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77화
“이거 앞으로 몇 분 버티는 게 고작이겠는데.”
이곤이 심각해진 목소리로 운을 떼는데 이미 강우신은 하나가 간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이곤도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무슨 속도가 저렇게 빠른지 놀라며 뒤따르고 있는데 강우신이 지난 자리를 보니, 아까까지 굳건했던 이중문이 박살 나 있었다.
무식한 힘이라 생각한 찰나 안에서 절규가 들려왔다.
“성시현!”
분명 강우신의 목소리였다.
이곤은 서둘러 내부로 진입했다. 밖과는 분리된 듯 강력한 에너지가 몸을 짓눌렀다.
올라오는 멀미를 누르며 정면을 살펴보니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이게 뭐야.”
당혹감에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새카만 정복 차림의 경비원은 쓰러져 있고 민지민은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꿈쩍없었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건 강우신이었다.
그의 품 안에 총을 든 양하나가 안겨 있었다. 몸이 축 처진 게 상태가 나빠 보였다.
이곤은 홀린 듯 두 사람 너머의 캡슐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캡슐 안에는 성시현이 입에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강우신.”
“…….”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왜 양하나랑 성시현 헌터가.”
계획과 한참 틀어진 상황에 말도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그때 우신의 품에 안긴 양하나의 몸에서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빛이 꺼지듯 머리칼이 새카맣게 변하고 피부의 채도도 점점 어두워졌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때 곁에서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던 민지민이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영혼이 빠져나가는 거야.”
“지금 성시현 에스퍼의 영혼이 하나 몸에서 빠져나간다는 거예요?”
“그래. 원래도 불안정했을 거야. 겨우 각자의 몸을 차지하며 균형을 맞추고 있었는데…… 한쪽 그릇이 깨졌으니까.”
“그게 무슨.”
이곤은 절망적인 얼굴이 됐다. 그건 다시 말해 두 사람 중 어느 한쪽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말처럼 들렸다.
민지민은 허탈한 듯 시선을 내리깔며 말을 맺었다.
“그래, 어처구니없이 이렇게 끝난 거야. 진짜 별이 진 거지.”
그와 동시에 땅이 울렸다. 들어온 입구 너머로 복도가 형태를 잃고 무너져 가는 게 보였다.
이제 정말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게이트 안도 영향을 받는지 새하얀 공간이 울렁였다.
이곤은 강우신의 팔목을 잡았다.
“일단 나가자. 나가서 생각해.”
산 사람이라도 살아야 했다. 그 일념 하나로 그를 일으키려는데 강우신의 상태가 이상했다.
양하나를 안아 든 뒤부터 좀처럼 꿈쩍하지를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이곤이 사색이 돼서 물었다.
“지금 설마 가이딩을 하는 거야?”
강우신은 필사적으로 빛이 꺼져 가는 양하나의 몸에 제 에너지를 불어넣고 있었다.
그 모습에 얼굴이 저절로 구겨졌다.
“정신 차려, 민지민 헌터 말 못 들었어? 영혼이 빠져나가는 거라고! 가이딩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그를 막무가내로 일으키려 하자 강우신이 이곤을 강하게 밀쳤다.
그리곤 품 안에 양하나를 더 깊이 안았다. 우신의 에너지가 색을 띠며 양하나를 감쌌다.
에스퍼가 아닌 가이드가 에너지를 눈에 보이게 발산한다는 말은 들어 보지도 못했다.
엉덩방아를 찧은 채로 주저앉은 이곤이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자, 강우신이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가이딩 같은 게 아니야.”
“…….”
“나를 봐 달라고 온 힘으로 붙잡는 것뿐이야.”
단순히 허세로 하는 말은 아닌지 온 사방으로 우신의 힘이 방사됐다. 떨어져 있는 제게까지 닿을 정도로 절박한 에너지였다.
우신은 꼭 끌어안은 하나의 뺨에 입을 맞추며 작게 소곤거렸다.
“내가 말했잖아요. 이제 혼자 두지 않을 거라고.”
우신은 품 안의 작은 몸을 놓칠세라 힘주어 안고는 닿는 곳곳에 모두 입을 맞췄다.
힘을 방출함에 따라 몸 안의 에너지가 서서히 비어 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으로 시현의 영혼을 잡아 둘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했다.
“제가 선배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될게요. 그러니까 아직 가지 마요.”
우신은 눈물 젖은 고백 끝에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댔다.
* * *
“여기에 모으면 될까요?”
한지원이 붙잡은 에스퍼들을 한 자리에 묶으며 그렇게 물었다. 소명은 어처구니없는 얼굴이 돼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담당자인 나도 모르는 사이에 능력치가 오른 것 같지?”
양하나 일행이 지하로 향하고, 소명은 1초라도 더 이들을 로비에 붙잡아 두는 걸 목표로 했다.
다시 말해 붙잡아 두는 게 고작일 뿐, 힘에 부치면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겼다.
하지만 놀랍게도 한지원은 소명의 생각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보여 줬다.
“혹시 그 마약이라는 거 그쪽도 손댄 거 아니지?”
소명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묻자 지원은 제자리에서 팔짝 뛰었다.
“무슨 소리예요! 제가 얼마나 성실하게 훈련을……!”
억울함을 토해 내듯 말을 잇는 순간, 묶여 있던 에스퍼들 중 절반이 불시에 쓰러졌다.
단순히 정신을 잃는 것과는 달랐다. 마치 갑자기 전원이 꺼진 로봇처럼 온몸에 힘이 빠져 축 늘어지는 형국이었다.
당황한 지원이 소명을 쳐다봤다. 소명 역시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다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아래에 문제가 생긴 거 같죠.”
그도 그럴 게 쓰러진 이들 모두 에스텔 복용 가능성이 높은 에스퍼들이었다.
한마디로 시현의 에너지를 넘겨받은 이들의 정신이 나갔다는 소리였다.
불길한 예감에 소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인하러 가죠.”
그 순간 로비의 정문을 통해 새하얗게 무장을 한 사람들이 쏟아지듯 들어왔다.
게이트의 입구를 잘못 찾은 게 아닐까, 토끼 눈이 되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내 그들이 입은 방탄조끼에 길드 협회를 상징하는 푸른색 로고가 박혀 있는 것이 눈에 들었다.
“그렇다는 건.”
지원과 소명이 눈을 마주치는 동시에 그 새카만 장정들 사이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저희가 너무 늦은 건 아니죠?”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탓에 단번에 그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자 사내가 얼굴을 가린 복면을 내렸다.
이 팀장이었다.
“처음 맞춰 보는 호흡에 신중하게 움직이게 됐습니다.”
이 팀장이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기관은 기관이 상대해야 한다며 협회를 설득시켜 보겠다고 당차게 말하더니 이렇게 본격적일 줄 몰랐다.
지원이 멍한 얼굴로 신속하게 센터 안으로 들어가는 대원들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 이 팀장이 응답하듯 말을 이었다.
“대부분이 협회에 가입된 길드원들이고 개인으로 일하는 에스퍼들도 참여했습니다. 모두 센터에 반발심이 있던 모양이더라고요.”
소명은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상부층은 이미 비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걸릴 게 많은 사람이니 아마 멀리는 못 갈 것 같습니다. 펜트하우스로 가 보세요.”
이 팀장은 소명의 말을 곧장 무전으로 알리곤 주변을 돌아봤다.
“건물이 불안정해요. 이만 나가야 할 것 같은데, 아직입니까?”
양하나 무리를 찾는 물음이었다. 그의 뜻을 곧장 알아차린 소명이 걸음을 서둘렀다.
“안내할 테니 따라와요.”
소명의 안내로 한지원과 이 팀장, 조이현까지 지하 내부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땅이 흔들렸다.
지원은 불안이 잔뜩 묻어난 목소리로 소명을 불렀다.
“소 대리님. 이거 괜찮은 거 맞아요? 이러다가 건물 무너지겠어요.”
지원의 불안한 음성에 뒤쫓아 오던 조이현이 복면의 마스크 부분을 내리며 비아냥거렸다.
“그럼 다 같이 사이좋게 여기가 묫자리 되는 거고.”
그때 소명이 창고 내부로 들어서더니 부서진 문 너머를 가리켰다.
“여기예요.”
뒤따라온 지원이 안으로 들어서려 하는데 앞서던 소명이 우뚝 멈춰 섰다. 소명의 시선이 어느 한 곳을 향했다.
그에 따라 지원도 고개를 돌렸다. 내다본 긴 복도 위로 이곤이 보였다.
반가움도 잠시 그가 부축하는 사내의 실루엣이 눈에 익었다.
“민지민?”
어째서인지 만신창이가 된 채 넋이 나가 있는 그 남자를 이곤이 데려오고 있었다.
곧이어 뒤에 한사람이 더 보였다.
강우신이었다. 엄청난 기세로 뛰어오는 그의 등 뒤로 축 처져 볼품없이 흔들리는 팔이 보였다.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양하나 헌터, 상처를 입은 듯합니다.”
지원이 겨우 상황을 파악한 그때, 곧장 의문 하나가 피어올랐다.
“저들뿐이라는 건, 성시현 헌터 회수에는 실패한…….”
그의 말을 자르듯 필사적으로 뛰어오는 그들의 등 뒤로 공간이 빠르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 광경에 지원이 크게 소리쳤다.
“더 빨리 뛰어요!”
보다 못한 조이현이 지원의 어깨를 잡았다.
“힘 좀 남았지.”
“네?”
조이현이 한쪽 팔을 뻗으며 말을 이었다.
“신호를 주면 조금이라도 공간을 고정시켜. 무너지는 속도를 줄이게.”
“네!”
“하나, 둘, 셋!”
* * *
윤가경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센터 로비 앞을 이리저리 배회했다.
“뒤로 물러나세요!”
협회에서 나온 길드원들은 센터 앞에 폴리스라인을 치고 몰려든 기자와 사람들을 떨어트렸다.
그 제재 직후 센터 로비 입구가 무너져 내렸다. 거대한 먼지 바람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윤가경은 창백해진 얼굴로 그 너머를 바라봤다.
“아니, 이 인간들은 구해 오겠다면서 왜 같이 묻히는 거야! 이필엽 이 똥개야!”
윤가경이 목 놓아 소리친 그때 먼지 속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보는 눈도 많은데 체면은 지켜 주시죠.”
먼지 구덩이 속에서 기침을 토하며 나온 이 팀장이 말했다.
곧장 그의 등 뒤로 오델리아의 길드원들과 이곤, 강우신 그리고 그의 품 안에 안겨 있는 양하나가 보였다.
윤가경은 곧장 양하나 쪽으로 다가갔다.
“이봐, 강우신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양하나 상태가 왜……!”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우신의 몸이 기울었다. 이곤이 곧장 강우신과 양하나를 받아 들었다.
그 모습에 윤가경은 구급대원을 향해 소리쳤다.
“응급이에요. 서둘러서 병원으로 가야 합니다.”
그녀가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자리를 떠난 사이 센터 건물이 완전히 주저앉았다.
그 위로 새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먼지 구덩이와 어울리지 않은 새하얀 눈이었다.
이곤은 폐허가 된 센터를 뒤로하고 제 팔에 기대 눈을 감은 강우신과 양하나를 얼마간 가만히 바라봤다.
소란 속 세 사람만의 시간이 조용히 내려앉는 눈송이처럼 고요하게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