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지안은 악시온의 미세한 반응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눈을 깜빡이며 잠기운을 물리친 지안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선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 바람에 악시온은 지안의 몸에서 손을 떼야 했다.
그 순간 악시온이 느낀 것은 익숙한 괴로움이었다. 가이드와 떨어진 바람에 가이딩의 강도가 급격히 낮아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안은 허겁지겁 셔츠를 챙겨 입고 바닥에 나뒹구는 롱패딩을 집어 들었다.
서둘러 옷을 껴입은 지안이 머리를 긁적이며 그에게 말했다.
“일어나셨구나! 제가 잠깐 잠들었나 봐요. 그보다, 괜찮으세요? 조금만 더 늦었어도 그대로 폭주할 뻔했어요. 대체 소속이 어디기에 가이딩을 그렇게나 미룬 거죠?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요. 당신.”
가이딩.
낯선 단어였지만 악시온은 그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동시에 눈앞의 여자가 누군지도 알 것 같았다.
“당신은…… 가이드인가?”
“맞아요. 한국의 소속 가이드. 여지안입니다.”
내밀어진 손을 악시온은 홀린 듯 붙잡았다. 손을 잡는 순간, 농밀한 기운이 전신을 휩쓸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제가 안정되어 가는 것도.
방금 전, 지안이 벌떡 일어나던 순간 당황하지 않았다면 그녀를 놓치는 일도 없었을 터다.
자연스레 든 생각에 악시온은 이를 악물었다. 눈앞의 가이드가 너무도 황홀한 나머지 무서웠다. 제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서.
몰랐다면 모를까, 가이드가 나타난 이상 절대로 놓칠 수 없었다. 만일 그녀가 떠나려 한다면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성에 가두리란 생각이 치밀어올랐다. 지안이 알았다면 기겁했을 생각이었다.
그는 이런 제 생각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동시에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가 아는 한, 지안은 능력자만이 가득한 이곳 위스로데 대륙의 유일한 가이드였다.
* * *
지안은 신기함을 감추지 못하며 악시온을 흘끔거렸다. 절로 눈에 들어오는 그의 외모 탓이었다.
에스퍼들이 대부분 잘생겼다는 건 익히 봐서 알았지만, 은발은 그렇다 쳐도 보라색 눈은 또 처음이다. 렌즈를 착용한 게 아닐까 싶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색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어느 렌즈 업체가 저렇게 깊은 눈빛을 만들어낸단 말인가? 각도와 방향에 따라 동공이 연보라색으로 보이기도 하고 짙은 남색으로도 보였다. 오뚝한 콧날에 단정하고 금욕적인 얼굴 역시 독특한 인상을 자아냈다.
분위기가 일반인과는 확연히 다른데 연예인 지망생인가? 게이트 사태가 잠잠해지고 난 이후 에스퍼를 연예계로 끌어들이는 기획사가 생겼다고 듣긴 했다. 그뿐인가, 몸매 역시 남달랐다. 조각 같은 복근 라인이 제대로 눈을 호강시켜 준다. 올림픽 선수들 못지않은 육체미랄까.
대체 뭐 하는 에스퍼일까? 정신계? 아니면 육체 강화가 특성이려나? 소속은 어딜까? 길드 소속? 아니지. 길드 소속이라면 폭주 직전까지 방치당할 리 없다.
지안은 의식적으로 가이딩을 지속했다. 악시온의 얼굴이 불안과 두려움으로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그러진 얼굴마저 감탄이 나올 만큼 아름답다. 자신을 대놓고 흘끔대는 게 좀 웃겼지만, 하마터면 폭주할 뻔했으니 불안해하는 것도 당연하다.
손을 잡은 악력이 강한 것도 불안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뿌리치려고 한들 실패할 것이 분명하다. 동아줄처럼 제 손을 잡고 있는 에스퍼에게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지안은 신기한 것을 보듯 악시온을 올려다보았다.
매칭 가능한 에스퍼가 처음이긴 하지만, 센터 소속이다 보니 에스퍼에 대해서 이것저것 들은 것들이 있다.
에스퍼에게 가이드란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가이딩을 받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게 에스퍼 아닌가. 게다가 폭주에서 막 벗어났으니 오죽 정신이 없으랴. 이해한다.
이해하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이름도 안 밝히고 있는 거지? 적어도 소속은 밝혀야 할 것 아닌가.
“다시 말하지만, 저는 한국의 여지안 가이드입니다. 당신은 어디 소속이죠? 에스퍼인 건 확실한 것 같고. 이름은?”
“악시온, 악시온 오데르겐.”
“역시 한국인은 아니군요. 국적이 어디죠? 러시아? 아니면 영국?”
악시온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지안이 무엇을 묻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악시온은 고뇌에 찬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의 눈에, 추위로 떨리는 지안의 입술이 들어왔다.
북부의 추위를, 그것도 설산의 기온을 이겨내기에 눈앞의 지안은 너무 작고 여려 보였다. 그녀의 손가락은 너무 작았고, 입김은 힘없이 흩어졌으며, 보온을 위한 장갑과 털신, 모자도 없었다.
북부에선 추위에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잃는 사람이 흔했다. 자신이야 체온이 높아서 그런 일 없었다지만…… 눈앞의 여자는 다르다.
“……우선 여기서 벗어나지.”
“좋아요.”
지안이 수긍하자 악시온은 크게 안심했다.
그녀가 자신의 의도를 의심하거나 함께 동행하지 않으려 한다면 기절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 점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악시온은 지안이 그의 예상보다 더 순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은 드디어 매칭률이 맞는 에스퍼를 찾은 탓에 흥분해서 그런 거지만, 악시온이 이런 사정까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지안은 불온한 악시온의 생각을 조금도 알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게이트에서 나가면 각성자 센터로 같이 가 주셨으면 해요. 아니지, 지금 바로 매칭률 검사 좀 해 보지 않을래요? 마침 제가 휴대용 매칭률 검사기를 가지고 있거든요.”
“……뭘 검사하겠다는 거지?”
“가만히 있어도 파장이 느껴지는 걸 보니 그쪽과 매칭률이 높은 것 같아서요. 이대로도 가이드 효율이 좋은 것 같긴 한데, 매칭률이 몇 퍼센트인지 제대로 확인해보는 게 좋지 않겠어요?”
악시온은 지안이 하는 말을 절반도 채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지안이 뭘 하려고 하는지 몰라 불안할 뿐이었다.
하지만 해사하게 웃는 지안의 모습에 그만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녀가 검사하겠다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저토록 기쁜 눈빛으로 제안해오지 않나. 거절의 말을 몇 차례 곱씹었지만, 막상 입 밖에 내기가 힘들었다.
머뭇거리는 악시온을 지안은 열심히 설득했다.
“간단한 검사예요. 혈액 검사랑 비슷한데 여기 제 손목 보이시죠? 손목시계처럼 보이지만 이거 매칭률 검사기거든요. 버튼을 누르면 작은 채혈침 바늘이 나오는데 바늘에 약간만 피를 묻혀서 검사하는 거예요. 조금 따끔할 텐데. 괜찮으시죠?”
“괜찮다.”
자동으로 나와버린 답변에 악시온은 흠칫했다. 바늘에 독이 묻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왜 그런 말을 한 거지? 하지만 저도 모르게 순순히 손을 내주고 만 뒤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지안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이 있었다.
그래, 바늘에 좀 찔린다고 무슨 해를 입을까. 설령 독이 묻어있다 해도 상관없다. 웬만한 독은 아무렇지 않게 이겨내 왔지 않았나. 무엇보다 눈앞의 가이드는, 바늘에 독을 묻히는 악독한 짓을 저지를 것 같지 않았다.
채혈침이 악시온과 지안의 손가락을 한 번씩 찌르자 곧바로 결과가 나왔다. 매칭률은 지안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높았다.
98%.
처음 보는 숫자에 놀란 것도 잠시, 지안은 활짝 웃었다. 0%가 아니다! 드디어 제대로 된 가이드 노릇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기쁨도 잠시, 지안은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매칭률 높은 에스퍼를 찾은 건 기쁜 일이지만, 난생처음 맞이한 심각한 위기 상황 아닌가. 무려 게이트 발현에 휘말린 초유의 사태다. 그 점을 생각하니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런데 우리 어디로 가면 되는 거죠? 제가 게이트는 처음이라서요. 가이드이긴 하지만 게이트 파견 경험은 없어요. 빨리 출구를 찾아야 할 텐데 보시다시피 아직도 눈보라가……. 하아, 애초에 게이트 발현에 휘말리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래도 운 좋게 몬스터와 마주치진 않았으니 다행인 건가? 아무래도 지금 나가면 위험하겠죠?”
악시온에게 지안의 말은 재잘거림으로 들렸다. 북부의 괴수라면 걱정 없다. 상태가 완전히 좋아진 덕에 한 손으로도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과정에서 눈앞의 가이드가 놀라진 않을까? 악시온은 그게 걱정이었다.
휘몰아치는 칼바람 역시 악시온을 근심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였다. 자신이야 북부의 겨울바람을 맞으며 자라왔다지만, 눈앞의 여자는 추위에 몹시 취약해 보였다. 발개진 얼굴과 덜덜 떨리는 턱, 창백한 입술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생각 끝에 악시온은 망토를 벗어 지안의 몸에 둘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싸맸다. 여인들이 아이를 등에 업기 위해 동여매는 걸 모방한 것이다. 그렇게 하면 지안을 데리고 산을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잠깐, 뭐…… 뭐 하시는 거예요?”
“당신은 바깥의 추위를 견디지 못한다.”
“저는 괜찮은데요.”
“지형이 험해. 괜히 구르거나 넘어지지 말고 업혀라.”
지시조의 말에 기분이 떨떠름했지만, 지안은 어렵지 않게 수긍했다. 게이트 안이니까 에스퍼의 말을 따르는 게 좋겠지? 게다가 눈앞의 남자가 아니면 게이트에서 벗어날 길도 요원하다.
지안은 얌전히 악시온의 등에 업혔다. 다 커서 모르는 남자의 등에 업히려니 약간은 거부감도 들고 창피하기도 했지만, 고생은 지안이 아니라 악시온이 하는 것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업힌 채로 가이딩이라도 열심히 해 주지 뭐. 지안은 고민을 접고 악시온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런데 복장이 왜 이래요?”
“복장……말인가?”
“네. 에스퍼들이 특수복 입고 게이트 진압한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는데, 지금 입고 계신 건 딱히 특수복도 아닌 것 같아 보여서요.”
게다가 망토는 왜 두르고 다니는 거냐고. 혹시 컨셉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지안은 차마 거기까지는 묻지 못했다. 취향이라면 존중해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