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74화
나는 숨을 참고 방의 깊은 곳까지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캡슐 안에는 희멀건 물이 가득 차 있었고 동굴에서 보았을 때와 달리 그 안으로 무언가의 형상이 보였다.
그건 언뜻 보아도 사람이었다.
캡슐을 따라 시계 조명을 올리자 그 끝에 창백하게 굳은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캡슐을 손으로 짚었다. 머지않아 그곳에 붙은 이름표를 보고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바로 강원도 도박장 작전을 함께한 주민호였다. 그때 끌려갔던 남자가 센터의 지하에 이런 모습으로 있었다.
순간 목구멍으로 구토감이 밀려왔다.
“욱.”
그걸 참지 못하고 몸을 뒤로 돌리고 토했다. 속을 비워 내고 있는 그때 내가 들어온 문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따돌렸던 에스퍼들이 돌아온 건가 싶어 급히 입가를 닦고 그쪽을 돌아보았다.
“선배?”
문가에는 강우신이 서 있었다. 뛰어왔는지 앞머리가 다 헝클어진 채였다.
그가 서둘러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에요. 괜찮아요?”
나를 걱정하던 우신의 시선이 자연히 내가 등진 캡슐로 향했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온 탓에 빛이 들어와 캡슐 안이 이전보다 더 적나라하게 보였다.
우신 역시 캡슐 내부를 확인하곤 말없이 내 어깨를 감쌌다.
“안쪽에 길을 찾았어요. 다른 곳들과 달리 이중문으로 꼭꼭 숨겨 둔 게 수상해 보여요.”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려는 듯 우신이 날 이끌었다. 나는 군말 없이 그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그때 누군가 문을 가로막았다. 빛을 등져 얼굴에 음영이 졌지만, 테두리를 따라 붉게 빛나는 머리칼이 그의 정체를 알렸다.
나는 입가를 쓸어내리며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유제이.”
내 호명에 한 걸음 더 걸어 나온 남자의 얼굴이 선명히 드러났다.
이제는 완전히 노랗게 변해 버린 안광을 한 유제이였다.
“민지민은 어디 있지.”
“…….”
내 물음에도 유제이는 거친 숨을 깊이 내쉬고 마시길 반복했다.
“에스텔을 복용하지 않았다고 하더니 아예 주입을 받고 있던 모양이지?”
옆에 서 있던 강우신이 날 돌아봤다.
“주입을 받다니요?”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목소리였다. 그의 물음에 나는 흘깃 주민호가 든 캡슐을 바라봤다.
처음 봤을 때부터 눈치챘다가, 캡슐을 더듬는 순간 확실해졌다.
나 역시 에스텔을 주입 받았기에 더 그 감각에 더욱 예민한 걸지도 몰랐다.
난 입술을 짓이기며 답했다.
“내 에너지를 저 희멀건 액체에 희석해서 넣은 모양이야. 아예 절인 거지.”
사람을 에너지에 절일 생각은 누가 한 걸까. 모르긴 몰라도 에스퍼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자의 소행일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짓을 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금 유제이를 돌아봤다.
“시중에 아무렇게나 풀린 에스텔은 함정이야. 진품들은 이렇게 센터 지하 아래서 곱게도 키워 낸 모양이야. 그렇지? 유제이.”
그 산증인인 그에게 물었다. 하지만 유제이는 좀처럼 어떤 말에도 대답하지 않은 채 한 걸음씩 다가왔다.
이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아까 밖에서 마주한 에스퍼들과 같은 짐승의 울음을 닮은 소리뿐이었다.
“으으윽.”
이빨을 얼마나 강하게 짓이기는지 갈리는 소리가 내게까지 들려왔다.
보아하니 어떻게든 이성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는 듯했다.
나는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서둘러 처리할 테니 최대한 내 뒤에서 꼼짝 말아요.”
내 말에 우신은 고갤 끄덕이고 내 뒤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걸 확인하고 잠가 놨던 힘을 풀었다. 시간을 끌지 않기 위해 한 번에 강한 힘을 손에 몰아넣었다.
내 예상대로 힘에 반응한 유제이의 동공이 확장됐다. 끝내 이성이 마비된 듯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들려는 그때 주민호가 들어 있던 캡슐에 금이 가더니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내가 에너지를 발산한 순간, 캡슐 안에 잠들어 있던 그가 깨어난 것이었다. 나는 단번에 공격의 경로를 변경해 달려드는 주민호의 목덜미를 낚아채 멀찍이 날렸다.
그 짧은 사이 내 몸에 손을 댔는지 허리 부분의 옷이 녹아내린 상태였다.
작게 신음을 삼키는데 등 뒤에서 달려든 유제이가 내 목을 졸랐다.
강한 힘에 숨이 턱 막혔다. 벗어나려 유제이에게 거침없이 주먹을 휘둘러 보았지만, 그의 손에서 힘이 빠지지 않았다.
그때 그의 등 너머로 총을 겨누는 강우신이 보였다. 우신은 일말의 주저함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울려 퍼지며 유제이의 등 뒤로 서너 발의 총알이 박혔다.
손아귀 힘이 약해진 틈을 타 나는 그의 복부를 걷어찼다. 그렇게 겨우 그를 떨쳐 내고야 기침을 쏟아 냈다.
“……고마워.”
그리고 곧장 주변을 둘러봤다. 유제이나 주민호 모두 압도적인 치유력으로 빠르게 상처를 회복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멀리서 몰려오는 에스퍼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강우신의 손목을 붙들었다.
“아까 찾았다던 그 문 쪽으로 먼저 가. 처리하고 따라갈 테니까.”
“오는 길을 보니 복도의 벽면에 서서히 금이 가고 있었습니다.”
“뭐?”
“조용하지만 위의 게이트 클리어가 생각처럼 잘 되고 있지 않다는 소리이기도 하죠. 내 말이 무슨 뜻인 줄 알죠?”
우신이 단호한 음성으로 묻는 말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시간이 얼마 없다는 소리겠지.”
하지만 그런 사실과는 별개로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서늘한 감각이 들었다. 뒤를 돌았을 땐 인기척을 감추고 달려든 주민호의 팔이 베어 나간 뒤였다.
그의 뒤로 이곤이 보였다. 새카만 에너지를 두른 이곤은 눈동자를 서늘히 빛내고 있었다.
“왜 안 오나 했더니.”
이곤은 주민호나 유제이의 상태를 보고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나한테 목숨을 빚진 건가.”
이곤은 그 말과 함께 장도의 날을 세웠다.
“가.”
“지금 여기로 몇이나 몰려오는 줄 알고 하는 말이야?”
“그래서? 다 와서 일을 망치겠다고? 네 안일함이 센터를 이렇게 만든 거라며.”
이곤의 모진 말에 우신이 태클을 걸려는데 그가 먼저 꿋꿋이 말을 맺었다.
“그래서 직접 뿌리 뽑아 보겠다며. 그럼 당장 남의 사정보다 눈앞의 걸 보라고, 어쭙잖게 양하나 흉내 내지 말고.”
그의 말에 나는 뒤통수를 한 대 강하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양하나가 되어 얻은 새 삶. 새로운 만남. 본능적으로 눈앞의 목표만 보고, 뭐든지 혼자 해결하려던 과거의 자신을 지우고 있었다.
최대한 누군가에게 기대어 보려고 그랬는데 오히려 그게 발목을 잡았다.
내 눈에 이채가 도는 것을 본 강우신이 하려던 말을 삼키며 조금 미묘한 눈초리를 했다.
내가 그렇게 변해야겠단 생각을 가장 강하게 심어 준 게 바로 그였다.
그 역시 그 사실을 깨달은 듯 잠시 내 손을 잡길 주저하다 조용히 내 목덜미로 손을 뻗었다.
그리곤 옷 안에 숨겨진 목걸이를 매만지며 말했다.
“곧 따라갈 테니. 무리 마세요.”
그가 목걸이에 작게 입 맞추었다.
“당신이 누구든 내 에스퍼란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 말과 함께 그가 날 놔줬다. 나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는 말을 뱉었다.
내 말이 두 사람에게 닿았을지는 모르겠으나, 말을 마친 나는 곧장 우신이 알려 준 문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 나갔다.
그렇게 문 앞에 도착한 나는 이중으로 된 문을 단숨에 부쉈다.
문이 부서지며 생긴 구멍 사이로 들어서자마자 깨달았다. 지하 아주 깊은 곳에 센터 창립자 도고가 박제한 게이트가 있다는 걸.
분명 클리어된 게이트임에도 불구하고 털이 쭈뼛 설 정도로 강력한 에너지가 쏟아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도화지처럼 새하얀 공간, 양복 차림의 사람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걸음을 옮기다 발에 치인 남자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새카만 정복을 입은 경비원들 사이에서 최강혁이 보였다. 얼굴은 뭉개져 있었지만, 가슴께에 명찰이 달려 있었다.
나는 처참한 몰골로 죽은 그를 바라보다 시선을 옮겼다.
자연스럽게 어느 새하얀 캡슐에 눈길이 닿았다. 아까 다른 방에서 본 캡슐과는 다르게 직사각형으로 눕혀 있는 캡슐은 흡사 관을 닮아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깔끔하게 정리된 캡슐 주변으론 노트 몇 권과 꽃병이 있었고, 그 안에는 하얀 국화가 꽂혀 있었다.
나는 이내 캡슐 바깥의 눈에 띄는 새빨간 버튼으로 손을 가져갔다.
짧은 심호흡 뒤 버튼을 누르자,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캡슐이 열렸다.
새하얀 스모그와 함께 안에 곱게 누워 있는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시현.”
그 이름을 나직하게 내뱉었다.
관 안에 있는 이는 성시현이었다. 호스 하나 연결되지 않은 몸은 당장이라도 눈을 뜰 듯 온전했다.
하지만 이내 나는 그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텅 비어 가고 있네.”
하긴 에너지가 남아 있는 게 이상했다. 에스텔부터 캡슐 안의 에스퍼들 그리고 나까지 에너지를 수백 수천 번은 뽑혔을 터였다.
그 사실이 마치 다른 사람의 일처럼 여겨졌다.
그게 참 이상하다고 느끼며 성시현의 몸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뒤통수에 총구가 닿았다.
곧장 나는 행동을 멈췄다. 총을 든 상대는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기다리느라 지쳤잖아요.”
나는 관에서 손을 뗀 다음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았다.
총구가 내 움직임을 따라 움직이더니 이마 쪽에 붙었다. 나는 서늘한 총구를 들이민 그 손의 주인을 바라봤다.
“민지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