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67화
나는 그제야 술이 조금 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꿀이 떨어질 듯한 우신의 목소리에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취기가 내려가며 바로 코앞에 있는 그의 이목구비가 선명하게 보였다.
빙그레 웃고 있는 미소가 어찌나 천진한지 나까지 부끄러워지는 기분이었다.
급히 고개를 돌리자 내 생각을 들여다본 듯 우신이 입을 열었다.
“왜 그래요?”
“…….”
그 물음에도 쉽사리 입을 열지 않자 우신의 목소리가 조금 절박하게 변했다.
“그러지 말고 날 봐요. 선…….”
이어지던 목소리가 뚝 끊긴 건 그의 입에 선배라는 말이 작게 맴돌고 난 직후였다.
우신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그는 조금 못마땅한 얼굴이 돼서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그를 밀어 낸 게 제법 서운한 건가, 싶어 입을 열려는데 우신이 먼저 말을 이었다.
“선배.”
“……응.”
“후배……?”
“……응?”
골똘히 고민하는 표정으로 제법 생뚱맞은 말을 뱉어 냈다. 그게 무슨 뜻이냐는 얼굴을 하자 우신은 어리숙한 표정을 하곤 답했다.
“제가 뭐라고 부르는 게 좋을까 해서요.”
그제야 원래의 몸이 살아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느꼈을 혼란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상기했다.
가설은 완벽했다. 아마 어딘가에 성시현의 육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 몸에 되돌아가는 게 잘 상상되지 않았다.
그간 투정만 부렸는데 이미 이 몸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
만약 돌아가게 될 상황이 온다면 나는 어떤 마음으로 그 상황을 받아들여야 할까.
그리고 너는 어떤 마음일까.
나는 툇마루 위에 놓인 우신의 손을 잡았다.
“성시현의 모습으로 만난 나도, 하나의 모습으로 만난 나도 나야.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으니.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내 말에 안심이 됐는지 우신은 내 손을 제 입가로 가져가선 손바닥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떨어질 때 닿는 숨결이 간지러워 어깨를 움츠렸다.
“그렇게 답할 줄 알았어요.”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이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우신의 머리칼 아래로 환한 빛이 내려앉았다.
새까만 보석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빨려 들어갈 듯 깊게 눈을 맞추고 있는데 우신이 입을 열었다.
“정말 그렇네요. 어떤 모습이건 선배는 항상 빛이 나니까. 절대 모를 수가 없겠어.”
나야말로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오래도록 나를 잊지 않고 있어 줘서 고맙다고.
입 안에 고인 말을 삼키는데 우신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큰손이 기분 좋아 가만히 있는데 마주 잡은 우신의 손바닥에 새겨진 상처의 촉감이 느껴졌다.
곧바로 손바닥을 펴 보자 비교적 근래에 난 자국이 보였다. 보아하니 손에 안 익은 칼을 쓰다 난 상흔이었다.
내가 설명을 필요로 하는 눈을 하자 우신은 민망한 듯 주먹을 쥐었다.
“이번에 선배 뒤를 쫓으면서 단검 연습해 봤어요. 항상 느낀 거지만 선배 단검 쓰는 모습은 유독 멋있거든요.”
“그럼 손에 맞는 장비로 했어야지.”
그 말과 함께 도로 그의 손바닥을 펴서 상처를 매만지는데 불쑥 상기된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저 걱정하는 거예요?”
나는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질문이냐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당연하지, 넌 내 후배고 가이드고…….”
그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뒷말이 턱 막혀 입을 다물자 우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삼킨 말이 뭔지 더 캐묻고 싶지만 참을게요. 선배가 그 정도 했으면 많이 노력한 거니.”
다 안다는 듯한 태도에 얼굴이 붉어졌다. 우신은 보란 듯 고개를 불쑥 내밀고선 속살거렸다.
“선배는 제 전부에요.”
나는 우신의 가슴께를 밀어 냈다.
“발랑 까져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런 말을 해…….”
“그럼 발랑 까진 후배 힘 좀 줘요. 사흘 내내 선배 병간호했더니 힘이 없어.”
조금 전까지 파릇파릇했던 놈이 큰 몸을 둥글게 말며 기대 왔다.
“아무래도 저도 가이딩이 필요한 거 같은데 어때요.”
살다 살다 가이드에게서 가이딩을 해 달라는 말을 들을 줄이야.
“너 취한 건 아니지?”
“그렇다고 하면 해 줄래요?”
두 눈을 반짝이며 올려다보는데, 꼭 그 시선에 꼭 무슨 힘이라도 숨겨진 건지 도무지 밀어 낼 수 없었다.
혹은 그런 핑계를 대고 싶은지도 몰랐다. 그의 말랑한 입술을 지그시 바라보다 이내 입 맞추려는데.
“이게 누구야!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한 양하나 헌터 아니야.”
한 손에 와인병을 든 조이현이 내게 삿대질했다.
취해서 나를 따라 여기까지 나온 모양이었다. 우신은 얼굴색이 죽어서는 그를 죽일 듯 째려봤다.
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태연하게 굴었다.
그렇게 밤이 저물어 갔다.
* *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미안해요.”
아침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한지원이 내게 다가와 사과했다. 지난밤 잔뜩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르튼 채였다.
한영원이 안정을 되찾고 나니, 그제야 여유가 생긴 듯 동굴에서의 사소한 다툼을 생각해 낸 모양이었다.
나는 민망함에 손을 저었다.
“괜찮아요, 난 털끝 하나 다치지도 않았고…….”
“맞아요. 까불어서 저만 된통 당했죠.”
지원은 제 이곳저곳에 붙은 파스를 보이며 답했다.
“이해해 주세요. 그때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거든요.”
지원이 눈꼬리를 추욱 내리더니 사과를 받아 달라는 의미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는 제 삶을 깎아 가면서까지 여동생을 찾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 당시 상황이 급한 나머지 그를 너무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 점에 대해 도리어 사과해야 하는 건 나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먼저 용서를 구해 올 줄 몰랐다. 그는 진짜 보기보다 더 내면이 단단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저도 섬세하지 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내 말에 지원의 얼굴이 환해지는데 곁에서 가만히 팔짱을 끼고 그 상황을 지켜보던 우신이 내 손을 도로 가져갔다.
아예 대놓고 경계하는 티를 내자 지원은 황당해했고 조이현은 배를 잡고 웃었다.
“소문이 사실이었네. 강우신 가이드가 성시현한테 완전히 꽂힌 미친놈이라더니.”
나는 곧장 입을 가볍게 놀리는 조이현을 째려봤다. 그는 내 시선에 입을 다물곤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지원이 눈치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저도 설명은 들었습니다만 당연히 모르는 척하고 있을게요. 사실 그럴 것도 없이 저는 그 성시현 헌터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기도 하고요. 관심도 없고.”
지원은 민망한지 제 볼을 긁적였다.
“저한테 최고의 헌터는 양 헌터뿐이에요. 그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면 그저 그런 거다, 라고 생각할 뿐이죠.”
그의 대답에 탁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윤가경이 낮게 읊조렸다.
“가만 보면 충실한 개는 이쪽인가.”
그 목소리를 못 들은 듯 지원은 주먹을 꽉 쥐며 눈을 빛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공의 적이 확실해진 이상 주저하고 있을 게 뭐가 있어요. 센터 다 때려 부숩시다.”
투지 하나는 훌륭했지만 그러는 데 준비가 필요했다. 이 팀장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원 헌터에게 동의를 구할 일이 있습니다.”
“동의요?”
한영원에게 사건의 진상을 물어보는 게 가장 정확할 테지만, 당분간 깨어나는 건 어려워 보였다.
그렇다고 그가 깨어날 때까지 손 놓고 기다리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이 팀장이 생각해 낸 방법이 이거였다.
“제가 직접 한영원 헌터의 머릿속을 들여다봤으면 합니다.”
한영원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기에 생각을 들여다보기 위해선 가족인 한지원의 동의가 필요했다.
간략한 설명에 지원은 곧장 진지한 얼굴이 됐다.
이제 막 안정을 취한 그녀였기에 이 팀장이 능력을 쓰는 게 무리가 될 수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면 분명 얻을 수 있는 단서가 있을 것이었기에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의 선택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이내 지원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 팀장을 바라봤다.
“동의하도록 할게요. 영원이도 분명히 이 일을 돕고 싶어 했을 겁니다.”
그의 선택에 감사를 표하듯 이 팀장이 지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럼 저는 곧장 한영원 씨에게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저도 함께……!”
“박이설 헌터와 함께니 걱정하지 마세요. 지원 헌터는 이곳에 힘을 보태 주세요.”
그 말을 남기고 이 팀장은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지원은 걱정스러운 얼굴이 됐다.
나는 주제를 환기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한영원 씨의 생각에만 기댈 게 아니라 저희 또한 준비해야 할 일들이 두 가지 더 있어요.”
에스퍼와 감시과를 이르는 거대한 움직임이 센터 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동굴이 무너지고 주요 증인은 잠든 채였다. 뿌리 단단한 센터를 흔들기 위해서는 그 내부에서 우리와 함께 발맞춰 움직여 줄 사람이 필요했다.
“하나는 조력자가 필요해요. 센터 안에서 저희 일을 도와줄 사람이.”
내 말에 강우신이 아래턱을 매만졌다.
“조력자 역할을 하려면 센터에서 장기 근속한 사람 중 직함이 있으나 권력욕이 없어 상부에 굴복하지 않을 사람 정도의 요건이 있어야겠네.”
“……그게 전부 필요하다고?”
조이현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물었다. 센터 밖에서 일하는 사람이 보기에도 그런 사람이 센터에 직함을 달고 남아 있기 어려운 게 눈에 보이는 모양이었다.
우리 작전을 수행하려면 꼭 필요한 역할이겠으나, 나 역시 강우신이 나열한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을 쉽사리 떠올리지 못했다.
그렇게 침묵이 길어질 때 이 팀장이 나간 문이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건 이곤이었다. 수갑이 풀린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곧장 조이현이 날 선 에너지를 뿜었지만, 곧장 그의 등 뒤에서 김형도가 고개를 내밀었다.
“제, 제가 불러왔어요. 길드장님이 작전 짤 땐 머릿수가 많은 게 최고라고 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