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63화
“양 헌터의 몸 상태라면 저도 전해 듣고 있습니다. 제가 묻는 건 강우신 가이드 쪽입니다.”
우신은 의외라는 표정을 했다가 이내 표정을 지우듯 정면을 바라보며 답했다.
“뭐, 괜찮습니다. 모든 준비를 다 해 놔 주셔서.”
딱 생각한 정도의 답이 돌아왔다. 그게 그답다는 생각에 남모르게 웃었다.
이필엽이 경주에 있는 사옥으로 갈 수 있는 준비를 모두 해 둔 것은 하나가 마약팀 작전에 윤가경과 조이현을 용병으로 초청한 직후였다.
윤가경은 에스텔의 배후에 한영원이 있음을 확신했다.
이필엽은 윤가경을 스카우트했을 때부터 그녀가 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기로 약속했을뿐더러 에스텔에 대해서는 이필엽 본인 역시 관심이 있었다.
그는 이 바닥에서 길드장이란 직함으로 머물며 별의별 에스퍼들을 목격해 왔다.
특히 이천 게이트 이후 오델리아 길드의 규모가 커지며 우주를 비롯해 입사 지원서를 넣은 에스퍼들이 많았다.
그러나 어쩐지 하나같이 석연치 않은 놈들뿐이었다.
제출한 등급은 B~C인데 앞에서 뿜어내는 에너지들은 묘한 기시감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이천 게이트 직후 지원자를 받지 않겠다고 공표한 것이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찝찝한 기시감 정도에 불과했으나, 하나가 들고 온 신종 마약 에스텔을 봤을 때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에스텔을 직접 본 순간 기시감이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지 이필엽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에스퍼에게 에너지는 타고난 지문 같은 것이다. 지문이 똑같은 사람은 없다. 그처럼 동일한 에너지를 가진 에스퍼가 존재할 리 없었다.
그럼에도 에스텔에서 느껴지는 에너지는 자신이 잘 아는 오랜 후배 성시현의 것이었다.
그래서였다. 그 이유만으로도 그가 이후를 준비할 이유는 충분했다.
‘다만 양하나가 아예 성시현 같은 모습으로 돌아올 줄은 예상도 못 했지.’
환한 금발이 된 채 실려 온 하나를 봤을 때는 죽은 사람이 6년 만에 환생할 수 있는지를 의심했다.
겉모습뿐만이 아니었다.
이천 게이트에서 에너지를 쓸 때부터 묘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이제는 완전 성시현 본인이라 해도 믿을 만한 에너지를 두르고 있었다.
순식간에 증폭되는 의혹에 이필엽은 경주 사옥으로 와서 관련 논문들을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모두 어불성설에 불과해 덮어 버렸다.
어차피 하나가 정신을 차리면 본인에게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만약 하나의 입에서 자신이 생각한 그런 대답이 나온다면 가장 영향받을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제 옆에 있는 이놈이 아닐까.
이필엽은 그 생각을 갈무리하며 우신을 가만히 바라봤다.
자신이 눈치챈 걸 그가 놓쳤을 리도 없는데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얼굴이었다.
강우신은 이필엽의 시선을 느끼고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어떻습니까?”
“뭐가 말이죠?”
우신은 묘한 얼굴로 덧붙여 답했다.
“……이곤 헌터 말입니다.”
9. 종착지
이곤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사위는 여전히 어두웠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때쯤이야 작은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는 램프 등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은은한 빛이 보였다.
좁은 방 안에는 그 테이블과 램프, 제 몸에 덮인 담요가 전부였다. 이곤은 맨바닥에 누워 있었다.
분명 앉아 있었는데 잠들면서 쓰러진 모양이었다. 몸을 덮고 있는 담요를 치우며 상체를 일으키는데 양 손목과 발목을 결박한 수갑이 부딪히며 듣기 싫은 쇳소리를 냈다.
그제야 제 상황이 다시 상기됐다.
“갇힌 지 얼마나 됐지.”
목소리가 갈라지며 소리가 났다.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혼란스러웠다.
민지민의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고는 생각했었다.
원래도 제정신 아닌 것처럼 행동하던 남자이긴 했으나 하나가 마약반에 들어오면서부터 좀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작전을 실행하는 중에도 자기 수족처럼 부리던 유제이나 자신에게 숨기는 게 있는 눈치더니 동굴 안에서는 모든 게 파국에 치달았다.
에스텔에 감화된 에스퍼들과 한지원의 여동생으로 보이는 에스퍼를 보기 전까지, 맹세하건대 이곤은 민지민의 속셈을 상상도 못 했다.
뭐가 됐든 그 역시 센터의 간판이 되는 헌터였으니까.
하지만 끝내 민지민은 하나에게 에스텔의 농축액을 주사했다.
그 끝에 하나의 밤하늘처럼 새카만 머리칼이 노랗게 물들었다.
다시 눈 뜬 하나는 자신이 완전히 모르는 사람의 얼굴이 돼 있었다.
그 때문에 정신도 못 차리고 끌려왔다.
차에서 정신을 잃은 하나를 봤을 때부터 무엇을 위해 민지민의 혀에 놀아났는지 더 이상 알 수 없는 상태로 전락했다.
그래서 오델리아의 경주 사옥에 도착한 직후 길드원들끼리 이곤을 독방에 가둘지 말지 거수투표를 할 때, 그는 자진해서 수갑을 차고 이 방 안에 들어왔다.
그 후로 벌써 사흘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이곤은 언제 두고 갔는지 모를, 문 앞에 놓인 식판을 보고는 눈을 천천히 끔뻑였다.
허기가 졌기에 일단 일어나 식판을 들고 돌아왔다. 그렇게 말없이 숟가락질하는데, 맨바닥에 앉아 배식을 받는 자신의 모습을 되새기자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하나를 처음 만나 헤어지게 된 연구실에서의 일 말이다.
그때는 하나와 연구진을 빼고는 모두가 이것보다 못한 식사를 했고 이것보다 못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니 수갑이 채워진 채 독방에 가둬지는 상황 정도는 이곤에게는 큰일이 아니었다.
물론 불편한 구석도 있었다. 하나의 상태가 궁금해진 탓이었다. 그녀가 무사하다는 말이 듣고 싶었다.
오직 그 말만이 이 불안한 마음을 눌러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이곤은 실험에 의해 인공 각성한 에스퍼였다.
다만 처음 인공 각성했을 때의 능력치는 C급인 데다 발전 가능성이 거의 0%에 가까웠다.
이곤뿐만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인공 각성한 아이들 대부분이 실험 중에 죽거나 각성에 성공하더라도 이곤처럼 낮은 능력치를 얻을 뿐이었다.
그 때문에 연구진들은 실패한 실험이라고 낙인찍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곤의 힘은 하나를 만나고 서서히 안정을 취하며 몰라보게 커졌다.
대부분의 에스퍼는 한 번 각성한 등급이 천장이 되었다. 훈련을 하더라도 그 이상의 성과를 보기 힘들었지만, 이곤은 달랐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이곤에게는 연구실의 보안을 어그러트리고 그곳을 빠져나갈 만한 힘이 생겼다.
그럼에도 그곳에 남아 있던 건 명백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는데 게이트 브레이크로 연구실에 불이 난 날, 그 이유는 재가 되어 사라졌다.
이곤은 하나가 저를 두고 연구실을 빠져나간 직후 문을 부숴 버렸다.
그 덕에 저와 같은 층을 쓰던 에스퍼들은 목숨을 건지는 데 성공했다.
몇 년 만에 맨땅을 밟은 아이들 몇몇은 울며불며 서둘러 도망치기 바빴다. 정작 이곤은 선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하나를 찾았다.
혹여라도 자신을 기억해 낸 그녀가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이곤과 아이들을 가장 먼저 발견해 낸 건 센터 소속의 에스퍼들이었다.
이곤은 그길로 아카데미를 수료하고 센터에 입사했다.
갈 곳 없던 그에게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센터에서 보게 된 에스퍼들은 이곤의 기대보다도 더 형편없는 존재들이었다.
이곤은 그 사실에 처음에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은 피를 깎는 고통 끝에 각성한 반면 그곳의 에스퍼들은 노력 하나 없이 쉽게 타고난 능력으로 생명을 연장하고 있었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이곤은 억울해졌고 지독하게 외로워졌다. 그런 감정이 일 때마다 게이트 안으로 향했다.
그 덕분에 아주 빠르게 업을 달성하며 1군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1군에 올라 이전과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는 평화로운 생활을 안위하고 있던 때였다.
자신의 평화로운 일상을 파괴하듯 센터에 양하나가 나타났다.
12살 때의 모습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죽은 눈을 한 19살의 양하나가 말이다.
그녀는 자신이 불면의 밤을 수면제를 먹으면서까지 떨쳐 내던 모습과는 지독하리만큼 달랐다.
그래서 이곤은 처음에 그녀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생기 없는 새카만 눈은 바닥만 보고 있었고, 그마저도 긴 앞 머리카락이 가리고 있었다.
그 우중충한 몰골이 눈에 들어온 게 신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유령 같은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을 때, 이곤은 학습된 듯 행동을 멈췄다.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무려 6년 만이었다. 자신 역시 6년간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가장 먼저 키가 자랐고 몸이 커졌다.
이목구비도 더 뚜렷해져 스스로 보아도 과거 사진과 지금 모습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 역시 자신을 못 알아볼 수 있다고, 6년은 그러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하나를 알아보고도 어떤 말도 걸 수 없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하나 역시 자신을 보고 가면 같던 표정을 바꾸었다.
이곤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녀의 눈빛에 이곤은 팔의 털이 쭈뼛 서는 듯했다.
연구실을 미련 없이 빠져나가던 지난날의 뒷모습처럼 자신 따위 하얗게 잊어버렸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나의 표정은 그 예상을 완전히 박살 냈다.
그 사실이 주는 엄청난 고양감에 취해 이곤은 먼저 하나에게 다가갔다.
“하나야.”
부드럽게 자신을 부르는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하나의 입술이 달싹였다.
“이곤…….”
모습과 달리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고요했다. 이곤은 반사적으로 환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어디…….”
하지만 반가운 마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맞니? 연구실 출신의…….”
“뭐?”
하나는 곤란한 듯 숨을 골랐다.
“내가 연구실에서의 기억이 거의 없어.”
“…….”
“의사 선생님한테 듣기로는 트라우마로 인한 기억 상실이라는데…….”
하나가 주저리주저리 말을 더 늘어놨지만, 뒷말은 이곤에게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