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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62)화 (162/183)

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62화

성시현은 하나를 확인하고는 어딘가로 무전을 했다. 그러곤 천천히 하나에게로 다가왔다.

“아가야, 너 혼자니.”

시현은 메뉴얼대로 넋이 나간 하나에게조차 제 소개를 하는 걸 잊지 않았다. 소개를 마친 뒤, 곧장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져 있는 그녀를 손쉽게 안아 들었다.

하나는 뭐라고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오물거렸지만, 생각처럼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듯했다.

그녀를 한쪽 팔로 가뿐히 안아 든 시현은 하나의 상태를 꼼꼼히 살폈다.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이네, 라고 혼잣말처럼 읊조린 시현의 말이 자포자기한 하나의 정신을 깨웠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니.”

“…….”

하나는 다른 이들의 행방을 묻는 게 꼭 저를 탓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시현의 품 안에 안긴 채 건너본 숲 너머의 연구실이 시뻘건 불길에 휩쓸려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금껏 어떻게든 곁에 남고 싶어 아등바등하던 것들이 재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에 허무감을 느끼기보다 다른 생각이 먼저 들었다.

자신을 안은 천사 같은 사람의 품 안이 무척 따뜻하다는 것. 지금껏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누구 한 명 자신을 안아 주지 않았는데 말이다.

처음 느끼는 사람의 품이 너무나도 아늑해 하나는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시현은 소리 없이 우는 하나의 모습에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녀를 안전 구역으로 옮기기 위해 몸을 틀었다.

바로 그 순간, 시현의 팔뚝을 쥔 하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이가 가볍게 그러잡은 수준이 아니었다. 이내 하나의 눈이 검푸르게 빛나더니 에스퍼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 사실에 놀란 시현이 하나를 말릴 새도 없이 하나는 습관처럼 그래 왔듯 시현의 속내를 읽으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껏 일반인이나 낮은 급의 에스퍼를 상대하던 것과는 달랐다.

S급의 시현의 에너지에 닿는 순간 실험 이후 아직 불안정하던 하나의 그릇이 크게 동요했다.

거대한 파장이 두 사람을 가로지르며 하나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피가 입술을 훑고 툭툭 떨어지더니 이내 하나가 정신을 잃었다.

그녀가 에스퍼가 된 후 처음으로 누군가의 생각을 읽지 못한 순간이었다.

나는 지금껏 양하나의 기억을 부분부분 들여다보면서, 정작 왜 나는 그때의 기억이 없을까 하는 의문을 품었었다.

비로소 모든 게 명확해지는 기분이었다.

에너지에 비해 비대한 그릇을 지닌 양하나가 방대한 에너지를 지닌 나와 접촉하며 안정화된 것이다.

그 타격으로 내 머릿속에선 이때의 기억이 흐려진 듯했다.

‘어쩐지 이 시기의 기억이 듬성듬성하더라니. 단순히 피로감에 오는 단순 기억 상실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이 있었군.’

쓰러지는 와중에도 후발대에게 호출 신호를 보낸 과거의 성시현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악착같이 살면서도 신임을 얻지 못했던 외로운 사람.

동시에 하나가 정신을 잃으며 기억의 장면이 넘어가는지 주변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의식을 잃은 두 사람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따라 눈을 감았다.

* * *

그대로 구출된 양하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연구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기억뿐. 그조차도 듬성듬성했다.

연구실 폭발 사건의 참고인으로 보호자인 이모를 동반해 센터에 몇 번 더 불려 다녔지만, 너무 어린 나이였기에 조사를 강행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하나는 조사실에 와서도 불안한 얼굴로 ‘기억나지 않아요.’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마지막 조사 때 정신계 에스퍼가 하나의 머릿속을 들여다봤지만, 그는 하나의 기억이 검은 크레파스를 칠한 것처럼 훼손돼 있다고 말했다.

강력한 트라우마에 감겨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기에 조사는 거기서 중단됐다.

하나의 이모는 제 동생 때문에라도 하나를 에스퍼로 키우고 싶지 않아 했다.

그녀가 아직 어리기에 일반인들과 함께 자라면 평범하게 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 탓에 요양을 핑계로 하나를 아카데미에 보내지 않고 제집으로 데려왔다.

하지만 말수가 적고 늘 어딘가 넋 놓은 눈을 한 하나는 그들에게 어려운 존재였다.

서먹서먹한 분위기가 이어지다 하나가 타인의 생각을 읽는 능력자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됐을 때, 하나는 완전히 사각의 방에 고립되었다.

또래인 선희가 그 사실을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였는데 그녀는 속에 담긴 말을 숨긴 적이 없었다.

“미안하지만 몸이 안 닿았으면 좋겠어. 너 다른 사람 생각 읽을 수 있다면서. 솔직히 되게 기분 나빠.”

그건 식사 중 팔꿈치가 닿았을 때 들은 말이었다.

하나는 아주 투명하다 못해 속이 훤히 보이는 네 생각은 굳이 읽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말하고 싶었지만 인내하며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뒤로도 하나가 에스퍼라는 걸 밝혔을 때, 평범한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비슷했다.

그렇기에 선희의 반응이 그녀가 유달리 못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사실을 머리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라도 난 듯 공허한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그 집에서 머물수록 하나의 외로움은 깊어져만 갔다. 누군가와 함께 있음에도 전혀 다른 인종처럼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꼴이었다.

그래서 스스로 연구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해 내려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지독한 구토감만 밀려올 뿐 변하는 건 없었다.

꼭 그날의 기억을 몸 깊숙한 곳에서부터 거부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가 머무는 구덩이 속으로 빛이 새어 든 건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하나는 평소처럼 이모의 가족들과 식사하던 중 텔레비전에서 보도되는 게이트 클리어 속보 속에서 성시현을 보게 됐다.

자신의 힘을 두려워하던 이모나 선희는 어째서인지 성시현 헌터의 활약에는 미소를 보였다.

참 모순적인 반응이라 여기던 그때, 이모의 말로 잊고 있던 기억의 한 조각이 떠올랐다.

“하나 널 구해 준 것도 성시현 헌터란다.”

불길에 휩쓸린 사위 속에서 자신을 안아 주던 따뜻한 빛. 그 존재를 기억해 내고 나서야 하나는 가슴의 구멍이 메워지는 감각을 느꼈다.

그때부터였다. 시현의 기사를 스크랩한 것도 그녀에게 집착한 것도 말이다.

미디어 속에서 시현은 살아 있는 신화였다. 한국이란 좁은 땅 안에 머물기에 그녀가 가진 능력치는 너무나도 우월했다. 저 같은 C급의 에스퍼와는 비견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그런 사람과 과거에 연결고리가 있단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내심 벅차올랐다.

그래서 편지를 썼다.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어서.

하지만 막상 편지를 쓰려 하자, 무엇을 고맙다 해야 할지 몰라 여러 번 뜯어 고치다 심심한 인사로만 남겼다.

그 부분을 계속 썼다 지웠다 해서 종이가 해졌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편지 봉투에 담았다. 감사 편지는 단순한 구실이라 생각했다.

다시 시현을 만날 수 있는 구실 말이다. 그러니 편지 내용은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하지만 편지가 전달되기도 전에 성시현이 서초 게이트 클리어 도중 C급 가이드를 구하고 사망했다.

하나는 센터 로비에서 그녀를 기다리다 로비에 울려 퍼지는 시현의 사망 소식을 듣고 허망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편지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뒤로 하나는 얼마간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서 자연히 이모와의 관계가 더 악화했다.

배려라는 명목하에 슬금슬금 자신을 피하는 이모의 모습을 볼 때면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더니, 그릇을 건넬 때 손가락이 닿지 않게 하려 필사적인 모습에 눈앞이 핑 돈 것이다.

하나는 그릇을 쥔 이모의 팔을 덥석 쥐었다. 몇 년 만에 쓴 능력에 힘 조절이 되지 않았다.

그대로 이모의 아주 깊은 생각까지 침투했다. 그 탓에 놀란 이모는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가 무릎을 다쳤다.

그 사건으로 분노한 이모부와 선희는 하나를 용서할 수 없다며 쫓아내려 들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린 이모의 제안에 센터로 가는 것으로 일은 마무리됐다.

연구실 사건에 연루되었던 에스퍼인 만큼 입사가 어렵지 않을 거란 이모의 말처럼 하나는 엉망으로 쓴 자기소개서로도 센터에 입사할 수 있었다.

그 모든 절차를 순순히 받아들인 건 이모의 생각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이모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예상처럼 자신을 멸시하거나 무시하는 생각 따윈 없었다.

그저 아주 인간적인 안쓰러움과 능력자를 향한 두려움만이 혼란하게 공존할 뿐이었다.

그게 몹시 허무했다.

그래서 하나는 순순히 센터로 왔고 그곳에서 잊고 있던 기억 속 남자인 이곤을 만나게 됐다.

* * *

이필엽은 툇마루에 앉아 정원을 건너봤다.

며칠 동안 우중충한 하늘에 비만 내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몰라보게 맑게 개어 있었다.

비가 내린 직후의 하늘이 가장 청명한 법이다. 지난밤의 거센 비바람을 이겨 낸 이설의 식물들 역시 줄기가 더 곧게 자라 있었다.

이필엽이 그 평화로운 풍경을 눈에 담고 있을 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길드장님.”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몇 번을 불러도 처음 부르는 것처럼 어색하네요.”

그를 찾아온 건 강우신이었다. 잠을 똑바로 못 잤는지 그의 낯빛이 어두웠다.

이필엽은 희미한 미소를 띠고는 옆자리에 앉으라 권했다.

우신은 잠시 고민하다 간격을 두고 그와 나란히 정원을 마주 보고 앉았다.

우신이 앉는 것을 확인한 이필엽이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양하나 헌터는요.”

“잠들었습니다.”

“사흘째 아닌가요, 잠깐 깼다 잠들기를 반복한 게. 몸 상태는 어때요?”

“차도가 괜찮아서 아까는 잠깐이지만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금방 잠들었지만요. 곧 원래 컨디션을 찾을 거 같습니다.”

하나의 일이면 부쩍 말이 많아지는 강우신의 모습에 이필엽은 알 만하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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