고작 한 시간 가이딩을 진행했다는 걸 생각하면 굉장히 높은 효율을 자랑한다고 볼 수 있다. 각성자 협회의 연구소장이 이 결과를 확인했다면 몹시 놀라워했을 정도다.

하지만 기왕 접촉 가이딩을 시작한 김에 30% 정도까진 가이딩을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야 또 이런 수작질을 해 오지 않을 것 아닌가. 계산을 마친 지안은 몸을 일으키려는 악시온을 제지했다.

“가만히 있어요. 아직 가이딩 덜 끝났으니까.”

“하지만…… 나 때문에 불쾌하잖나.”

불쾌하다. 사흘 동안 감금당한 데다 납치범에게 접촉 가이딩까지 해 주게 됐다. 어떻게 기분이 더럽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너무 티가 났나? 대놓고 기분 나쁜 내색은 그닥 하지도 않았는데? 의아해하는 지안의 모습에 악시온은 꾹 입을 다물었다.

가이딩에 취해 이성이 반쯤 휘발된 와중에도 가이드인 지안의 감정은 생생히 흘러들어왔다. 의아해하고, 지루해하고, 불쾌함을 애써 참는 그 모든 감정이 가이딩과 함께 전해지고 있었다.

자신은 이토록 황홀한데 지안은 불쾌함과 지루함, 옅은 분노와 동정심 외에는 무엇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 희미한 동정심에 매달려야 하는 악시온으로선 이 이상으로 지안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가이드의 동정심이나마 사기 위해서는 정도 이상의 욕심은 부리지 말아야 했다.

그녀도 가이딩을 멈추고 싶을 것이다. 한밤중에 자신이 찾아온 걸 보고 얼마나 놀랐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지안이 놀라고 겁먹었다는 것은 접촉 가이딩이 시작되자마자 알았다.

알았지만, 그녀를 안심시킨다든가 달래겠단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술에 취한 것처럼 가이딩에 취해서 이성적인 생각을 할 여유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한 시간가량 이어진 가이딩 덕택에 늦게나마 이성적 사고를 할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가이딩을 멈추려 한 것인데……. 예상과 달리 이어진 지안의 말은 단호했다.

“가이딩 덜 끝났다고 했어요. 움직이지 말고 가만 있어요.”

지안의 말에 악시온은 숨 쉬는 것조차 조심했다.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던 가슴이 조금씩 조금씩 팽창하고 수축한다. 최대한 밀착해 있던 탓에 그 변화가 피부로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다. 지안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숨 쉬지 말라곤 안 했어요.”

“…….”

“공작이라고 했죠?”

“……그렇다.”

순순한 대답이 지안을 한결 누그러뜨렸다.

가이딩을 하다 보면 모르려고 해도 모를 수가 없는 것들이 몇 가지 있기 마련이다. 특히 지금과 같은 접촉 가이딩의 경우엔 가이딩을 받는 에스퍼가 양아치인지 아닌지가 조금 더 쉽게 판가름 난다. 에스퍼라면 대부분 가이딩에 흥분하기 마련이고, 본능적으로 더욱 더 내밀한 가이딩을 원하게 되기 때문이다.

괜히 가이드들이 각성자 협회에서 가이딩을 진행하는 게 아니다. 돌발 상황이 생기면 이를 막을 다른 에스퍼들이 상시 근무를 하는 곳이라 협회에서의 가이딩이 제일 안전하다.

물론 돌발 상황이 자주 일어나진 않는다. 에스퍼도 사람인데 왜 본능을 제어하지 못하겠는가. 문제는 본능을 인내하지 못하는 몇몇 에스퍼들에 의해 발생한다.

그리고 지안이 판단하기에 악시온의 인내심은 상위에 속했다. 적어도 걱정하는 상황이 연출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이 남자를 잘 구슬려야 집으로 돌아갈 것 아닌가.

“그런데 아까부터 고개는 왜 그렇게 돌리고 있는 거예요?”

“내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고 했지 않나.”

“…….”

기억한다. 그렇게 말하긴 했다. 대충 얼굴 맞대고 있기 싫다고 쏘아붙였었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성실히 고개를 틀고 있을 줄은 몰랐다. 불편해 보이는데, 괜찮나 저거?

“원한다면 이불이나 베개로 얼굴을 가려놓겠다.”

그렇게 말한 악시온은 대답도 듣지 않고서 베개를 들어 자신의 얼굴 위에 놓았다. 지안으로선 다소 어처구니없는 태도였다. 손을 뻗어 베개를 끌어내린 지안이 말했다.

“그런 건 됐고, 대체 언제까지 날 여기 감금시켜 놓을 셈이에요?”

“…….”

“가이드 납치라니. 각성자 협회에서 가만있을 것 같아요? 위치가 파악되면 협회에서 에스퍼들을 파견해 날 구출해줄 거예요.”

지안의 으름장에 악시온의 몸이 딱딱히 굳었다. 이어진 말은 악시온을 더욱 두렵게 했다.

“사태가 그 지경에 이르면 당신은 두 번 다시 날 볼 수 없을 거예요. 정말 그걸 원해요?”

다시는 볼 수 없다니. 말만으로도 눈앞이 아찔해졌다. 악시온은 무심코 지안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그 악력에 지안이 윽 소리를 내고 나서야 두 팔에 들어간 힘을 겨우 풀어낼 수 있었다.

심상찮은 악시온의 반응에 지안은 당황했다. 맞대고 있는 그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 것이다. 기껏 안정된 파장도 다시금 널뛰기를 하고 있다. 가이딩은 잘되고 있는데 왜 이러지? 설마 말뿐인 협박 때문에 이럴 리는 없고…….

고민하는 지안에게 악시온이 말했다.

“누구든 내게서 당신을 빼앗으려 든다면…… 죽일 것이다. 내겐 그 수밖에 없다.”

기막힌 대답에 지안이 코웃음 쳤다. 간신히 찾은 에스퍼라 어떻게 좀 구슬려 보려고 했는데, 이건 정말 막무가내 아닌가. 협회를 들먹였는데도 이런 대답이 돌아오다니. 단단히 미치기라도 한 건가?

하긴, 미치지 않고서야 협회 소속의 가이드를 납치할 리 없다. 지안은 이 꽉 막힌 남자를 어떻게든 설득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어떻게?

고민하던 지안의 시선이 악시온이 가져온 쟁반에 닿았다. 차갑게 식은 음식을 보니 적당한 핑계가 떠올랐다. 마침 이 남자는 자신이 응급 키트의 비상 알약을 먹었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좋아요. 맘대로 해요. 하지만 굶어 죽는 것도 내가 할 수 있는 저항 중 하나란 걸 기억해줬으면 좋겠네요.”

지안의 말에 악시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진심인 것 같진 않았지만, 지안이 사흘간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 말을 허투루 들을 수가 없었다.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무는 악시온의 모습에 지안은 곧바로 당근을 꺼내 들었다. 열심히 자극해 두었으니 이젠 반대급부를 제시해야 할 차례다.

“잘 생각해봐요. 가이드인 나를 화나게 해서 좋을 게 뭐가 있어요? 이러면 가이딩 효율도 떨어지고, 심하면 매칭률도 낮아진다고요. 가이딩 효율을 생각해서라도 굳이 나와 악감정 만들 필요 없지 않나요? 가이딩이라면 얼마든지 해 줄 테니 이런 납치극은 그만둬요. 협회에 잘 이야기하면…… 게이트 몇 개 순회하는 거로 이 일을 무마할 수 있을 거예요. 나도 기껏 매칭된 에스퍼를 잃지 않아도 되고. 이 정도면 서로서로 좋은 일이잖아요. 안 그래요?”

말하며 지안은 눈을 빛냈다. 설산을 내려오면서 마주친 몬스터를 단칼에 죽여버린 걸 보면 눈앞의 남자는 고등급 에스퍼임이 분명했다.

납치극을 벌인 걸 보니 분명 협회 소속은 아닌 것 같은데……. 공작이라고 했으니 어느 변방의 소국 출신일 수도.

하지만, 그래봤자 미등록 에스퍼다. 잘 구슬려 협회에 등록시키면 이 남자도 불법 에스퍼 신세를 벗어나고 자신도 맹탕 가이드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진지하게 설득해오는 지안의 모습에 악시온은 침음했다. 그녀는 자신이 차원을 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간 필사적으로 숨겨왔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다.

차라리 단순 납치를 당했다고 믿기를 바라왔고,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아 안심했지만, 과연 언제까지 이 사실을 숨길 수 있을까.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서 충격을 견디지 못하게 되면? 울음을 터뜨리면? 무엇을 상상해도 최악의 결과만 떠올랐다.

지안은 고뇌에 찬 악시온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설득이 통한 것이라 오인했다.

“난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 납치범이라는 사실 빼고 전부.”

진심이었다. 지안에게서 흘러나오는 긍정적인 감정에 악시온은 희망의 부스러기를 핥는 심정이 되었다.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말이기에 더욱더 심장이 뛰었다.

“상황이 상황이니 나도 이해해요. 당장 협회에 연락하는 게 꺼려질 수도 있겠죠.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나를 감금해두는 건 안 될 일이잖아요? 우선 나부터가 기분 더럽다고요, 이거. 내가 가이딩 인형이에요? 필요할 때 쓰고 방치하는?”

“절대 아니다.”

“좋아요. 이제 대화가 좀 되겠네. 여기가 어딘지, 정체가 뭔지, 답하기 곤란하다면 나도 더는 묻지 않을게요. 대신, 이곳을 좀 둘러봐야겠어요.”

“성 내부만이라면…….”

“나도 바깥으로 나갈 생각은 없어요. 사흘 동안 지켜봤는데 눈이 멈추는 날이 없던걸요. 아, 그리고 처음엔 분명 게이트에 휘말린 줄 알았는데…… 사실 그거 사기죠? 몬스터는 미리 준비해둔 거였고. 실은 육체 강화 능력자가 아니라 공간 능력자라던가, 뭐 그런 건가요? 아니면 둘 다? 혹시 다중 능력자세요?”

악시온은 머뭇거렸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처했다. 다행히 지안은 악시온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아무튼, 내 말은 요점은 이거예요. 최소한 날 이 방에 가두는 것만은 하지 말아요. 그쪽도 납치 및 협박으로 가이딩을 강제할 생각은 없을 거 아녜요. 가이드 상태에 따라 가이딩 효율이 좌우된다는 거, 모르진 않겠죠? 그리고 맨입으로 가이딩을 받았으면 뭐라도 보답을 해야 할 것 아녜요.”

“……호위를 붙이겠다. 네 명 정도.”

“호위? 날 감시하겠다 이거군요. 좋아요. 그 정도는 예상했으니까. 하지만 네 명은 불편하니 둘로 줄여요.”

“그럴 수 없다.”

“줄여요.”

지안의 고집에 악시온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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