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99)

6화

방심은 금물이겠지만 대응이 예상외로 엉성하다. 대안이 없어 선택한 막무가내식의 단식투쟁이 의미 있을 줄이야……. 조심스러운 악시온의 태도를 확인한 지안은 한껏 끌어올린 긴장을 늦췄다.

이렇게 대치하고 있으니 각성자 협회의 가이드들이 한 말을 알 것도 같았다. 에스퍼들은 가이드의 마음을 사려고 무슨 짓이든 한다. 모두가 그렇게 증언했다. 지안이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을 뿐, 가이드에게 절절매는 에스퍼들은 사막의 모래알처럼 많았다.

실제로 몇몇 가이드들은 에스퍼를 아예 발아래 깔아두고 지내곤 했다. 자신은 맞는 에스퍼가 없어서 가이드 대접을 제대로 못 받긴 했지만,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지극정성으로 매달리는 걸 목격한 적은 많았다. 그 반대의 경우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한결 마음을 놓은 지안은 본능적으로 악시온의 파장을 살폈다.

걱정과 염려가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실 그가 바라는 건 가이딩일 것이다. 파장을 보아하니 가이딩을 못 받은 잠깐 사이 상태가 다시 심각해진 것도 같고……. 식사를 핑계로 가이딩을 노리고 온 건가? 아무래도 그런 거겠지?

하지만 내가 왜 가이딩을 해 줘야 하나? 이렇게 뻔히 보이는 수작에 어울려 줄 생각은 조금도 없다. 지안은 문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나가요.”

“수프만이라도 조금 먹어두지 않겠나? 그러다 쓰러질지도 모른다.”

지안은 들으란 듯 코웃음 쳤다. 쓰러진다니? 누가? 내가?

음식 정도야 며칠 안 먹어도 상관없다. 그간 생각 없이 쫄쫄 굶은 줄 아는가 본데, 내가 왜 그런 손해 보는 짓을 하나.

게이트 생성 이후로 일반인을 위한 생존키트가 불티나게 판매되는 시대다. 당연히 지안에게도 생존키트가 있었다. 강제로 목욕을 당하며 대부분 빼앗기긴 했지만, 빈틈을 타 생존키트의 비상 알약을 몇 개 챙겨둘 수 있었던 것이다.

손톱만 한 알약에 불과하지만, 일주일을 식량 없이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최첨단 비상 식품이다. 그런 게 여섯 알 정도 있었다.

덕분에 지안은 지난 사흘간 배고픔을 아예 잊고 살 수 있었다. 입이 심심하다는 감각 외엔 달리 느껴지는 것도 없다. 실제로 악시온이 가져온 음식을 보고도 전혀 허기가 일지 않았다.

말인즉, 강짜를 부리기에 충분한 상황이란 뜻이다.

“나가라고 했어.”

“부탁이다. 수프 한 숟가락이라도…….”

“안 먹어.”

고민조차 없는 즉답에 악시온은 침울히 얼굴을 구겼다. 이대로 가이드가 굶어 죽도록 내버려둘 순 없었다.

“내가 뭘 해야…… 식사를 할 텐가?”

“못 들었어요? 그냥, 좀, 나가달라고요. 그쪽이랑 얼굴 맞대고 있기 싫으니까!”

맹렬히 드러나는 혐오에 숨이 턱 막혀왔다. 말문을 잃은 악시온의 모습에 지안은 더 쏴붙이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악시온이 세상을 다 잃은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안은 잠시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수심 가득한 악시온의 얼굴 위로 처연미가 드리운 탓이었다. 미인이 슬퍼하면 그걸 본 사람도 같이 슬퍼진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구나 싶었다. 저렇게 덩치 큰 남자가 처연한 표정을 지으면 보통은 안 어울려야 정상일 텐데 어울린다.

잘생긴 사람은 외모를 이렇게도 써먹는구나.

그래도 그렇지, 하다 하다 납치범 상판에 홀리다니. 아무리 잘생겼대도 저건 못 먹는 감이다. 스스로가 한심스러워지던 순간, 지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악시온의 파장이 불안정하게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당신…….”

착각이 아니다. 파장이 난폭하다 못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폭주의 전조증상이 틀림없다!

설상가상으로 눈앞의 남자가 뚝뚝 눈물을 흘려댔다. 뭐야 이거? 설마, 몇 마디 좀 쏘아붙였다고 우는 거야 지금?

“나를, 불편해하는 걸 안다. 하지만, 제발 뭐라도…… 조금이라도 먹어둬야…….”

제발이고 나발이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이 남자는 본인이 폭주 직전이란 걸 모르나? 지안은 악시온에게 성큼 다가가 그의 목덜미를 덥석 붙잡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귀와 목을 조물거리며 난폭하다 못해 붕괴할 것 같은 파장을 진정시켰다.

내가 왜 가이딩을 해 줘야 하냐는 생각은 훌훌 날아가버린 뒤다. 눈앞에서 에스퍼가 폭주하고 있는데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손대자마자 쩍 얼어붙은 악시온에게 지안이 버럭 소리쳤다.

“미쳤어요? 가이딩이 필요해서 날 납치한 거라면, 이 지경이 되기 전에 가이딩을 해 달라고 했어야지! 어디서 뭘 하다가 이제야 와? 또 폭주라도 하고 싶어서 이래요?”

사정없는 호통에 악시온의 목이 움츠러들었다. 이러려고 그녀를 찾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접촉과 동시에 통증이 마법처럼 사라지고 생전 맛보지 못한 안도감이 물밀 듯이 쏟아졌다.

불안정하던 악시온의 파장이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하는 걸 확인한 지안은 대충 그를 침대로 잡아끌었다. 내키지 않지만 첫날처럼 접촉 가이딩을 해야 상태가 나아질 듯했다.

매칭율이 좋아서 단순 접촉으로도 강도 높은 가이딩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남자의 상태는 몹시 심각했다. 사실 그에게 필요한 건 가장 높은 단계의 가이딩이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진 할 수 없다.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남은 방법은 보다 깊은 접촉을 통한 가이딩 뿐이다. 최대한 피부의 밀착면을 높이는 것 외엔 선택지가 없었다.

침대의 이불보를 들추며 지안은 다시 한번 망설였다. 정말 내키지 않는다. 내키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다. 가이드로서 가이드 윤리강령을 따르지 않을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악시온을 돌아보며, 지안이 말했다.

“벗어요.”

벗으라니 무엇을? 악시온은 멍청히 반문했다. 그는 지안의 눈썹이 살풋 구겨지기 시작할 때쯤에서야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잠깐의 고민 끝에 악시온은 힘겹게 가이딩 유혹을 뿌리쳤다.

“나는, 가이딩을 받으려고 온 게 아니다.”

“그럼? 이대로 폭주라도 하겠단 건가요?”

“종종 있어 왔던 일이다.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는다.”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는다니,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정말이다. 곧 가라앉을 거다. 가라앉힐 수 있다. 그러니까 그대는 식사를…….”

“하. 고집이 세네. 폭주가 그렇게 쉽게 가라앉는 거면 에스퍼들이 왜들 그렇게 가이드를 찾겠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린 그만 좀 하죠. 식사 챙기겠단 건 그냥 말뿐인 거고, 가이딩 요구하러 온 거란 거 다 알아요. 아니까 그 표정 연기 좀 관둬요.”

멋대로 단정 지어버린 지안은 악시온을 힘껏 밀쳐 침대 위로 쓰러뜨렸다. 그래봤자 악시온에겐 자그마한 손짓에 불과했지만, 악시온은 얌전히 침대로 쓰러져주었다. 지안이 미는 대로 떠밀리지 않고 버티면 자신을 밀친 지안이 외려 뒤로 넘어질 거란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악시온을 침대에 주저앉힌 지안은 그대로 제 상의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냈다. 본의 아니게 스트립쇼라도 하는 기분이었으나 수치심은 들지 않았다. 긴급 가이딩 자체가 일종의 의료 행위로 취급되기도 하거니와, 악시온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지안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보이는 거라곤 남자의 정수리뿐이다.

상의를 완전히 탈의한 지안은 그대로 침대 위에 올랐다. 그러고선 악시온의 옷을 벗기기 위해 손을 뻗었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마음 같아선 가이딩이고 뭐고 폭주하게 내버려두고 싶지만…… 어떻게 그러겠는가.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찬 바람 쌩쌩 부는 신전 바닥에 망토만 깔고 접촉 가이딩을 했을 때보단 상황이 낫다는 거다.

한숨을 삼키며 단추를 하나씩 끄르는 지안의 손을 악시온이 붙잡았다.

“……내가 하겠다.”

“그러시든가.”

악시온은 순식간에 상의를 탈의했다. 그리고 지안의 지시대로 순순히 침대에 누웠다. 그다음에야 그는 뒤늦게 지안을 찾은 용건을 상기했으나 그것마저 곧 잊어버렸다. 지안이 자신의 몸 위로 올라타 그대로 엎드렸기 때문이었다.

악시온의 맨가슴 위로 지안의 피부가 부드럽게 맞닿았다.

“……!”

한층 강해진 가이딩의 강도는 충격적이었다. 순간적으로 의식이 반쯤 날아갔다가 되돌아올 정도였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악시온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정신을 놓으면 본능이 시키는 대로 지안을 껴안고 뒹굴 것 같았다. 악시온은 제 가슴 위에 엎드린 지안을 함부로 껴안지 않기 위해 인내심을 모조리 긁어모았다.

하지만 온몸의 신경이 쏟아지는 가이딩을 향해 쏠린다. 몸이 녹는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육신을 짓이기던 통증은 씻은 듯 걷히고 그 자리에 희열과 갈망이 촘촘히 들어찼다.

폭주로 죽어가던 순간 가이딩을 받긴 했지만, 그땐 기절해 있던 상태라 가이딩의 위력을 제대로 맛보지 못했다. 이외의 가이딩은 손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전부라, 그가 강도 높은 접촉 가이딩을 맨정신으로 받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이어서 지안의 손이 악시온의 어깨에 둘러지자, 악시온은 참지 못하고 그대로 지안의 허리를 껴안았다. 견딜 수 없이 황홀했다.

반면 지안은 건조한 이성으로 가이딩을 지속해나갔다. 반쯤 넋을 놓은 남자의 표정이 봐줄 만하긴 했지만, 거기까지다. 그마저도 가이딩에 휩쓸렸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지 고개를 팩 돌린 채였다.

굳이 평가하자면 이래저래 불편한 가이딩이었다. 눈앞의 남자가 폭주를 할 게 뻔히 보이지 않았다면 이런 식으로 긴급 가이딩을 진행하는 일은 없었을 거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두 사람 사이로 천천히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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