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99)

2화

“이러다 몬스터가 나오기도 전에 얼어 죽겠는데…….”

중얼거린 지안은 롱패딩에 달린 모자를 쓰고 주머니의 핫팩을 뜯었다. 조금이라도 체온을 보존해둬야 구조팀이 당도할 때까지 버틸 수 있다.

각성자 협회에서 게이트 관련 수업을 들어 둬서 다행이었다. 게이트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인이었다면 이렇게 침착할 순 없었을 것이다.

“……그나저나 여긴 무슨, 신전인가?”

지안은 눈앞에 보이는, 고풍스러운 장식이 달린 수십 개의 기둥과 제단으로 보이는 단상을 눈에 담았다.

동굴 너머 바깥에선 어느덧 폭설이라 해도 좋을 눈이 광풍과 함께 몰아치고 있었다. 만일 자신이 동굴 속 신전이 아니라 저 눈밭 위에 떨어졌다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얼어 죽었을 것이다.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

아니지, 운이 좋은 게 아니라 나쁜 건가? 매칭률 제로에 이어 게이트 발현에 휩쓸리다니.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일진이 사나워도 이렇게 사나울 수가.

“응?”

그러던 중, 동굴 밖 멀리서부터 뭔가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지안은 고개를 휙 돌려 동굴 입구를 응시했다.

시야에 뭔가가 드러나 보인 건 아니었다. 두 눈을 크게 떠도 보이는 거라곤 날리는 눈발과 성인의 허리춤까지 올라오도록 쌓인 눈뿐.

그럼에도 분명히 느껴진다. 뭔가 오고 있다. 난폭한 파장 같은 것이 지안의 피부를 콕콕 찔렀다. 대충 주저앉아 있던 지안은 벌떡 일어났다. 다가오고 있는 게 뭔진 몰라도 몬스터라면 도망쳐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몸을 숨길만 한 곳도 없다. 지안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기둥 뒤에 몸을 숨기는 것뿐이었다. 기둥이 거대해서 몸을 숨기려면 숨길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갈까? 기둥을 붙잡은 지안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침착해지려 애썼지만 여기까지인 것 같았다. 추위와 두려움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죽나? 여기서?

늘 소지하고 다니는 게이트용 긴급 생존 키트가 퍼뜩 떠올랐지만, 그건 몬스터를 피해 도망친 후에나 쓸모가 있다. 무기 따윈 없다. 몬스터 앞에선 이깟 응급 키트 따윈 아무 소용 없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남은 돈이라도 다 써버렸어야 했는데!

위기의 순간에도 고작 이런 후회를 하는 사이, 허리춤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나온 무언가가 동굴 안에 발을 디뎠다. 저벅― 하는 발걸음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쿨럭!”

기침 소리였다.

사람! 분명 사람의 기침 소리다. 벌써 각성자가 게이트에 투입된 건가? 지안은 반색하며 기둥 뒤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탈색한 듯 화사한 은빛 머리카락이었다.

복장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분명 사람이다! 안도감과 반가움에 지안은 얼른 기둥 뒤에서 나와 남자에게 다가갔다.

“각성자세요?”

물음을 던지자마자 남자가 쓰러졌다.

지안은 놀라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동굴 밖에서 몬스터에게 당한 건가? 그런 거야? 설상가상으로 남자가 토해낸 핏자국이 바닥에 붉은 얼룩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지안은 경악하며 남자를 부축하려 손을 뻗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에게서 난폭한 파장이 느껴졌다. 지안을 놀라게 만들었던 바로 그 감각이었다.

‘설마……!’

순간, 지안은 저도 모르게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매칭률이 맞는 에스퍼가 나타나면 에스퍼 특유의 파장을 느낄 수 있을 거야.’

연구소장은 그렇게 말했다. 그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서 외울 정도였다. 어쩌면 이 남자는 자신과 매칭률이 맞는 에스퍼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나 선명히 그의 파장이 느껴질 리 없다.

“이, 이봐요…….”

지안은 조심스레 다가가 쓰러진 남자를 흔들었다. 바로 그 순간, 덥석 손이 잡혔다.

그와 동시에 알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에스퍼가 맞으며, 현재 폭주 상태라는 것을. 가이드 교육을 받았다면, 그 전에 가이드로서의 감각이 있다면 알아챌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지안은 본능적으로 가이딩을 시작했다.

그리고 막 제 기운을 불어넣으려던 순간, 지안은 무서운 악력으로 남자의 품 안으로 끌려들어 갔다. 예고 없는 행동이었으나 두렵진 않았다. 그가 에스퍼였기 때문이다.

남자가 말했다.

“……살려줘.”

제발. 가지 마. 살려줘. 그의 파장이 애걸에 가까운 호소를 했다.

지안은 직감했다. 자신과 매칭할 수 있는 에스퍼가 드디어 나타났다고!

결론을 내린 지안은 망설임 없이 기운을 불어넣었다. 어쨌든 이곳은 게이트 안이고, 게이트 안에서 살아나가려면 에스퍼의 도움이 필요했다. 지안이 내린 결론은 단순했다.

이 남자가 살아야 내가 산다!

몬스터가 나타나기 전에 최대한 가이딩을 해서 게이트를 빠져나간 뒤, 그 후에 제대로 된 접촉 가이딩을 시도하면 될 것이다. 연구소장이 만세를 부르는 모습이 절로 상상될 정도였다. 그간 지안의 에스퍼를 찾아내려 혈안이 되어 있던 사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궁금해졌다. 대체 이 남자는 누굴까? 어디 소속이지? 국적은 뭘까?

궁금해하는 사이 남자의 입가에서 피가 주룩 흘러내렸다. 그 모습에 지안은 정신을 차리고 가이딩에 집중했다. 궁금증은 잠시 뒤로 미뤄야 할 듯싶었다.

남자는 폭주 단계에 접어든 지 한참이 지난 상태였다. 각성자 협회에서 에스퍼를 이 지경까지 방치할 리 없을 텐데 대체 왜 이런 상태가 된 걸까.

중요한 건 당장 이 남자를 살려내는 거다. 목덜미에 손을 얹어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니 손만 잡고 있는 것으론 턱도 없을 것 같았다.

지안은 잠시 고민하다가 롱패딩을 벗어 던졌다. 셔츠도 망설임 없이 벗었다. 추워 죽을 것 같지만 별수 없다. 좀 더 몸을 밀착하는 심화된 접촉 가이딩이 아니라면, 폭주의 마지막 단계에 접어든 이 남자를 살릴 수 없다.

최대한 옷을 벗은 지안은 서둘러 남자의 옷도 벗겨냈다.

문제는, 그의 복장이 너무도 난해하다는 데 있었다. 대체 망토는 왜 두르고 있는 걸까? 철로 된 비늘 갑옷 같은 이건 또 뭐고? 더구나 속에 껴입은 조끼에는 매듭이 너무 많아서 난감했다.

그래도 어찌어찌 남자의 셔츠까지 다 벗겨낸 지안은 동굴 바닥에 망토와 옷가지를 깔고 누워 그대로 남자를 껴안았다. 피부 접촉면을 최대한 늘리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지안은 남자의 팔을 자신의 허리에 두르며 롱패딩을 이불처럼 덮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자의 체온은 정상 이상으로 뜨거웠다. 이러고 있는 동안에는 추위를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지안은 가이딩에 한껏 집중하며 눈을 감았다.

* * *

“헉!”

악시온은 외마디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 폭주로 망가져 가던 몸을 이끌고 얼음산을 넘은 것이 그가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흐릿하긴 하지만, 죽음을 맞이하던 마지막 순간 북부의 여신이 나타나 그를 맞이해준 것도 같았다.

적어도 마지막 순간은 포근했다. 악시온은 그에 만족했다. 처참했던 삶을 보상해주듯 달콤한 죽음이었다.

스스로의 최후에 대한 평가를 마친 악시온은 낯선 안온함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깜빡였다. 쪼개질 듯 아프던 머리가 난생처음으로 개운했다. 내장을 토막 내고 휘저어대던 고통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더는 호흡이 고통스럽지 않았다.

……이런 일이 가능한 건 내가 죽었기 때문이겠지.

악시온 오데르겐은 비로소 안도했다. 죽음으로써 대대로 공작가의 직계에 내려온 저주와 고통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몽롱한 의식이 점차로 선명해지자, 악시온은 차츰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가 가장 먼저 인식한 것은 제 가슴께에서 느껴지는 말랑한 감촉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품 안에 잠들어있는 지안을 인식한 순간, 악시온은 혼란에 빠졌다.

“내가 지금…… 꿈을 꾸나?”

주변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옷가지와 흐트러진 차림으로 안겨 있는 지안의 모습에 악시온의 이성이 잠시 멈췄다. 악시온은 찰나간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자신의 팔이 지안의 허리에 둘러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나 여자가 깨어난다면 꼼짝없이 불한당 취급을 받을 것이다. 이 상황만 놓고 보면 북부의 오데르겐 공작이 사실은 파렴치한이었다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난감함은 두 번째 문제였다. 서둘러 옷을 입고 여자를 깨워 자초지종을 파악해야 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왜인지 모르겠으나 이 여자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악시온은 몸을 일으키려던 자세 그대로 굳은 채,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든 지안을 내려다보았다.

뭔가 이상했다.

폭주를 각오하고 몬스터들의 군세 한가운데를 파고든 것까진 기억한다. 그러다 결국 폭주했고, 밀려드는 고통을 더는 억제할 수 없게 되자 도망치듯 설산의 정상에 올랐다. 대대로 폭주한 공작가의 핏줄은 무차별적으로 주변 사람들을 살해했고, 그나마 이런 광기를 억눌러주는 것은 북부의 살을 에는 찬 공기뿐이었으니까.

악시온은 필사적으로 산 깊숙이, 얼음과 눈이 쌓인 곳으로 향했다. 두 발로 걸었는지 기어 왔는지조차 정확하지 않다. 죽음을 직감했던 순간순간들만이 선명히 기억날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 것은…… 바로 이 여자였다.

바로 그 순간, 지안이 눈을 떴다. 밤하늘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흑안에 악시온은 숨을 멈췄다.

‘아…….’

스르륵 눈 뜬 지안의 얼굴이 의표를 찌르듯 그의 가슴을 쿡 찔러온 탓이었다. 호수처럼 깊은 눈동자에 그대로 빨려들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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