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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64)화 (164/183)

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64화

변한 건 겉모습만이 아니었다. 활기찬 웃음도 자신감 넘치던 말투도 모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 모든 게 자신과 함께 트라우마라는 말에 삼켜졌다.

이곤은 하나를 만난 직후 더 이상 매일같이 꾸던 악몽을 꾸지 않게 됐다.

과거를 전부 잊은 하나를 보고 있자니 그동안 자신을 힘들게 한 분노와 외로움이 모두 부질없이 느껴졌다.

지독한 허무감만이 이곤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곤은 고민 끝에 연구실 시절 그녀의 부모이자 연구진이 찍어 준 사진 한 장을 가지고 그녀를 찾아갔다.

당시 이곤의 삶의 의지를 끌어 올려 보겠다고 사복까지 입히고 나란히 찍게 한 사진.

버리지도 못한 채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 둔 걸 꺼내 양하나에게 건넸다.

그러면서 이곤은 지난 밤 수십 번 연습한 대로 웃어 보였다.

“하나야, 당장 전부 기억하지 않아도 돼. 기억날 때까지 내가 옆에 있어 줄 테니.”

처음 심정이 어떻다 한들 하나와 함께하는 센터 생활이 혼자일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나았다.

게이트 중독 현상도 나아지고 얼굴이 환해졌다는 말을 많이 듣게 됐다. 그래서 하나가 2군에 올라왔을 때, 이곤 역시 1군을 반납하고 자진해 2군으로 내려왔다.

그렇게 1년 남짓 하나의 옆에 붙어 있으니 센터 사람들 모두 알 만한 사이가 됐다.

‘양하나의 가면 친구.’

뒤에서 들려오는 말 따위 신경 안 쓴 지 오래됐지만 가면 친구라는 말을 들었을 땐 의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냥 친구도 아니고 왜 가면이라는 수식을 붙였는지.

그래서 헌터 커뮤니티에 도는 게시글에 댓글을 달아 물었고 상상도 못 한 답변을 들었다.

-척 보면 몰라? 이곤 걔 양하나라면 껌뻑 죽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왕따 당하는 건 모른 척하잖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이곤은 그 댓글을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일 정도로 그렇게 티 나게 행동하고 있었구나, 하고 말이다.

모두의 짐작처럼 이곤은 양하나가 2군에서 지독한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현재의 양하나에겐 이제 과거의 자신이 동경했던 모습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니 오히려 그녀가 똑바로 직시됐다.

아닌 척하면서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보는 여자. 그런 주제에 사람 사귀는 법도 마음을 얻는 방법도 모르는 여자.

양하나가 상대의 호의를 얻기 위해 하는 행동은 6년 전 그대로였다.

‘생각을 읽는 것.’

낙하산으로 센터에 들어왔다는 소문이 있던 그녀가 알고 보니 그럴싸한 뒷배도 없고 능력도 없으며 음침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게 드러나자 괴롭힘은 노골적으로 번졌다.

이곤은 2군에 들어와 등 뒤에 ‘낙하산’이라는 포스트잇을 붙이고 다니는 양하나를 보곤 이렇게 생각했다.

‘당연한 결과 아닌가?’

이곤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읊조리곤 깨달았다.

자신이 현재의 양하나의 모습을 보고 고소해하고 있다고, 연구실에서 가장 자유롭던 파랑새가 연구실이라는 새장을 나가자 볼품없는 잡새로 추락하는 게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통쾌했다.

자신이 끔찍한 시간을 견뎌 왔으니 양하나도 그 정도는 견뎌야 하지 않을까.

“아니지, 하나는 나보다 낫지. 지금 하나 옆에는 내가 있잖아. 하나는 그때 내 옆에 없었는데. 이제 하나도 조금은 내 마음을 알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스스로가 만든 도취감에 잠기듯 깊은 심연에 들어갈 때, 이곤은 이내 그렇게 그녀를 둔 걸 후회하게 됐다.

* * *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머리가 크고 나서 본 하나는 생각보다 더 형편없었다.

“왜 나한테만 이렇게 불행한 일이 생기는지 모르겠어.”

지금까지 용케도 아무런 투정 없이 버틴다고 생각했는데, 표정이 안 좋아 보인다는 이곤의 한마디 말이 하나의 무언가를 건드린 듯 그녀는 목 놓아 울었다.

“내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하나는 왜 다른 사람은 실수해도 쉽게 용서받는데 자신만 이렇게 고통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말했다.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고, 왜 제게만 이런 지옥 같은 삶이 이어지는지.

그 말에 이곤의 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지금껏 제법 그녀와 문제없이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결코 우리 사이에 있던 일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를 악물고 모른 척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르겠다고?”

하나의 마지막 말을 계속 곱씹었다.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더 정확히는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으니 어쩌면 모르겠다는 그녀의 말도 맞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 이유가 뭐든 간에 지독한 자기 연민을 들어 주고 있자니, 속이 뒤틀리다 못해 토기가 올라왔다.

이곤은 그대로 화장실로 직행해 함께 먹은 밥을 다 게워 내야 했다.

얼마간 더 이상 나올 게 없는 빈속으로 토해 내던 이곤이 화장실에서 돌아오자 양하나는 제 분을 못 이겨 울다 지쳐 잠들어 있었다.

이곤은 언제 울었냐는 듯 평온하게 잠든 하나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허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전하네, 양하나. 지밖에 모르는 거.”

이곤은 반쯤 잠긴 목소리로 그렇게 읊조렸다. 이곤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선잠이 들었던 양하나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체한 거야?”

“……눈치 없는 것도 여전하고.”

“뭐?”

이곤은 서늘한 얼굴로 하나를 내려다봤다. 그 시선이 평소와는 사뭇 다르다는 걸 느낀 하나가 시선을 돌렸다.

“내가 너무 내 얘기만 했지. 너 피곤할 텐데. 나 먼저 갈게.”

짐을 주워 일어나는 하나는 미련 없이 뒤돌았다.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아마 아무도 알려 주지 않으면 저 애는 그 끔찍한 일을 평생 모르고 살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곤은 돌아가려는 하나의 손목을 낚아챘다. 놀란 하나가 반사적으로 힘을 썼지만 이곤에게는 통할 리 만무했다.

지금까지는 하나가 제 속마음을 확인하려 들 때마다 이곤은 일부러 벽을 허물어 줬다.

그녀에게 보여 준 건 제가 만든 가짜 마음들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곤의 어떤 마음도 읽을 수 없자 하나의 얼굴 위로 짙은 당혹감이 서렸다.

“하나야.”

“……어, 어. 곤아.”

“왜 안 물어봐?”

“뭐, 뭐를.”

이곤은 하나를 다시 만났던 날처럼 누구보다 상냥하게 웃어 줬다.

“연구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이야.”

그의 말에 하나의 입술이 말라붙었다.

이곤이 사진을 건네준 그 날, 하나는 이곤이 저와 같은 연구실 출신의 생존자라는 걸 알았다.

저와는 다르게 그날의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그럼에도 하나는 결코 그날의 일에 대해 이곤에게 묻지 않았다.

이곤은 한발 가깝게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그거 정말 기억 안 나는 게 맞을까? 너 사실 모른 척하는 거 아니야?”

“…….”

“아니면 필사적으로 모르고 싶어하는 거든가.”

이곤이 다가선 만큼 하나가 뒷걸음질 쳤다.

“너도 무서운 거잖아. 모를 때는 연민할 수 있겠지만, 알고도 스스로를 지킬 자신이 없는 거잖아.”

“이러지만, 곤아. 무서워.”

하나는 진심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지만, 더 이상 이곤의 눈에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곤의 눈썹이 휘어졌다. 기묘한 미소였다.

“눈치 없는 너치고는 제법 똑똑한 판단이야.”

“우리 친구잖아…….”

처연할 정도로 목울대가 떨리는 하나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다만 그게 이곤의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을 잘라 버렸다.

“맞아, 친구지.”

“…….”

“그리고 넌 연구실에 불이 난 그날 친구를 버리고 혼자 빠져나가 놓고, 내 안부를 찾을 생각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 네 두려움에만 휩싸여서 말이야.”

분명 눈이 마주쳤었다. 하나는 그날 자신을 봤었다.

그럼에도 그곳에 자신을 두고 혼자 살겠다고 나간 거였다. 제가 그곳에서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알겠어? 하나 너는 내게 배신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 * *

그 일 이후 하나는 이곤을 노골적으로 피했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곤은 평소처럼 얼굴에 철판이라도 깔고 찾아가 볼까 생각도 해 봤지만 내키지 않았다.

그런 이곤의 속도 모르는 2군 소속의 헌터들은 찾아와 안 해도 될 말을 붙여 왔다.

“양하나 껌딱지 씨 오늘은 걔랑 밥 안 먹냐?”

죽여 버린다는 듯 쳐다보자 더 이상 함부로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지나 한 달 가깝게 하나를 보지 못하게 됐다.

우연히라도 한 번은 마주칠 줄 알았더니, 그쯤 되니 눈치 없는 양하나가 자신을 피해 다니는구나 싶었다.

그건 그것대로 기분이 썩 좋지 못하다 여길 때쯤 한 달 만에 그녀를 다시 보게 된 곳은 같은 게이트에 배정받게 되면서였다.

“B급 게이트 출몰, 이곤 헌터 즉시 현장 출동 바랍니다.”

그 말과 함께 현장 후발조에 올라온 하나의 이름을 확인했다.

가이딩을 핑계로 넘기려 했는데, 그 이름을 보고 마음을 돌려먹었다.

한 달쯤이면 충분히 그녀의 마음이 누그러질 때가 됐다. 그러니 대충 사과를 하고 평소처럼 지내자고 할 생각이었다.

“그래, 그러면 된 거야.”

그렇게 모든 게 자신의 생각대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날 동굴에서 양하나가 떨어지는 바위를 맞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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