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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83)화 (183/183)

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83화

카 액션이 두드러진 영화를 예매한 건 한지원과 이 팀장의 추천 때문이었다.

영화 예매를 앞두고 남자 둘의 취향이 겹치는 것 같아 강우신 역시 그걸 좋아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 취향이었냐는 내 물음에 해맑은 얼굴을 한 우신이 답했다.

“제 취향은 아니지만, 볼만했습니다.”

“……강우신 가이드 취향은 뭔데요?”

“굳이 말하자면 멜로요. 다들 의외라고 하지만 로맨스 영화 좋아합니다.”

“…….”

“액션은 아무래도 더한 걸 현장에서 보다 보니까. 하지만 양 헌터가 재미있었으면 됐어요.”

우신은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곤 밥은 제가 사겠다면서 손을 잡고 나갔다.

그때부터 오기가 생겼다.

나는 강우신을 유명한 해산물 파스타 집으로 데려갔으나 그는 갑각류를 좋아하지 않았고 후식으로 빵 가게를 데려갔으나 빵보다는 아이스크림 취향이라 했다.

그렇게 좀 걷자는 말과 함께 연인들이 많이 온다는 코스를 왔지만…….

“……비가 내리네요.”

나는 처마 아래서 몰아치는 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낮까지만 해도 맑은 하늘이 어쩌다 이 모양이 됐는지. 헛웃음이 낫다.

놀랍게도 나는 취향은커녕 강우신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

이래 놓고 어떻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 아득해지는데 우신이 맑게 갠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쉽게 안 그칠 것 같은데요?”

“…….”

데이트를 제대로 망친 것 같아 날씨만큼이나 우중충한 내 표정과는 사뭇 다른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게 우신은 아침부터 입꼬리가 내려가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오히려 게이트 클리어에 나서는 게 이보다 더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나는 다음으로 갈 곳을 생각하다 낮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이만 돌아갈까요. 강우신 가이드 말처럼 쉽게 안 그칠 것 같은데.”

“음, 좋습니다.”

그 후 편의점에서 우산을 사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데 강우신이 내 뒤를 졸졸 쫓아왔다.

나는 뒤돌아 입을 열었다.

“강우신 가이드도 버스 탑니까?”

“아니요.”

“데려다주는 거라면 괜찮습니다. 혼자서…….”

“오늘 재워 주세요.”

“네?”

빗소리에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닐까, 귀를 후비는데 우신이 자신이 들고 있던 우산을 접고 내 우산 안으로 들어왔다.

“펜트하우스 압수 수색당하고 집 없거든요, 저.”

“……그럼 6개월간 어디서 잔 건데요.”

내 물음에 우신은 손가락을 접어 가며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한지원 헌터네 집에서 주로 자고 센터 숙식실에서도 자고 아, 길드장님 집에서도 좀 잤습니다.”

“왜…… 왜. 따로 집 안 찾고.”

도무지 이해 못 하겠다는 내 목소리에 우신은 고민 없이 답했다.

“일이 바빠 그렇게 됐지만, 이런 순간을 위해서라 답할래요. 우리 후배님은 애인을 밖에 내다 재울 정도로 매정하진 않을 것 같으니까.”

“……저도 숙소 신세 지고 있어요. 아직.”

“그럼 내가 재워 줄까요?”

이게 무슨 헛소리일까. 방금 집 없다더니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태세 전환하는 게 아까 먹은 식사에 알코올이라도 섞여 있었나 싶었다.

의심만 쌓여 가는 그때 우신이 우산을 살짝 들더니 맞은편에 보이는 건물을 가리켰다.

“어때요. 나 가이딩도 해 줘야 하잖아요.”

그가 가리킨 곳엔 새카만 하늘과 대조되는 환한 호텔이 있었다. 무해한 얼굴로 속삭이는 남자를 보곤 잊고 있던 이 남자의 특징이 하나 떠올랐다.

아, 강우신은 한 번 액셀을 밟으면 브레이크가 고장 났다.

* * *

나는 얼빠진 얼굴로 초고층 창 아래로 보이는 서울의 풍경을 내려다봤다.

호텔 방 안에 들어와서야 자신이 강우신에겐 다분히 무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강우신 가이드 앞에서 가장 많이 웃더라고요.’

다영의 눈에 그렇게 보일 만도 하지. 아니 오히려 지금까지 그 정도로만 보인 게 용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작게 젓는데, 화장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멈췄다.

이윽고 문 열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어깨가 굳었다. 서서히 등 뒤로 우신의 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안 씻어요?”

그 태평한 물음에 나는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고 고개를 돌렸다.

“나까지 씻을 필요가…….”

어느새 바로 내 뒤에 선 우신은 가운 차림에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닦아 내고 있었다.

앉아 있는 탓에 시선을 살짝 들어 올리자 벌어진 가운 사이로 그의 흉부가 노골적으로 보였다.

벌어진 가슴과 보기 좋게 갈라진 복부 근육까지 나도 모르게 시선이 그의 몸 선을 따라 내려갔다. 그 순간 우신의 머리칼을 타고 물방울이 내 어깨 위로 떨어졌다.

놀라서 시선을 도로 올렸다. 언제부터였는지 그의 새카만 눈동자가 날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빤히 쳐다봤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우신이 내 손목을 잡았다.

“싫으면 가운이라도 입어요.”

“…….”

“아무래도 감기 걸릴 수도 있고, 또…….”

“…….”

“지나치게 자극적이니까.”

그렇게 소곤거리며 우신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나는 그제야 내 상의가 비에 젖어 속옷이 비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순식간에 붉어진 얼굴을 하고는 그가 건넨 가운을 대충 걸쳤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 모양이었던 건지.

한 소리 할까 했지만, 묘하게 장난기가 떠오른 눈동자를 보자니 마음이 죽었다.

“……가이딩 필요하다면서요.”

툴툴거리자 우신의 눈매가 휘었다.

“부끄러워하는 거예요?”

“그런 거 아니니까. 시작해요.”

나는 가이드가 아니므로 그가 내게 하는 방식으로는 에너지를 나눠 줄 수 없었다.

못 이기는 척 호텔을 올라오긴 했지만, 당장 그를 도울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었다. 그가 날 도운 것처럼 말이다.

이미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한 상태였다.

누구들 말처럼 강우신이 그동안 얼마나 인내했을까, 마음을 다잡은 나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손을 뻗었다.

“난 잘 모르니까. 강우신 가이드가 하고 싶은 대로 해요.”

그렇게 책임을 떠넘기는데, 그 말이 오히려 강우신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정말 내 마음대로 해도 됩니까?”

“…….”

우신은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내가 뻗은 손을 잡더니 침대 걸터앉은 날 들어 올렸다.

작은 비명이 입 안에서 맴도는데 우신이 그대로 나를 껴안고 침대에 누웠다.

그 찰나의 순간 머릿속으로 별의별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울리지도 않게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됐다는 말을 뱉을 뻔했다.

그러나 우신의 커다란 손이 내 가운 안쪽으로 들어와 허리를 휘감은 게 먼저였다. 이미 늦은 듯했다. 나는 우신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눈을 질끈 감았다.

“…….”

내 예상과 달리 이어지는 동작이 없었다. 사위가 터무니없이 조용했다.

우신의 숨소리만 이마에 닿을 뿐 그의 손은 내 허리를 붙든 채 멈춰 있었다.

그에 이상함을 느끼고 시선을 들어 보니, 우신이 편한 얼굴로 나를 꼭 끌어안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이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런 거였다.

“아, 좋다.”

만족감 어린 말에 나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불쑥 그가 지금까지 무작정 인내한 게 아니라 그것만으로도 만족한 것이었다면, 이라는 가정이 떠올랐다.

나는 다른 생각을 하기도 전에 그의 가슴을 밀치고 일어났다. 내 아래 깔린 우신은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날 쳐다봤다.

“양 헌터?”

“강우신.”

“…….”

“너 혹시 고자야?”

“……네?”

“그게 아니면 혹시 키스 이상으로 생각이 없는 건가?”

울컥하는 마음이 한 번 들자 걷잡을 수 없는 물음표가 생겨났다.

오랜 내 팬이라면서. 날 오랫동안 좋아했다면서.

하필 이런 상황에 왜 그가 침대 위에서 굉장했다며 수군거리던 에스퍼들의 말이 떠오르는 건지.

소문 따위 한 번도 귀담아들은 적 없는데 한 번 신경 쓰고 나니 강우신에 관련된 모든 이야기들이 예민하게 받아들여졌다.

내가 진지한 눈으로 답을 기다리고 있자 놀란 듯 커져 있던 우신의 눈이 서서히 가늘어졌다.

“왜요, 또 잠자리 생각했습니까?”

“윽, 그건…….”

멋쩍어진 내가 그의 가슴을 짚고 있던 손을 떼려 하자 우신이 나를 도로 껴안았다.

숨 막힐 듯 세게 안아 오는 힘에 입 밖에서 저절로 신음이 새어 나갔다.

“요즘 왜 이러실까, 곤란하게.”

“잠깐 강우신 이거 놓고, 말해. 숨…… 숨 막혀.”

“그러고 싶은데 계속 누가 도발하니까 도무지 놓을 자신이 없어지네요. 어떻게 생각해요.”

“그게 무슨.”

“제가 계속 참고 있는 것도 모르는 이 여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에게 파묻히듯이 안겨 있자니, 강우신의 체향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다가왔다.

씻고 나온 탓인지 봄철 꽃나무 아래 들어온 것처럼 생생했다.

그게 내 이성을 서서히 마비시켰다. 끊어질 것 같은 이성에 그를 밀어내려 팔뚝을 힘주어 잡았다.

그의 팔을 잡는 동시에 강우신이 스스로 머릿속의 벽을 허물어뜨리며 자신의 생각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의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생각은 그동안 내 앞에서 한 번도 이빨을 드러낸 적 없는 강우신의 것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상상 속에서 그는 나를 안은 채 욕심껏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 압도적인 상상 속 광경에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그때 우신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내가 말했죠. 내가 선배로 무슨 상상을 했는지 선배가 알면 그런 말 못 할 거라고.”

그리 속삭인 우신이 단단한 몸을 더 밀착했다.

또렷하게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에 조금 전 그의 머릿속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다시 떠올랐다.

저절로 에너지가 쏟아져 나왔다. 그의 팔뚝을 잡은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자 우신의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윽.”

머리로는 서둘러 그와 떨어져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몸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어느덧 완전히 강우신의 몸 위에 올라타 있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내 아래 깔린 우신을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그러니까 왜 날 자극해……. 그런 생각을 왜 보여 줘서는.”

서서히 호흡이 거칠어졌다. 지금껏 그를 한입에 잡아먹고 싶다는 충동을 잘 억눌러 왔다 믿었는데, 내가 잘 누르고 있던 게 아니었다.

강우신이 그 아슬아슬한 선을 잘 지키고 있던 것뿐이었다.

정신을 차리니 눈 깜짝하는 사이 강우신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힘껏 벌어진 가운의 앞자락이 다 풀어진 채 그의 넓은 가슴팍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얼굴로 피가 쏠리는 기분이었다. 참으려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순식간에 피가 고이는데 강우신이 내 아랫입술을 매만졌다.

“그러지 마요. 나도 손가락 하나 대기 어려운 얼굴에 상처 내지 마요.”

“……나 더 이상 못 참아.”

“참을 이유가 뭐 있나요.”

양하나의 몸에 완전히 정착하며 이전의 힘이 전부 녹아들었다. 그러니 껍데기만 다를 뿐 내 힘은 그대로란 소리였다.

과거 나와 가장 높은 매칭률이 나온 가이드가 도망갔던 이유가 떠올랐다. S급 에스퍼와의 접촉 가이딩은 굉장히 폭력적인 편이다.

그 사실을 알 텐데도 강우신은 이성이 날아가기 직전인 나를 눈앞에 두고도 태연했다.

이내 강우신이 내게 입 맞췄다.

부드럽게 감싸 안는 입술과 뜨거운 숨결까지. 그 끝에 피의 씁쓸한 맛이 느껴졌다.

우신은 마치 그게 생명수라도 된 듯 핥아먹었다. 그의 혀에 닿는 부위가 델 듯 뜨거웠다.

한참을 절박하게 핥던 우신이 피가 번진 입술을 떼어 내더니 말을 이었다.

“날 엉망으로 다뤄도 되니, 스스로는 귀하게 여겨요.”

“…….”

“그게 나를 위한 일이에요. 후배님.”

그 말이 마치 어떤 허락이라도 된 것처럼 복잡하던 생각들이 일시에 멎었다.

나는 몸을 맡기듯 강우신의 입술에 도로 입을 맞추었다.

그 직후의 기억은 모두 잘린 듯 흐릿했다. 열정적인 시선과 델 듯 뜨거운 그의 숨소리만을 기억한다.

다시 눈을 떴을 땐 호텔의 통창 너머로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눈이 부신 탓에 선잠에서 깨자 우신이 내 날갯죽지에 입술을 맞췄다.

“더 자요.”

그 말과 함께 따뜻한 손으로 눈을 가려 줬다. 손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빛마저 그의 온기 덕분에 따뜻하게 느껴졌다.

밤은 늘 춥고 외로운 것인 줄 알고 살아오던 지난 밤의 기억들을 오직 한 사람과의 하룻밤이 덮어 줬다.

강우신만 보면 가슴 터질 듯 벅찼던 기분의 이름을 나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강우신.”

내 부름에 우신이 날 쳐다봤다. 나는 시선을 맞추며 씩 웃었다.

“사랑해.”

우신은 잠시 멈칫하더니 따라 웃었다.

“또 말해 줘요.”

“사랑해.”

“또.”

그 단호한 요구에 나는 그의 입술에 소리 나게 입술을 붙였다 뗐다.

“어떤 모습이라도 널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

우신의 눈동자 위로 이채가 돌았다. 그리곤 밝은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요. 나도 사랑해요.”

그 이후로도 강우신은 내가 다시 잠이 들기 전까지 내 귓가에 사랑을 속삭였다.

내가 구했던 어린 소년이 다 자라 나를 구했다.

서로의 마음을 알아 가고, 사소한 취향을 깨우치면서 평생 그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이 모여 삶의 이유가 된다.

나는 이제야 사는 게 더 나은 이유를 말할 수 있었다.

살아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모로 누운 우신의 따뜻한 품속을 파고들며 단잠에 빠졌다.

꿈같은 행복한 현실이 계속 이어졌다.

― <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본편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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