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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78)화 (178/183)

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78화

* * *

다시 눈을 떴을 땐 티 테이블이 놓인 작은 방 안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주 익숙한 몸에 들어와 있었다.

곧장 시선을 통창으로 돌렸다. 그곳에 반사된 모습은 성시현이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내 얼굴에 잠시 말을 아꼈다.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이야.”

중얼거리며 한 손을 들어 내 손등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촉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제야 하나에 의해 방아쇠를 당겼던 게 기억났다. 죽어서야 내 몸에 돌아온 건가 싶었다.

이상한 기분이 되어 멍하니 있는데, 건너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비어 있던 의자에 양하나가 앉아 있었다.

나를 보며 살며시 미소 짓는 검은 단발머리의 여자.

우습게도 통창에 비친 내 모습보다 더 익숙한 낯이었다.

그녀를 따라 살그머니 미소 짓자 양하나가 찻주전자를 들고 내 잔에 차를 따랐다.

향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지만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 탓인지 따뜻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운을 뗐다.

“웬 차야.”

내 말에 하나는 제 찻잔에도 마저 차를 따르며 답했다.

“그냥 옛날부터 친구가 생기면 가장하고 싶던 게 이거였어요. 카페 가서 수다 떠는 거.”

“근데 커피가 아니라 웬 차?”

“제가 쓴 건 잘 못 마시거든요.”

그렇게 답하며 하나가 웃었다. 이렇게 보니 웃을 때 눈꼬리가 내려갔다.

나도 저렇게 웃었었나 싶어졌다. 같은 얼굴을 하고도 다른 느낌이었다.

그사이 너무 빤히 쳐다봤는지 양하나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물었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 미안. 아무래도 조금 신기해서.”

“그렇죠?”

하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곤 내려놨다.

“저도 신기해요. 언니랑 이렇게 다시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요.”

그 말에 이 팀장에게서 전해 들은 말이 떠올랐다.

“서초 게이트에서 사고가 있던 그 날. 날 찾아왔었다고.”

“네. 편지를 주고 싶었거든요.”

“무슨 내용이었는지 물어봐도 돼?”

예상치 못한 물음이었는지 하나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사실 언니를 만나고 싶은 핑계로 쓴 편지였어요. 그래서 편지의 내용이 어땠는지 생각나는 건 아니지만.”

“…….”

“결국 하고 싶은 말은 그거였을 거예요. 구해 줘서 고맙다는 말.”

내가 말없이 한 손으로 찻잔을 쥐고 그 둘레를 가만히 매만지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전부 봤죠?”

“뭘?”

“제 과거.”

조심스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그녀가 숨기고 싶어 할 만한 기억들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친구를 사귈 줄 몰라서 남의 생각을 읽고 필요에 의해 연기를 하던 양하나의 모습.

내가 무엇을 떠올리는지 얼굴에 훤히 드러나기라도 한 건지, 하나가 옅게 웃었다.

“생각보다 더 부끄럽긴 하네요.”

“나한테 부끄러울 게 뭐 있어. 누구나 그런 과거가 있는데.”

“글쎄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언니 안에는 없던 것 같은데.”

“……너도 봤구나.”

내가 하나의 몸에서 그녀의 기억을 본 것처럼 그녀 역시 내 몸에 있는 시간 동안 내 기억들을 본 모양이었다.

나는 민망함에 볼을 긁었다.

“피차 민망한 건 같네.”

“이런 말 어떨지 모르겠지만 신기했어요. 제 일도 아닌데 그렇게 몸이 부서져라 최선을 다하는 게.”

“……뭐 일단 돈을 받기도 했고.”

괜히 다른 소리를 하자 하나가 단호하게 일렀다.

“저는 언니의 최후의 날로부터 되돌아가는 식으로 과거를 봤어요.”

“그래? 어땠어.”

“대체로 무감각했어요.”

제법 날카로운 평가에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성시현일 때는 어떤 일이건 감정이 둔화한 사람처럼 반응이 느리곤 했었다.

“물론 과거로 갈수록 사람과 유대감을 쌓은 기억도, 아주 외로웠던 기억들도 있었지만…….”

하나는 말을 하다 말고 나를 쳐다보며 되물었다.

“그러다 시간을 건너 12살의 언니를 만났어요. 그때 언니 마음속에 어떤 감정이 가장 컸을 것 같아요?”

“글쎄, 12살이라.”

내가 각성한 나이였다. 최연소 S급 에스퍼였고 모든 매스컴에서 하루가 멀다고 새 수식어를 달아 주던 때이기도 했다.

나는 가만히 검지로 탁상을 툭툭 치다 답했다.

“잘 기억이 안 나네. 너무 오래돼서.”

내 대답에 하나는 기다렸다는 듯 답을 이야기했다.

“죄책감이었어요.”

“……듣고 보니 알 것 같네.”

내가 각성한 날을 기억하고 싶지 않던 이유도, 내 악몽의 반이 그날인 것도 모두 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내 손등 위에 제 손을 얹으려다 말고 말을 이었다.

“언니는 혼자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죄스러웠던 거죠.”

“그랬던 것 같아.”

무의식중에 나는 그날 그곳에서 죽었다고 여겨 온 것 같다. 인간 성시현은 죽고 에스퍼 성시현이 태어났다고.

그래서 그 목숨은 센터를 위해 쓸 수 있었던 거다. 애초에 내 것이 아니라 생각했기에.

하지만 아주 잘못된 생각이었고 그걸 이제야 알았다.

내가 미묘하게 웃자 하나가 따라 웃었다.

“저는 그 사실에 위로받았어요.”

“……내가 죄책감을 느꼈단 사실에?”

“너무 이기적일까요?”

나는 대답 없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녀의 과거를 보고 마음대로 연민했으니 하나의 생각 역시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내 생각을 들여다본 듯 하나가 웃었다.

“있잖아요. 언니. 제가 게이트 안에서 바위를 맞는 낙상 사고가 있기 전 이곤이 제게 왜 진실을 물어보지 않냐고 물었을 때 기억나요?”

“기억나.”

“그날 그 말이 많이 아파서 돌아와 울긴 했지만 틀린 말은 없었어요. 진실을 듣기가 무서웠거든요.”

그 말과 함께 하나가 내리깐 시선을 맞춰 왔다.

“그런데 그게 이상한 게 아니더라고요. 너무 제멋대로의 해석이지만 언니의 과거가 제게 이렇게 말해 주는 것 같았어요.”

“…….”

“원래 과거는 무겁고 아픈 법이라고. 그러니 피하고 싶은 게 당연하다고. 제 생각이 틀렸을까요?”

도서관에 세워진 성시현의 탄생관. 그 비대한 과거가 에스퍼를 꿈꾸는 이들에게 허황한 사명감을 심어 주는 게 아닐까, 외면해 왔다.

그런데 내 과거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어 그 사람이 평생을 지고 갈 짐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그늘이 된다면…….

기꺼이 나무가 되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생각 끝에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럴 리가, 그렇게 생각해 주면 나야 고맙지.”

하나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 찻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 쪽으로 걸어와 나를 마주 보고 섰다.

“언니, 한 번만 안아 봐도 될까요?”

정중한 물음에 나는 몸을 틀어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얼마든지.”

그러자 곧장 하나는 내게 안기듯이 몸을 붙여 왔다. 나는 가만히 하나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그렇게 얼마간 침묵이 흐르고 하나는 나와 거리를 두고 섰다.

“이만 가 볼게요. 언니랑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하나는 그 말과 함께 방에 난 유일한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 역시 반사적으로 그녀의 뒤를 따르려 했다.

“잠시만 나도 같이……!”

그때 하나가 나를 돌아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언니에겐 남은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 말과 동시에 거짓말처럼 등 뒤에서 누군가 날 끌어당기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오감을 잃은 듯 죽어 있는 공간이었는데, 몸에 익은 청량하고 따뜻한 기운이 내 몸을 문의 반대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리고 나는 이 기분 좋은 바람을 알고 있었다. 하나는 내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마지막 작별 선물이에요. 그날 날 안아 줘서 고마웠어요. 언니.”

“…….”

대답하려 하지만 입술만 뻥긋거리고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나 역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소리 없이 말하는 것인지 입을 벙긋댔다.

하지만 그 메시지는 분명히 와닿았다.

‘이번 생엔 행복해요. 내 몫까지.’

그 말을 끝으로 하나가 문을 열고 나갔다. 곧이어 작고 포근한 방은 빛 속으로 사라졌다.

10. 여명

-센터는 창립 이래 한반도에 출몰하는 게이트의 93% 이상을 클리어해 오던 곳입니다. 센터의 몰락은 국민적으로 큰 쇼크이기도 한데요.

-맞습니다. 에스퍼를 강제 각성하는 에스텔의 출처가 센터로 알려지며 힘의 불균형이 만들어 낸 참극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두 앵커의 말끝에 화면 위로 센터의 모습이 비쳤다. 고층 빌딩은 무너져 내린 탓에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센터를 상징하는 로고는 협회의 파란 로고가 임시로 가리고 있었다.

- 센터의 붕괴 이후 협회가 출범한 지도 벌써 6개월에 접어드는데요. 다각도의 시선이 얽혀 만들어진 단체임으로 앞으로 협회가 이끌어 갈 새로운 센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큽니다.

- 6개월 전 센터 고위 간부 4인 압송과 게이트 클리어, 에스텔 공론화를 주도한 오델리아의 이필엽 에스퍼가 현 주도권을 잡고 있다 알려졌는데요. 내일 그가 앞으로의 협회 운영 방향성에 대해 발표를 할 예정입니다. 그에 대한 정밀 분석 또한 저희 방송통과 함께…….

“여기 와서도 그게 보고 싶냐?”

병원 로비 소파에 기대앉은 지원이 휴대 전화로 방송을 보고 있자 이곤이 핀잔을 줬다.

그 행동에 지원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하지 왜 비아냥이야? 그리고 엄연히 말하는데 내가 형 아니야?”

지원이 이를 갈며 묻자 이곤은 모르는 체하듯 로비를 둘러봤다.

“강우신은.”

“또또 아주 이놈이고 저놈이고 말 놓는 게 습관이지.”

“먼저 병실에 올라간 거야?”

“여기 있어.”

한지원과 이곤이 하고 싶은 말만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 병원 창구 쪽에서 강우신이 걸어왔다.

이곤은 그의 등 뒤의 창구를 보곤 눈을 게슴츠레 떴다.

“입원비는 전부 협회에서 충당하는 거 아니었나?”

“처리될 때까지 시간이 걸려. 지금 거기 복잡하잖아.”

강우신의 간단한 답변에 이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현재 강우신은 민지민을 법정에 세우고, 센터에서 강행시키던 무리한 노동에 대해 증언을 하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수많은 고위급 인사가 쓸려 나갔는데 그중 살아남은 몇 없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그였다.

그러니까 강우신이 현재로선 과거 센터와 지금 새로 출범한 센터를 잇는 가장 바쁜 사람 중 하나란 소리였다.

“여기 와 있어도 돼?”

강우신은 지원이 건넨 커피를 마시며 답했다.

“얼굴만 보고 바로 가야 해. 두 시간 뒤에 내일 있을 발표문 회의가 있어.”

그 말에 이곤은 경악했다. 목 끝까지 잠은 자 가면서 일하는 거냐는 물음이 차올랐지만 그런 질문까지 하기엔 너무 낯간지럽단 생각에 삼켰다.

그나저나 뉴스에 성시현의 몸에 관한 이야기는 쏙 빠져 있었다. 이필엽이 그녀를 배려해 준 것 같았다.

센터가 붕괴된 이후 양하나는 응급실로 실려 왔다. 센터 위에 생겨난 게이트 클리어로 부상자가 속출하는 바람에 그 전쟁통 같은 응급실에서 나흘을 버텼다.

그렇게 양하나는 VIP 병실로 옮겨지고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 눈을 뜨지 못했다.

이곤은 창 너머의 푸른 잎을 바라봤다.

“벌써 날이 덥네.”

이곤의 혼잣말에 강우신은 다 마신 종이컵을 구겨 휴지통에 넣으며 답했다.

“여름이니까.”

지그시 내리깐 시선만큼이나 담담한 어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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