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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72)화 (172/183)

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72화

처음에는 선배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고, 그저 곁에 머물 수 있다는 지금 상황에 감사했다.

그런데 사람이란 게 참 간사하게도 익숙해질수록 더 큰 걸 바라게 됐다.

태연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저만 이렇게 안달이 난 건가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자꾸만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러면 밀어 내는 말과는 다르게 솔직한 반응이 뒤따랐다.

“내 사랑, 나의 선배.”

그렇게 속삭이기 무섭게 그녀의 눈빛이 변했다.

욕망에 물든 황금빛 눈동자가 반짝이는 걸 보니 저절로 마른침이 삼켜졌다.

“선배…….”

그 눈동자에 시선을 빼앗긴 채 본능처럼 그녀의 얼굴께로 손을 뻗는데 순간 몸이 멈췄다.

우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능력을 사용한 것이었다.

그 탓에 손가락 하나 꿈쩍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보다도 그녀가 제게 처음으로 능력을 사용했다는 사실에 우신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반응을 지켜보던 하나는 깊은숨을 내쉬고는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까불지 마.”

“…….”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 거니까.”

그녀는 그 말과 함께 고개를 돌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고서야 우신은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우신은 하나가 떠나간 자리를 가만히 바라봤다. 급히 고개를 돌리던 그녀의 얼굴은 분명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얼굴을 떠올리니 분명 거절당한 것임에도 기분이 좋았다.

그녀 역시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말처럼 들려서 말이다.

우신은 저도 모르게 슬며시 웃다가 표정을 굳히며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에 놓인 옥상 한쪽 면에 건축 자재가 엉망으로 쌓여 있었다. 우신이 그곳을 보곤 입을 열었다.

“훔쳐보는 취미가 있는 줄 몰랐네.”

우신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누군가 슬며시 걸어 나왔다. 이곤이었다.

그는 건조한 눈을 한 채 우신을 마주 보고 섰다.

“너야말로 까이고서 잘도 웃네.”

“글쎄, 내 생각은 달라서 말이야.”

그렇게 받아치고 얼굴을 살짝 붉히자 이곤은 질린다는 듯 혀를 차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엄연히 말하면 내가 먼저 올라와 있었어.”

“그럼 당당히 있지 그랬어.”

담배에 불을 붙이던 이곤은 행동을 멈추고 우신을 곁눈질했다. 자신이 숨은 이유를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는 듯한 눈이었다.

우신은 대답 없이 어깨를 한 번 으쓱여 보였다.

“됐다. 당신이랑 실랑이할 생각 없으니 볼일 다 봤으면 내려가.”

우신은 그 말을 무시하듯 이곤의 옆으로 얼마만큼의 간격을 두고 섰다.

이곤이 보란 듯 그를 무시했으나 강우신도 개의치 않고 입을 열었다.

“계속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어.”

“…….”

“민지민 편에 서서 적대적인 척했지만 정작 손 한 번 제대로 못 댔잖아.”

“그건.”

“꼭 자길 봐 달라고 투정하는 어린애처럼.”

건방진 소리에 이곤이 고개를 돌렸다. 웃음기 묻어나는 목소리와 달리 우신은 건조한 낯빛으로 이곤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신의 눈은 꼭 이곤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그의 입술 또한 꽉 다물려 있었으나, 눈빛에 담긴 경고 메시지가 명확했다.

‘건들지 말라고.’

이곤은 그 불쾌한 시선에 헛웃음 지었다.

“짐승도 아니고.”

“……네가 뭘 하던 선배에게 도움만 된다면 상관 안 해. 하지만 조금 전에 본 것처럼 네가 들어올 틈은 없어.”

우신은 살며시 웃으며 아쉽게 됐어, 라고 덧붙였다.

이곤은 언제부터 이 사내가 이렇게 말이 많았나 되짚어 보았다. 센터에서 본 모습과 정반대였다.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모습.

방금만 해도 그랬다. 그는 양하나와 입을 맞추면서 제가 숨어 있던 곳을 쳐다봤었다. 꼭 영역 표시하는 동물처럼.

속이 거북해지는 걸 느낀 이곤이 담배를 짓눌러 끄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누구 앞에서만 그 성격 죽이는 것도 참 용하다.”

그런 말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우신은 유유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 * *

-성시현 헌터의 기일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는데요. 별의 몰락 6주기를 맞아 벌써 센터 앞으로 추모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앵커의 말과 함께 카메라가 센터 정문을 담았다. 그의 말처럼 촛불을 든 행렬들이 이어져 있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얼이 나간 얼굴로 그 화면을 쳐다봤다.

그러자 소명이 다가와 볼륨을 줄였다.

“뭐 좋은 거라고 봐요.”

“왜 이거 아무나 못 하는 경험이잖아, 누가 자기 사망 6주년 행사를 보겠어.”

조이현은 마치 재미난 볼거리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방방 뛰었다. 윤가경이 곧장 그의 머리에 꿀밤을 놨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 팀장이 탁상을 두어 번 두드렸다.

“그럼 마지막으로 작전 마무리하죠.”

그 소리에 하나둘 이 팀장이 선 탁상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오델리아 소속은 센터 출입이 힘듭니다. 무엇보다 할 일도 있고요.”

그의 말에 소명은 날카로운 눈이 돼서 되물었다.

“협회를 찾아갈 거라 그랬던가요?”

“네, 미리 공문은 보내 놨지만, 센터 중심이 흔들려야 진입할 구멍이 생긴다고 하는 걸 보니 저희 작전을 영 못 믿는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그런 놈들 두고 우리끼리 움직여도 괜찮다니까.”

조이현이 구시렁거리자 이 팀장이 예상한 물음이었다는 듯 답했다.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사람은 사람이, 기관은 기관이 상대해야 하는 거니까요.”

센터 진입을 앞두고 협회에게 공문을 보내자고 의견을 낸 게 이 팀장이었다. 센터의 뿌리 깊은 역사와 세력 덕분에 그 외의 에스퍼 기관은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게 현 상황이었다.

겨우 길드전으로 규모를 키우고 있는 곳이 협회 딱 한곳이었는데, 그조차도 센터를 견제하기엔 터무니없이 작았다.

그래도 이 팀장은 분명 도움이 될 거라고 작전을 강행했다.

나는 탁상 위에 펴져 있는 지도를 보곤 센터 중앙 건물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럼 전 복잡한 일은 맡기고 바로 지하로 향하겠습니다.”

“저랑 같이요.”

곧장 강우신도 손가락을 올렸다. 나는 잠시 답 없이 그를 쳐다보다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와 강우신 가이드가 지하로 진입하기까지 로비에서 시선을 끌어 줄 사람이 필요해요.”

오델리아 팀원은 미끼 임무를 수행하기 어려웠다. 중앙 건물은커녕 정문에서 붙잡힐 수도 있었다.

누가 미끼를 해야 하나 고민이 길어지는 가운데, 지원이 손을 들었다.

“그거라면 제가 할게요.”

“한지원 헌터가요?”

“네……. 소 대리님이랑 함께.”

이어진 말에 놀라 소명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소명 역시 놀란 듯 커진 눈으로 지원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원은 그런 그녀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소 대리님이라면 입지가 있기에 탈주자인 저를 데리고 왔다고 하면서 진입하면 그냥 몰아닥치는 것보다 더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예요.”

제 말이 잘리기라도 할까, 지원은 서둘러 생각한 바를 쏟아 냈다. 확실히 일리 있는 제안에 소명을 힐끗 쳐다봤다.

싫다고 단번에 거절할 줄 알았는데 소명은 잠시 입술을 짓이기더니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할게요. 한 헌터랑. 둘이서. 그 미끼 역할을.”

한 단어씩 끊어 말하는 목소리에서 대단한 고뇌가 엿보였다.

이 팀장은 곧장 힘든 결정을 했다며 손뼉을 쳐 주었다.

“그럼 남은 인력은 이곳에서 대기하며…….”

“지하 진입에 합류할게요.”

작전을 정리하던 이 팀장의 말을 자른 건 이곤이었다.

탁상을 둘러싼 이들에게서 두어 걸음 떨어져 있던 이곤은 나를 바라보며 다시금 강조하듯 말했다.

“저도 양하나 헌터랑 함께하겠습니다. 가이드도 함께한다지만 장소는 센터입니다.”

이곤이 그 사실을 강조하자 조이현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물리계 에스퍼가 한 사람 더 따라가 주는 게 도움은 될 테지만.”

말끝을 끌던 조이현이 강우신 쪽을 쳐다봤다. 단단히 심통이 난 얼굴이었다.

“뭘 믿고.”

“원한다면 여기서 내 깊은 생각까지 다 들여다봐도 좋아. 물론 양하나 손으로 직접.”

그 말에 오히려 자극받은 듯 강우신이 이를 아득 씹었다.

“내가 분명 경고…….”

“좋아.”

내 대답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나는 뒤의 말은 이곤이 아닌 우신을 바라보며 이었다.

“괜찮아, 누가 오든 끝은 내가 낼 거니까.”

“끝을 낼 거라니?”

이곤의 물음에 난 모두를 바라보며 답했다.

“이번 잠입의 목적은 내 몸을 탈환하는 것뿐만이 아니야. 난 내가 일군 걸 모두 바로 잡을 생각이야.”

센터는 내 뿌리이자 청춘이며 그 자체로 성시현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것을 무너뜨려야 한다면 그 주체는 나여야만 했다.

그게 지난밤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니 지체할 시간 없어.”

나는 이 팀장에게 말을 이으라는 눈짓을 줬고 그는 곧장 오델리아 멤버들에게 동선을 일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도 조용히 생각을 더듬었다.

지난 사건 이후, 센터의 중심 인사인 민지민이 조용한 게 가장 마음에 걸렸다.

아직도 동굴에서 날 바라보던 민지민의 눈빛이 떠올랐다. 탐욕으로 빛나는 예리한 노란 눈. 그건 성시현을 바라보던 후배 민지민의 것이었다.

욕망을 한번 드러낸 그가 아무 수확도 없이 그대로 물러날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오랫동안 소식은커녕 센터 내부에서 움직임이 없다는 건.

‘내부 분열이 일어났다는 거지.’

“동선 일렀습니다. 그럼 지체할 시간 없으니 지금 바로 움직이지요.”

그 말과 함께 모두 옷을 입는데 순간 건물이 흔들릴 정도로 강력한 폭발음이 들렸다.

그 폭음에 하나같이 자세를 잡고 날을 세웠다. 이 팀장이 곧장 창문으로 가 커튼을 살짝 걷었다.

그 틈 너머로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였다. 센터에서부터 나는 불길이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 속 작게 볼륨을 켜 둔 뉴스 화면이 전환되며 앵커가 목소리를 높였다.

-긴급 속보입니다. 서울 센터 내 게이트가 출현. 다시금 말씀드립니다. 센터 내 게이트…….

속보에 한지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센터 내에 게이트 출현이라니. 지금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죠?”

나는 이 팀장을 따라 창의 커튼을 치며 답했다.

“지독하게도 현실인 모양이야.”

순식간에 센터 위의 하늘이 회색 연기로 뒤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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