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80화
말이 목에 탁 걸려 나오지 않았다. 텅 비어 있는 몸을 느끼니 당시 그가 얼마만큼 절박했을지 가늠됐다.
그 벼랑 끝으로 우신을 몰아넣은 내가 감히 그에게 무어라 할 수 있을까.
내 목숨을 살려 준 게 바로 그인데.
내가 말없이 고개를 숙이자 우신이 나를 마주 안았다.
“선배.”
우신의 어깨 위로 이마를 기대자, 우신은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통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울어요?”
어깨가 축축한지 그가 내 얼굴을 확인하려는 듯 나를 일으키려 했다. 그에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선배. 날 봐요.”
“…….”
“……시현 선배.”
그럼에도 꿈쩍없자 우신이 내 귓가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놀라 고개를 퍼뜩 들어 올리자 우신이 방긋 웃었다.
“이제야 보네.”
우신이 뿌옇게 보였다. 그 탓에 눈가를 비비려 하자 우신이 내 손목을 잡았다.
“웃으면 안 되는데, 새로운 모습에 자꾸만 웃음이 나요.”
“웃지 마.”
“눈물 닦지 마요. 나 때문에 우는 거면 이것도 내 꺼잖아요.”
우신은 내 눈물 자국 위로 입술을 맞췄다. 간지러운 나머지 어깨를 움츠렸다.
“나 지금 진지해. 너한테 미안할 정도로 내가 이기적이라서. 그래서 눈물이 나. 널 볼 자격이 없는 것만 같아서.”
어울리지 않게 자꾸만 눈물이 났다. 그동안 말라 있던 눈물샘이 아예 터져 버린 듯했다.
내 몸 하나 부서질 때는 멀쩡하던 마음이 우신의 몸에 이상이 생기자 여러 갈래로 찢긴 듯 아팠다.
우신이 엄지로 내 눈물을 훔쳤다.
“아프지 마요. 울지도 말고.”
“…….”
“원래 세상을 지키는 영웅의 전담 가이드는 조금 외롭고 고달픈 법이잖아요?”
우신이 답지 않은 농담을 던지며 나를 바라보는데, 그의 말에 눈이 커졌다. 우신은 그 작은 반응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왜 그래요, 전담 가이드란 말 싫을까요?”
“……그게 문제야? 이 상황에.”
상상치 못한 질문에 되레 화를 내자 우신이 예쁘게 웃어 보였다.
“그럼요. 우리는 당연한 것조차 어렵잖아요. 매칭률이 그렇게 나오고도 선배 가이드로 남아 있으려고 내가 얼마나 노력한 줄 알아요?”
나는 주먹으로 우신의 가슴팍을 쳤다.
“그런 건 네 마음대로 해. 너 말고 다른 가이드 둘 생각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딴생각 말고 넌 네 몸만 생각해. 이렇게 무리하지 말고.”
우신은 가슴팍을 쓸어내리며 아야, 하더니 나를 다시금 끌어안았다.
“이거 꿈 아니죠? 저 기억력 좋아요. 나중에 다른 소리 말아요.”
“아니니까. 이거 놔 봐. 너 몸 상태는 어떤 거야. 그렇게 안이 비어서 괜찮은 거 맞아?”
걱정스럽게 그를 올려다보는데 우신이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몸에는 이상 없어요. 다만 어서 내 역할을 하려면 괜찮아져야 하는데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네요.”
소진된 에너지는 시간이 흐르며 자연히 복구돼야 했다.
그게 이렇게 오랜 시간 고갈돼 있다니 걱정스러움에 그의 손목을 잡았다.
“당장 연구실로 가자. 내가 가서.”
“선배. 난 말이에요. 내가 왜 재각성을 한 걸까. 선배가 없는 동안 수십 번도 생각했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선배가 없는데 내 재각성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의 말에 나는 행동을 멈추고 우신을 올려다봤다.
이상한 생각이라도 하는 게 아닐까 걱정스레 그를 쳐다보는데, 우려스러운 말과는 달리 우신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도 뜨거웠다.
“그런데 그 이유를 그날에서야 알았어요.”
“쓰러진 나한테 가이딩을 하던 그날?”
우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자신의 평생을 갈아 넣어 일군 걸 제 손으로 무너트릴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 거예요. 선배는 그 어려운 걸 해냈고요.”
“……고마워.”
“그만큼 선배는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런 선배이기에 제가 재각성한 건가 봐요.”
우신이 내 손을 꼭 쥐었다.
“선배가 여정 끝에 지쳐 쓰러지려 할 때 내가 선배의 손을 잡을 수 있게 말이에요.”
그리곤 잡은 손에 입을 맞췄다.
“가이딩 하는 순간 알았어요. 아, 이 순간을 위해 내가 재각성한 걸지도 모르겠구나 하고.”
그 진심 어린 말이 그가 내쉰 숨과 함께 내 손에 닿았다.
“그 생각이 들고 나니 재각성해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된 거 있죠.”
우신이 작게 웃었다. 그는 제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무리하게 가이딩 해 놓고는 그 순간 제가 있을 수 있던 걸 다행이라 말했다.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이 바보 같은 남자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느끼는 맹목적인 애정. 그건 피에 새겨진 본능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가이드가 에스퍼에게 퍼붓는 이 뜨거운 애정은 뭘까.
어떤 논문에도 가이드가 에스퍼를 제 목숨 다해 사랑한다는 말은 없다. 그 이유는 가이드의 사랑은 맹목적 본능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이드의 사랑은 제 평생을 함께할 대상에 대한 아주 오랜 고민의 흔적이자 오롯한 선택이었다.
“……강우신.”
“네, 선배.”
“내가 왜 좋아? 이렇게 널 외롭고 아프게만 하는데.”
우신이 씩 웃었다.
“내 눈엔 한없이 멋지고 아름다운데 그걸 자기만 모르고 있길래. 곁에서 계속 알려 줘야겠다 생각했어요.”
우신은 말끝에 작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계속 물어봐 줘요. 그럼 난 평생 답해 줄게요. 제가 선배를 사랑하는 이유를.”
그의 말에 비로소 깨달았다. 내게 지난 12년 동안 가이드가 없던 건 내가 돌연변이 따위여서가 아니었다.
내가 선택한 사랑. 내 사람. 그를 기다려 온 것뿐이었다.
6년을 돌고 돌아 나를 기다려 준 이 남자를 향한 이 들끓는 마음이 사랑이라고 그렇게 믿었다.
나는 내 손에 제 얼굴을 기댄 강우신을 가만히 바라보다 남은 눈물 자국을 지우며 물었다.
“전담 가이드.”
“네?”
“전담 가이드로 되겠어?”
내 말에 우신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나 욕심내도 돼요?”
“네 욕심 정도야 얼마든지.”
“내가 무슨 욕심을 가지고 있을 줄 알고.”
우신이 내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나는 그 귀여운 도발에 맞춰 그의 뺨을 매만졌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오랜만이잖아, 우리.”
그 말과 함께 눈을 감았다. 우신은 마다하지 않고 활짝 웃으며 답했다.
“기꺼이요. 내 사랑.”
곧장 입술이 닿았다. 분명 창문을 닫았는데도 녹음의 청량한 향이 병실 안에 진동했다.
그건 짙은 외로움을 밀어내는 눈부신 빛이었다.
나는 그제야 우신이 어떤 마음으로 그 긴 시간 동안 날 기다렸는지 알 것 같았다. 그 따스함에 녹아들듯 그를 끌어안았다.
* * *
둥그런 원탁에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있었다. 그 중심에 앉은 이필엽은 피로한 낯으로 미간을 눌렀다.
바로 오늘, 예고한 것처럼 앞으로 센터를 이끌 방향에 대한 회의록을 내놓았고 우려대로 날카로운 질문들이 화살이 되어 날아왔다.
한국에서 센터는 에스퍼들의 뿌리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센터가 저지른 죄에 대해 꼬집으면서도 당장 센터가 없을 시 직면할 불안에 술렁였다.
그도 그럴 게 지난 6개월만 해도 게이트 클리어율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퀸백 길드장이 입을 열었다.
“센터의 게이트 클리어율을 흉내라도 내려면 원래 협회가 쓰던 자율제로는 안됩니다.”
그녀의 말에 다른 길드의 수장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기존 센터 규칙을 가져가야 클리어율을 높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럼 과중 업무를 줄이겠다는 말과는 아귀가 안 맞습니다.”
“그렇겠죠. 과중 업무로 기존 규칙이라는 게 돌아가고 있었으니까요.”
이필엽이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대답하자 다들 그걸 아는 사람이 회의록을 그렇게 작성했냐며 수군거렸다.
지금까지 제멋대로 길드를 운영하던 이들이다. 갑자기 타인과 호흡을 맞추려니 탈이 날 수밖에 없었다.
지난 반년간은 어떻게든 맞춰 왔지만 이제 한계점이었다.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네요.”
이필엽은 조금 더 고민해 보자는 말과 함께 회의를 끝냈다.
그대로 센터 내에 세워진 임시 숙소로 돌아왔다. 오델리아의 일은 박이설에게 위임하고 이곳에서 생활한 지도 벌써 반년.
후배의 작전에 발맞추다 보니 제 생각보다 큰일을 맡게 됐다.
역시 너무 큰 직책은 제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한참 늦었다.
당사자 역시 깊은 잠에 빠졌다.
“깨어나기만 하면 한 소리 해야겠군.”
습관처럼 망나니 같은 후배를 떠올리던 이필엽은 잠시 침묵하다 방문을 열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서던 이필엽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카펫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는 천천히 넥타이를 풀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재킷을 소파에 툭 던지는데 어두운 부엌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부엌 조명을 켜자 식탁에 앉은 강우신이 보였다.
이필엽은 익숙한 듯 시계를 풀었다.
“제집처럼 드나드는 짓은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던가.”
“글쎄요. 부려 먹을 땐 친동생처럼 살가우셔서.”
우신이 살며시 웃으며 답하자 필엽은 행동을 멈추고 그를 돌아봤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보네요.”
“그래 보이나요?”
반년간 어떤 꼴이었는지 몰라서 묻는 걸까. 양하나가 입원한 후 내내 차가운 얼굴로 찬바람 쌩쌩 불던 놈이.
이필엽은 오랜만에 보는 그의 미소에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이유야 어떻건 죽상보다야 그편이 낫네요.”
“그렇죠? 아무래도 숨기기 어려울 만큼 좋은 일이 있었거든요.”
그 말과 동시에 등 뒤에서 익숙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뒤를 돌자 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양하나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