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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65)화 (165/183)

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65화

순탄한 B급 게이트 클리어 막바지, 동굴의 지반이 약하다는 걸 사전에 공지했음에도 멍청하게 날뛰는 놈 때문에 땅이 흔들리다 못해 머리 위로 바위가 떨어졌다.

그걸 가뿐하게 피하고 있는데 뒤에서 비명이 들렸다.

이곤은 어째서인지 불쑥 양하나의 얼굴이 떠올라 급히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곧 저 멀리 가만히 서 있는 양하나가 보였다.

언제부터였는지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그녀와 딱 눈이 마주쳤다.

한 달 만에 마주하는 얼굴이었다.

고작 한 달 사이 그 답답한 앞머리를 잘랐는지 속을 알 수 없는 검정 눈동자가 또렷하게 보였다.

그 때문일까. 하나의 눈이 평소와 달리 단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늘 자기 연민과 슬픔에 주눅 들어 있는 그 얼굴이 아니었다.

그 생각 끝에 하나의 머리 위로 바위가 떨어졌다.

암석과의 충돌 이후 하나는 변했다.

홍 반장에게 대들기는커녕 똑바로 쳐다도 못 보던 애가 핏발 선 눈으로 그 사내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런 태도보다도 이곤을 당혹스럽게 한 건 이런 거였다.

“성시현은 어떻게 됐지?”

자신과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성시현이나 강우신부터 찾는 그녀는 정말 저와의 일 같은 건 새카맣게 잊은 얼굴이었다.

당장 그 두 사람에 비하면 너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

“강우신은 성시현을 뭐라고 생각할까.”

그 태도가 거슬려, 저도 모르게 하나의 질문에 그렇게 답했다.

“좋게 쳐 줘도 배신자 정도 아닐까.”

바위를 맞고 난 뒤 기억이 듬성듬성 나지 않는다는 말에 반신반의했는데, 정말 기억 못 하는 것 같았다.

만약 거짓말이었다면 ‘배신자’라는 말에 표정을 드러냈을 것이다. 그가 알던 양하나가 맞다면.

하지만 그녀의 얼굴 위로 드러난 표정은 단순히 과거의 일을 기억 못 한다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큰 충격을 먹은 게 분명한 얼굴이었는데 이상한 건 그 대상이 저를 향해 있지 않다는 거다.

그럼 도대체 배신자라는 말에 누굴 떠올린 걸까. 내가 아니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러면 그때는 정말 배신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곤은 지독하게 몰려드는 과거의 사념들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었다.

“뭘 고민하는 거야. 이미 그때부터 진짜 양하나가 아니었을 텐데. 다른 사람이 한 말에 상처받을 게 뭐 있어.”

이곤은 혼잣말을 읊조렸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머릿속에 어느 장면들이 떠올랐다.

연구실에서 처음 이곤이 마주한 당당하고 할 말 다 하던 양하나의 모습.

아마 그때 그대로 자랐다면 딱 지금 양하나의 모습 같지 않을까.

이곤은 이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제 모습에 헛웃음을 뱉었다.

‘나는 도대체 양하나랑 뭘 하고 싶은 걸까.’

먼지가 내려앉은 기억을 더듬고 있는 그때, 정면의 문이 열리며 환한 빛줄기가 뻗어 왔다.

저절로 눈살을 찌푸리는데 그 속에서 두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강우신과 양하나. 나란히 선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도 강한 신뢰로 이어진 저 두 사람처럼 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냥 나도 저게 하고 싶었구나 하고, 인정해 버리니 모든 게 허무하게 느껴졌다.

“이곤.”

하나가 방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왔다.

“대화 가능한 상태니.”

“……사흘 만에 일어난 사람이 걱정하는 것보다는 훨씬.”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곤의 얼굴은 창백했다.

하나는 잠시 고민하다 그의 얼굴을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한 걸음 더 내디뎠는데 우신이 하나의 손을 그러잡았다.

“나가서 이야기하죠. 길드장님 불러올 테니.”

우려 섞인 목소리에 하나는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사흘 동안 잠들고 깨고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그 긴 기억의 풍파 속에 휩쓸려 들어갔다.

그늘에 반나절만 있어도 기가 빨렸는데, 이렇게 며칠을 그 비슷한 곳에 들락날락하자 마지막에 눈을 떴을 땐 지독한 허기까지 느꼈다.

우신을 마치 그럴 거라는 걸 알고 있던 사람처럼 막 데워 온 전복죽을 식히고 있었다.

전복죽을 바닥이 보이도록 긁어 먹었다. 곁에서 우신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환하게 물들어 있는 머리칼을 손으로 대충 빗은 다음 말했다.

“이곤과 이야기하고 싶어.”

우신은 상처가 다 아물어 흉터 하나 남지 않은 내 손을 물끄러미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덕분에 우리 세 사람은 다시 마주 앉게 됐다.

조이현과 김형도가 이곤을 못 믿겠다고 항의하는 탓에 그는 여전히 수갑을 낀 채 마주 보고 앉았다.

이필엽과 윤가경만 조금 떨어진 채 벽에 기대서 있었고, 나머지 사람은 모두 방에서 쫓겨났다.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 개의치 않고 이곤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양하나의 기억 속 단면을 통해 오래도록 본 탓인지 그의 얼굴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다만 지금까지와는 그가 다르게 보였다. 나는 엉망인 이곤의 얼굴께를 훑어보다 입을 열었다.

“에스텔.”

“…….”

“넌 그게 민지민의 소행인지 전부 알고 있었어?”

이곤은 마주 앉은 나와 우신 그리고 벽에 기대선 두 사람까지 눈으로 훑어보고서야 답했다.

“몰랐어.”

“그럼 민지민의 무슨 말에 흔들려서 그를 도운…….”

“네가 변했다는 건 나도 처음부터 느끼고 있었어.”

수갑에 묶여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이곤의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 하수도 아래서 한 말 중 거짓은 없어. 네 말투, 작은 습관 같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게 하루아침에 달라졌는데 못 알아보는 게 더 이상하지.”

아직도 하수도 아래서 나누었던 대화가 기억 속에 선명했다. 배신감으로 뜨겁게 물든 눈동자까지도 말이다.

이곤은 거품처럼 부푸는 마음을 진정하려는 듯 심호흡을 했다.

“다만 이질감이 있었을 뿐이지 아예 다른 사람이 됐다는 걸 어떻게 쉽사리 생각해 내겠어.”

보통은 그랬다. 당사자인 내가 생각해도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그럼에도 그가 나를 떠본 건 어떤 확신이 있기 때문일 게 뻔했다.

“그런데 하나 네가 이천 게이트 스타팅 멤버로 떠나게 된 그 날, 민지민이 찾아왔어.”

“민지민이?”

“그리곤 나한테 딱 한마디 말을 흘렸어.”

이곤이 단단한 시선을 맞춰 왔다.

“양하나 네가 진짜가 아니라고.”

“…….”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헛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이천 게이트에 다녀온 후 네가 보이는 행동에 의심이 생겼어. 그래서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일을 벌인 거야. 네가 나와 단둘이 되면…….”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올 거라 생각했어?”

“그래. 하지만 아니었어. 도리어.”

이곤은 뒤의 말을 삼켰지만 말하지 않아도 그가 삼킨 말이 들리는 듯했다. 아마, 이렇게 말하고 싶었겠지.

“되레 확신만 얻었겠지. 내가 진짜가 아니라는.”

방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아까부터 옆에 앉은 우신의 에너지가 살갗에 느껴질 것처럼 따끔했다.

하지만 핵심을 숨기고서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이곤은 내 대답에 긍정하듯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그렇다 한들 그게 네가 민지민의 일을 도울 이유가 되지는…….”

“물론 되지 않지.”

이곤은 알고 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게 끝이 아닐 것이다.

민지민이 흘린 말이 이곤이 날 의심하는 시발점이 될 수는 있어도 그를 움직이게 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럼 역시 그놈이 무어라 더…….”

이곤은 그런 내 생각에 긍정하듯 비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 민지민은 너를 원래대로 돌려놓을 방법을 안다고 말했어.”

“원래대로 돌아갈 방법?”

이곤의 입 밖으로 나온 대답은 완전히 상상 밖의 것이었다.

그를 데리고 오며 기대한 정보는 민지민이 원하는 것 정도였지 이런 대답은 생각지도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는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내용이었다.

혼란하게 부딪혀 오는 생각에 감정이 고조되는 순간 옆자리에 있던 강우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곤의 머리를 한 손으로 짓눌렀다.

이곤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대로 탁상에 머리를 박고 꿈쩍을 하지 않았다.

내가 놀라 그를 쳐다보자, 강우신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만일 헛소리라면 이 자리에서 죽이겠어.”

농담 따위가 아닌 진심으로 가득 찬 목소리였지만 이곤 역시 차분한 음성으로 답할 뿐이다.

“그 이상은 몰라. 그 작은 가능성을 믿고 그 아래서 일한 거니까. 다만 결코 이런 상황이 돼서까지 내 목숨 하나 지켜 보겠다고 거짓을 구걸할 정도는 아니야.”

“…….”

팽팽한 신경전에 숨이 조여 오는 그때 누군가 문을 열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고 거긴 상기된 얼굴의 박이설이 서 있었다.

그녀는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단 사실에 잠시 주저하듯 눈을 굴리며 방의 분위기를 살피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야기 중에 죄송하지만, 한영원 씨의 상태가 나쁩니다.”

그의 말에 벽에 기대서 있던 이 팀장은 강우신의 어깨를 가볍게 그러쥐었다.

“이곤 헌터에게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자고.”

그리곤 박이설을 따라 방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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