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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68)화 (168/183)

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68화

김형도는 길드장님의 부탁이었다고 중얼거리며 조이현의 눈총을 피해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이곤은 문 앞에 서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한시가 급했다. 괜히 신경전에 불이 붙지 않도록 불씨를 밟기 위해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문제는 조력자가 아니에요. 한 가지 더 반드시 알아내야 하는 게 있어요.”

김형도는 이 침묵을 깨려는 듯 과장되게 맞장구쳤다.

“아, 그랬죠. 하나가 내부에 도울 사람이고 나머지 하나가 뭐죠?”

“장소예요.”

“장소?”

“네. 동굴에서 민지민 일행을 보고 확신했어요. 에스텔이 시작된 발화지가 센터라고.”

쉽게 뱉는 듯했지만 이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센터는 성시현의 몸으로 일평생을 받쳐 일군 내 전부이기도 했다.

미련하게도 나 하나로 세상이 살기 좋아질 수 있다면 나를 돌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헌신한 내게 돌아온 건 이런 불편한 진실뿐이었다.

내 말에 윤가경이 팔짱을 끼며 답했다.

“너무 쉽게 무너졌어. 그 동굴. 마치 그날 무너짐이 예정돼 있던 곳처럼.”

동감하는 바였다. 몸싸움이 있긴 했지만, 에스퍼의 에너지를 연구하는 장소가 그렇게 약하다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됐다.

동굴에서 본 연구실이 진짜가 아니고 본 연구실이 따로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곳에 내 몸이 있겠지.

“하나 널 음지에 퍼진 에스텔의 주범으로 밀 생각이었던 거 같아.”

그때 입을 연 건 이곤이었다.

입구에 가만히 서서 나와 윤가경의 말을 듣고 있던 이곤은 천천히 방 안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조이현이 노려보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에스텔의 주범으로 밀다니?”

내가 그렇게 묻자 이곤은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다 답했다.

“연구의 책임자인 부모가 그때 그 사고로 죽고 이례적으로 재각성한 네가 적임자라 생각한 거겠지. 시중에 풀어 둔 에스텔을 만든 주범으로.”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민지민이 내게 에스텔에 대한 조사서나 강원도 소재의 도박장을 쉽게 알려 준 건 모두 그것을 위한 큰 그림이었다.

아귀가 탁탁 맞는다더니.

“그러니까 두 사람 예상처럼 실제 연구실을 따로 있을 거야.”

“그래, 이제부터 그 장소를 찾아야 해. 6년 전 연구를 이어 진행하고 있을 진짜 장소를.”

말끝에 조이현이 기지개를 켰다.

“그게 말이 쉽지. 어떻게 찾는다는 거야. 윤가경의 정보력을 속이면서까지 한영원이란 여자를 가둬 놓은 곳 아니야?”

그 말에 윤가경이 단호하게 말했다.

“지구상 실존하는 장소라면 내가 놓칠 리 없어.”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그만큼 그녀가 운영하는 우체부는 성공률이 99%에 달했다.

“그럼 정말 어디란 말일까요. 지구에 실존하지 않는 공간이란 소린가.”

김형도가 우울한 낯빛으로 그렇게 말하는데 잠자코 듣고 있던 지원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걸리는 곳이 있어요.”

지원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조리 그쪽으로 몰렸다. 시선을 받은 지원은 잠시 당황해서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 서둘러 답했다.

“그게 1군에 있을 무렵 센터에 퍼진 소문이란 소문은 다 듣고 다니던 동기가 있었는데. 그때 도고의 게이트에 대한 소문이 반짝 돌았었어요.”

“센터 설립인에 이름을 올린 그 알몬드 도고?”

윤가경이 흥미를 보이자 지원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센터가 세워지기 전, 센터 설립인들로 구성된 파티가 S급 게이트를 클리어했다고 해요. 직후 게이트를 도고가 박제했고 그 위에 지금의 센터가 세워졌다고.”

“말도 안 돼. 게이트가 있었다면…….”

“모를 리가 없었겠지.”

말꼬리를 잡아챈 건 나였다. 과거에 한참 현장을 다닐 때도 비슷한 소문이 돌았었다.

그때는 당연히 도시 괴담의 일부라 여겼는데 그 말에 불쑥 센터 도서관에서 본 도고의 박제된 컬렉션들의 음각이 떠올랐다.

그중 파여 있던 자리가 말이다.

무겁게 가라앉은 침묵 속 나는 우신과 지원 쪽을 쳐다봤다.

“아까 적임자의 조건이 장기 근속자 중 현재 센터 내에서 그럴싸한 직함이 있고 우리가 협상 가능한 사람이라 했지?”

지원은 우신을 힐끔 쳐다보곤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렇지만 제가 알기로도 그런 사람은.”

“있어.”

“네?”

“접근해 볼 만한 사람이 떠올랐거든.”

내가 입매를 당겨 웃자 우신은 못 말리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이 팀장이 들어왔다. 보기 드물게 환한 얼굴이었다.

영원의 심연에 들어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연구실 위치 찾은 것 같습니다.”

급하게 뛰어온 듯 숨을 고를 틈 없이 터져 나온 말에 방 안에 있던 모두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 말이 꼭 역전을 알리는 신호탄 같았기 때문이다.

* * *

민지민은 얼굴 위로 거친 면포가 씌워진 채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다.

양팔을 엑스 자로 꼰 채 상체에 고정한 모습은 흡사 감옥으로 연행되는 범죄자를 연상케 했다.

스스로도 그 처지가 웃긴지 지민이 면포 아래로 마른 웃음을 뱉는데 그때 그를 끌고 가던 이가 뒤통수를 후려쳤다.

“조용히 해.”

그의 뜻대로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운 지민은 이내 조용히 눈을 감았다.

동굴에서 완전히 선배의 모습으로 탈바꿈하던 양하나를 떠올리면 자꾸만 입 밖으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민지민을 끌고 가던 경비대도 말없이 들썩이는 그의 어깨에, 질린다는 표정을 했다.

지민은 그 익숙한 탄식과 반응이 참으로도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 정장을 입고 아랫것들을 휘두르며 권력 놀이 하는 것도 흥미롭긴 했으나 그때의 즐거움은 정말 찰나일 뿐이었다.

저를 가슴 뛰게 하는 건 역시 그런 게 아니었다.

민지민은 어린 나이에 S급으로 각성한 후 아카데미 기초 학과를 수료하자마자 계약금을 가장 높게 부른 대형 길드로 갔다.

원하는 건 모든 쥘 수 있는 외동으로 태어나 하고 싶은 걸 하며 살았기에 지민은 금방 모든 일에 싫증이 났다.

게이트 클리어는 지독하리만큼 쉬웠다. 그래서였을까, A급 몬스터에 허덕이는 같은 길드 소속의 에스퍼가 눈에 들어왔다.

고작 그거 몇 마리 잡았다고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에 지민은 자신이 몬스터라면 저런 것들은 한 줌에 터트렸을 거라 조소했다.

그런데 생각만 한다는 게 그만 칼을 휘둘러 버렸다. 그대로 그는 중상을 입었다.

그때 그 일을 수습하기 위해 제법 큰 돈을 물어 줬는데.

보상금이 아깝지 않을 만큼 손맛이 끝내줬다. 몬스터를 베는 것보다 같은 사람인 에스퍼를 베는 일이 훨씬 재미있었다.

그때부터 툭하면 거슬린다는 이유로 길드원들을 패고 다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퇴출 명령을 받았다.

마침 시시해질 때쯤이었기에 아쉬움은 없었다. 모든 게 다시 무료해졌다고 생각하던 그때 눈에 들어온 게 성시현이였다.

제가 에스퍼이기 전부터 나라의 정상에 서 있던 여자.

지민은 무기력한 눈을 한 시현이 문득 저와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와 힘을 맞부딪혀 보고 싶었다.

오직 그 감각만이 제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 주리라 믿었다.

그래서 그녀 하나만 보고 센터로 이직을 결정했는데 어쩌기도 전에 성시현이 죽어 버렸다.

고작 가이드 하나 살리려다 죽다니.

그때 지민이 한 생각은 이랬다.

‘아, 시시해. 콱 죽어 버릴까.’

그만큼 사는 게 무료했다. 삶의 균형이 무너지고 무전도 전부 꺼 놓은 채 집에만 틀어박혀 지낸 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 최강혁 감시관이 찾아왔다.

“비밀리에 진행될 프로젝트를 총괄할 에스퍼가 필요한데 그 역할 민지민 헌터가 해 보는 게 어때요.”

어디서 헛수작을 부리나 싶어 짜증이 일던 그때, 최강혁이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그건 새하얀 관을 닮은 캡슐에 잠든 듯 곤히 누워 있는 성시현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지민의 동요에 최강혁은 예상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육체를 찾는 데 성공했으나 아마 깨어나지 못할 겁니다.”

“깨어나지 못할 거라니. 그럼 무슨 소용…….”

“왜 없습니까. 원래부터 한 사람이 가지고 있기에는 말도 안 되는 힘이었죠.”

“그게 무슨 말이야.”

“성시현 헌터와 겨루어 보고 싶었죠? 이 육체로 새로운 인류를 만드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이게 제자리를 찾아가는 일이죠.”

“새 인류?”

다른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면 사이비에 심취한 교주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눈앞에 선 남자는 원한다면 눈으로 직접 확인시켜 주겠다고 답했고.

그곳에서 처음 죽은 듯 고요하게 잠든 성시현과 한영원을 보고 모든 계획의 수레바퀴를 확인했다.

그 두 사람이 있다면 그의 말도 정녕 헛바람이 아니라고 도리어 새로운 바람의 시작이 되리라고.

그게 죽어 가던 불씨에 불을 붙였다.

성시현을 흉내 낸 것들이라도 겨루어 볼 수 있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래서 스스로 센터의 개가 되기로 결심해 그 아래로 들어갔다.

“그게 벌써 6년 전 일인가.”

“뭐?”

민지민을 앞에 두고 떠들던 최강혁이 되물었다.

지민은 면포에 시야가 가로막힌 채 대충 최강혁의 얼굴이 있을 위치로 고개를 옮기며 답했다.

“이 짓거리를 시작한 게 말이야. 벌써 그렇게 됐어. 시간 참 빠르네.”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지민은 한량처럼 콧노래를 불렀다. 그 모습에 최강혁은 들고 있던 철제 파일을 내려 두며 낮게 읊조렸다.

“완전 정신이 나갔군.”

처음 센터에 들어올 때부터 정신 나간 망나니로 업계에 소문이 파다한 놈이었다.

그 미친 개새끼한테 목줄 좀 걸고 사람 구실을 하게 만들었더니 다된 일에 재를 뿌렸다.

양하나에게 에스텔을 주사할 땐 정말이지 눈앞이 샛노래지는 줄 알았다.

그건 치사량이었다. 수많은 실험이 이루어지는 동안 그것의 절반가량을 투약받고 살아남은 이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 아까운 미끼도 버려진다고 생각했는데.

‘실로 놀라운 광경이었지. 감히 성시현이 떠오를 정도로.’

최강혁은 그 생각을 떨치듯 고개를 가볍게 흔들고 탁상을 두어 번 철제 파일로 쳤다.

“이봐, 민 헌터. 자네 말처럼 우리가 벌써 이 일을 벌인 지 6년이 다 돼 가지.”

“…….”

“오랜 실험 끝에 쓸 만한 녀석들을 몇몇 만들어 냈지만 역시 불변의 법칙은 변하지 않더군.”

“좋은 그릇이 필요하다는 사실 말이지.”

“잘 알고 있네.”

아무리 성시현의 에너지를 잘 정제해도 실험체가 되는 에스퍼의 그릇이 작은 이상 그 방대한 에너지를 결코 다 받아 내지 못하고 자멸했다.

그래서 적정량 선에서만 실험을 진행했던 거다.

최강혁이 손가락을 튕기자 양옆에 서 있던 경비원들이 지민의 면포를 벗겼다.

순식간에 환한 빛이 쏟아지는 순간 눈이 멀 듯했다. 이내 지민이 눈을 두어 번 껌뻑였다.

서서히 사물들의 형상이 드러나며 제 앞에 선 최강혁의 뒤로 새하얀 캡슐이 보였다.

면포까지 씌우고 어딜 데려오나 했더니 실험실이었다.

그때 최강혁인 민지민의 뺨을 툭툭 쳤다.

“어딜 봐.”

그의 다른 한 손엔 제가 양하나에게 투약했던 것과 같은 샛노란 색 에스텔 원액이 들어 있었다.

“말 안 듣는 개는 필요 없다는 게 어르신들 결정이야. 그런데 그냥 폐기하기엔 네 스펙이 너무 뛰어나서 말이야.”

“……나한테 주사하시겠다?”

“그래. 누구처럼 너도 운이 좋으면 살아남겠지. 더 큰 힘을 원했잖아? 어쩌면 네겐 희소식이 될지도 모르겠군.”

그 말과 함께 날카로운 주삿바늘이 목덜미를 찔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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