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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5/199)

5화

목욕시중에 이어 옷시중을 들겠다는 사람들 때문에 한 차례 곤욕을 치른 지안은 잔뜩 예민해진 채로 식당을 안내받았다.

몇 차례 화를 내고 항의했지만 만족스러운 답변은 듣지 못했다. 지안이 유일하게 들을 수 있었던 답변은 이것뿐이었다.

“공작님의 지시입니다.”

이외의 유의미한 답변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 이상으로 저항하면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고지를 받았을 뿐이다. 그 순간의 어이없음이란 말로 형용할 수조차 없을 정도다.

그나마 알려준 건 목욕 후 식당으로 안내하겠단 건데……. 아무리 봐도 이건 안내가 아니라 감시였다. 좌우 양옆은 물론이고 앞뒤로 사람을 포위한 채 이동하다니. 이런 안내는 듣도 보도 못했다.

그렇게 삼엄히 감시받으며 도착한 식당에는, 자칭 북부의 공작이라는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앉지.”

“…….”

“……시장하지 않나?”

태연한 그 물음이 지안의 성질을 들쑤셔 놓았다.

“시장은 모르겠고.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부터 설명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존대마저 사라진 날 선 질문이었다. 미약하게 존재하던 호의마저 모조리 소거된 듯한 물음에 악시온은 처음으로 작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뭐라도 변명하고 싶었지만, 그럴싸한 변명 하나 생각나는 게 없다.

첨예한 침묵이 스멀대며 허공을 기었다.

지안의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은 영문을 몰라 하며 눈을 굴렸다. 북부의 공작께 하대라니! 제국 테리온의 황제를 제외하면 감히 누가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멋모르고 뻗대는 이 여자가 대체 누군지 모르겠지만, 신분이 황녀쯤 되는 게 아니라면 결코 이 장소에서 살아나갈 수 없을 것이다.

기사들은 악시온이 지안을 즉결처분할까 봐 걱정했고, 시종들은 카펫에 스며든 피를 지워내야 할까 봐 염려했다. 그들이 아는 악시온은 이유 없이 난폭한 군주는 아니었지만 냉담하고 예민한 사람이었다. 동시에 언제 미쳐 날뛸지 모르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먼저 굽혀 온 건 악시온이었다.

“……질문이 있다면 답하겠다. 부탁이니 앉지.”

부탁이라니! 기사들은 선 채로 소리 없이 경악했다.

그러나 그의 부탁은 지안에게 조금의 감흥도 주지 못했다. 내가 왜 그의 부탁에 따라줘야 한단 말인가? 성질 같아선 헛소리하지 말라고 대차게 쏘아붙이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여기가 게이트가 맞긴 한 건지, 어떻게 게이트 안에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는지 등등 알아야 할 것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사방에 세워진 기사들이 지안을 위축시켰다.

지안이 내키지 않는 얼굴로 의자에 앉자 하녀와 시종들은 얼른 식기를 세팅하고 음식을 날랐다.

그들이 애쓴 결과, 거대한 식탁이 금세 호사스런 음식으로 가득 채워졌다. 은빛 광택을 내뿜는 술잔 안으로 와인이 따라지고 향신료의 향이 공기 사이사이를 감돌았다. 여러 사람이 모여 파티를 벌여도 지금처럼 융숭한 대접을 받긴 힘들겠단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지안은 눈앞의 음식을 맛보아야겠다는 생각은커녕, 일말의 배고픔조차 느끼지 못했다. 배고픔이 다 뭔가. 처음 보는 에스퍼를 무작정 믿어버렸단 사실이 후회스러울 뿐이다. 잘 차려진 음식이 즐비해 있었지만 도저히 뭔가를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악시온은 지안이 식기를 들길 기다렸다. 뭔가 좀 먹고 나면 그녀도 신경을 누그러뜨릴 것이다. 맛있는 음식은 사람을 관대하게 만든다지 않는가. 실제로 두 사람 앞에 차려진 음식은 악시온이 주방장을 불러 신신당부한 끝에 완성된 만찬이었다.

“들지.”

권유했으나 지안의 두 손은 단정히 허벅지 위를 지킬 뿐, 식기를 집는 가장 단순한 행위조차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악시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초조해졌다. 지안은 몰랐지만, 식탁 위의 모든 것이 지안을 대접하기 위해 차려진 음식이었다. 하지만 정작 지안이 식기를 들지 않으니 식사가 이루어질 리 만무했다.

기껏 차려진 음식이 싸늘히 식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안의 표정은 그보다 더 싸늘했다. 다급해진 악시온은 지안이 묻지도 않은 것들을 알아서 답하기 시작했다.

“여긴 북부 오데르겐령이다. 말했다시피 나는 이곳의 공작이고…….”

차가운 지안의 시선에 악시온은 어린아이가 된 것마냥 머뭇거렸다. 다음 말을 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당신이 필요하다.”

지안은 반응하지 않았다.

갑작스레 게이트가 생겨나고 각성자가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할 무렵, 에스퍼가 가이드를 납치하는 일이 종종 일어나곤 했다. 각성자 협회가 생긴 뒤로는 그런 일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지만, 제삼세계나 음지에선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일이라 들었다.

사실, 싫다는 사람에게 굳이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입히던 순간부터 납치를 의심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일반적인 납치 상황이라고 여기기엔…… 뭔가 이상했다. 영락없이 게이트 발현에 휘말렸다고만 생각했는데, 왜 일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걸까?

어쨌건 게이트에 휘말린 것 못지않은 위기 상황임은 틀림없다. 지안은 한숨을 삼켰다. 기껏 매칭률이 맞는 에스퍼를 찾아 좋아했는데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우선…… 여긴 게이트가 아닌 건가요?”

“나는 게이트가 무엇을 지칭하는 단어인지 모른다.”

악시온의 말에 지안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세상에 게이트가 뭔지 모르는 에스퍼가 어디 있는가. 거짓말을 할 거면 정성껏이라도 할 것이지! 성질 같아선 버럭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으나 지안은 훌륭하게 분노를 참아냈다.

“제가 지금 말장난할 기분인 것처럼 보이세요? 난 여기가 어디인지를 묻는 거예요. 북부인지 오데르겐령인지 그런 것 말고.”

경고성의 어조로 다시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더욱 이상했다.

“이곳은…… 위스로데 대륙이다.”

위스로데 대륙이라니? 점점 더 알 수 없는 소리만 하는 악시온을 지안은 가만히 노려보았다. 이번에도 역시 거짓말인가? 하지만 표정을 보건대 말장난을 하려는 것 같진 않았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저 남자가 장난질을 하는 건지 수작질을 하는 건지 알게 뭐란 말인가. 도통 영문을 알 수 없단 생각에 기분만 더 나빠질 뿐이다. 왈칵 터지고 만 분노를 지안은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이봐요! 내가 지금 당신 헛소리에 어울려줄 기분으로 보여?”

사나운 지안의 말에 기사들이 헛숨을 집어삼켰다.

“재수도 없지. 기껏 매칭할 수 있는 에스퍼를 찾아 좋아했더니…… 가이드 납치범일 줄이야.”

납치범. 악시온은 그 말을 부정할 그 어떤 항변도 찾지 못했다. 그녀의 말대로였으니까. 그는 변명 대신 입을 다물었다. 서릿발 같은 비난에 숨통이 죄어들고 심장이 죄책감으로 두근두근 뛰었다.

그녀가 화내는 것도 당연했다. 이미 저질렀고, 앞으로도 계속 저지를 행위 앞에 뭐라고 사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다시 그녀를 설산의 정상에 다시 데려다 놓고 싶었다. 북부의 신전을 찾아가 그녀를 본래 그녀가 살았던 장소로 돌려보내며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악시온은 질끈 눈을 감았다.

“……미안하다.”

* * *

지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던 최악의 만찬으로부터 사흘이 흘렀다.

늦은 밤, 악시온은 작은 쟁반을 들고서 지안의 방 앞을 서성였다. 지안이 사흘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다. 하녀들이 때마다 식사를 내갔지만, 그녀는 손도 대지 않고 그대로 돌려보냈다.

그렇게 작은 여자가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어렵게 얻은 가이드가 아닌가. 백 년에 한 번 나타날까 말까 하는 소중한 존재다. 어떻게 해서든 지안에게 수프 한 숟가락이라도 먹이겠노라 결심하며 악시온은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몇 차례 노크해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고민 끝에 그냥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들어가겠다.”

통보하며 방 안으로 들어간 악시온은 쟁반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막 만들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크림 수프, 구운 빵과 신선한 채소, 생선찜과 스테이크가 쟁반 위에 빽빽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만찬의 축소판에 가까운 쟁반 위의 성찬은, 지안이 뭘 좋아할지 몰라 다 준비했기에 벌어진 모양새였다. 악시온은 그중에 하나라도 지안의 입맛에 맞는 음식이 있기를 바라며 지안을 찾았다.

지안은 침대가에 앉아 있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안은 악시온의 파장때문에 막 쏟아지던 잠이 확 깨버린 상태였다. 노크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잠기운이 에스퍼 특유의 파동으로 인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상성이 맞는 에스퍼의 파동은 가이드인 지안에게 선명한 신호음과 같았다. 비유하자면, 그동안 청각장애를 안고 살다가 갑자기 청각이 돌아왔는데 처음 들은 것이 요란한 사이렌 소리인 것과 비슷하다. 그처럼 난폭한 파동이 점점 가까워지는데 어떻게 마음 놓고 잠들겠는가.

취침을 방해받은 지안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게다가 방 안에 악시온이 들어선 건 오늘이 처음이다. 사흘간 그림자도 볼 수 없다가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강제로 가이딩을 요구하려 드는 걸지도 몰랐다. 설마 가이딩 착취라든가…….

지안은 잔뜩 예민해졌다. 악시온이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쟁반이며 음식 따위는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뭐지?”

“사흘간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래서?”

“뭐라도 좀 먹었으면 해서…….”

지안의 시선이 쟁반 위에 가 닿자 악시온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먹고 싶은 음식이 따로 있다면 새로 만들라고 하겠다.”

악시온의 말에 지안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밤중에 찾아오길래 강제로 가이딩 요구를 하려는건가 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납치범답게 협박이나 폭력을 주 무기로 쓸 줄 알았는데 밥 굶는 거나 신경 쓰고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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