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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61)화 (161/183)

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61화

정신을 차렸을 땐 눈앞에 여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아이는 색연필을 쥐고 종이에 뭔가를 열심히 그려 나갔다. 하나같이 풍경일 뿐 그 안에 사람의 형상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림 그리기에 열중한 그 아이가 ‘양하나’임을 직감했다.

‘양하나의 기억인 건가?’

그늘에서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그때도 유령처럼 양하나 기억의 한 부분을 떠돌아다녔다.

그때와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시간 순서대로 흘러가는 장면들 속 그녀의 생각이나 감정 같은 게 전이된다는 것이었다.

지금 역시 한참을 방 안에서 해가 지도록 혼자인 양하나의 외로움이 사무치게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맞은편에 쪼그리고 앉아 장면이 지나갈 때까지 함께했다.

양하나의 부모님은 그녀가 아주 어릴 적부터 바빴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하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가사 도우미와 보냈다.

그러다 한 번 심한 열감기를 앓은 적이 있는데, 거짓말처럼 그녀의 부모가 곧장 병원으로 달려왔다.

두 사람이 턱 끝까지 찬 숨을 내뱉으며 간호사에게 물은 첫 마디는 이랬다.

“몇 등급이죠?”

열감기처럼 지나간 그 날 양하나는 C등급의 정신계 에스퍼로 각성했다.

제 앞에서 한 번도 밝은 적 없던 부모가 그 사실에 미약하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그 사실이 하나는 몹시도 기뻤다. 그래서였다. 다시 한번 그 표정을 보고 싶단 일념하에, 그때부터 부모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의 생각을 읽고 그들이 원하는 행동과 말을 했다.

‘그러면 말 잘 듣는 딸, 조숙한 딸이 되면 조금이라도 부모님의 얼굴을 볼 시간이 길어졌으니까.’

나는 벽에 기댄 채 부모를 상대로 능력을 사용하는 어린 양하나를 건너봤다.

그녀가 내뱉는 말과 행동 안에 진심은 묻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이 칭찬을 할 때 어린 얼굴에 번진 웃음만큼은 진짜라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러다 장면이 바뀌며 양하나는 연구실로 가게 됐다.

윤가경이 그려 준 그림 그대로 펑퍼짐한 원피스를 입은 하나는 활기차 보였다.

혼자인 시간이 길 때는 웃는 법이 없었는데, 연구실에 와서는 온통 자기 세상인 양 뛰어다니기 바빴다.

특히 한 아이를 만나러 갈 때면 표정이 환해졌다.

짧게 깎인 머리칼에 무표정한 얼굴이 지금과는 사뭇 다르지만, 그 아이는 분명 이곤이었다.

하나와 이곤은 연구실 안에서 서로의 말동무가 되어 줬다. 말동무라고 하기엔 하나 혼자 떠들었지만, 하나는 능력으로 이곤이 자신에게 호감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게 이곤에게 말을 걸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이곤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 때쯤, 양하나의 부모님 얼굴 위로는 그늘이 졌다.

그들의 생각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들이 바라는 건 하나가 들어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사실이 점점 하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의 부모님이 밝은 표정으로 그녀를 찾아왔다.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 표정은 하나가 각성열로 쓰러진 직후 한달음에 뛰어왔을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그들이 나타난 직후, 공간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동시에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모든 게 모래로 만든 성처럼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무기력한 분노뿐이었다.

그것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알기까지는 큰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다시 공간이 안정됐을 때, 하나는 거울을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연구실에서는 한 번도 지어 보이지 않던 사무치게 외로운 표정으로 말이다.

나는 공간이 흔들린 사이의 일을 본능처럼 알 수 있었다. 당연했다. 하나의 에너지에 변화가 생겼으니까.

그녀의 몸에서 느꼈던 기시감. 지나치게 큰 그릇이나 불안정한 에너지 모두 그녀의 에너지 운용이 형편없기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불쑥 그 말이 떠올렸다.

‘연구실의 유일한 성공작’

이곤을 지칭하던 그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나는 두꺼운 유리 벽 너머로 하나를 건너보는 그녀의 부모님에게 시선을 돌렸다.

“애매하게 됐어.”

그들이 원한 에스퍼 재각성의 성과는 S급을 능가하는 강력한 힘이었다.

하지만 지금 하나에겐 알맹이가 없었다. 거대한 그릇을 만들어 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에 비해 가진 에너지는 한없이 빈약했다.

그릇을 키워 봤자 그에 맞는 에너지가 채워지지 않으면 쓸모없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하나의 부모님은 그것을 성공의 사례를 치지 않고 자료를 폐기하는 쪽으로 돌렸다.

그 덕분에 같은 연구실 출신의 에스퍼들조차 재각성의 성공 사례가 버젓이 살아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자료를 폐기한다고 한들 살아남은 양하나의 몸에 모든 것이 기록돼 있었다.

잘 감춰진 듯 보였던 비밀이 내 빙의로 인해 오롯이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되었다.

* * *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는 말수가 극심하게 줄어들었다.

그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달은 건 이곤이었다. 이곤은 그녀가 그래 줬던 것처럼 무언가 힘이 될 말을 해 주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결국, 시간이 지나면 하나가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 믿으며 입을 닫았다.

하지만 그날 저녁 강력한 지진 후 폭발음이 들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재경보기가 울렸지만 매서운 경보음과 달리 연구실의 문을 열어 주러 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유일하게 카드 키를 들고 있던 하나만이 자리를 이탈했다.

그녀가 향한 곳은 연구원들이 몰려 있는 동이었다. 어쩐 일인지 연구실이 비어 있었다. 하나는 오직 자신의 부모님을 찾아 사방을 뛰어다녔다.

혹여라도 부모님이 자신을 찾기 위해 실험동으로 간 게 아닐까 그래서 길이 엇갈린 게 아닐까 고민하던 하나가 부모를 마주한 곳은 자료실이었다.

불이 번지며 사방이 화염에 휩싸인 마당에 부모는 그 속에서 커다란 가방 안에 중요한 연구 자료들을 담고 있었다.

문이 녹아내리고 천장이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말이다.

하나는 사색이 된 채 부모의 손을 잡아당겼다.

“나가야 해요. 건물이 무너져요!”

다급한 외침에도 두 사람은 자기들 몸통만큼 방대한 자료와 약품을 챙겼다.

가방이 이미 미어터지려 하는데도 굴하지 않았다.

하나는 두 사람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이 수명을 깎듯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이유는 분명 자신을 위한 것이라 믿었다.

연구실로 나서며 하나를 집에 홀로 두고 가는 날마다 같은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어서 연구를 성공시키고 다 같이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이사하자꾸나.’

그러니 이 모든 건 행복한 가족을 만들기 위한 일이라 믿었다. 하나는 몸을 찢는 고통 속에서도 그 말만 되뇌었다.

그 생각으로 하나는 아버지를 화염 속에서 끌어내기 위해 그의 손을 꽉 쥐며 반사적으로 능력을 사용했다.

사람과 닿을 때마다 능력을 쓰는 게 습관이 된 탓이었다.

세상에는 모르고 사는 게 더 좋은 일도 있다고 했다. 책에서 그 말을 처음 봤을 땐 참 바보 같은 말이라 생각했다.

알고, 알고, 또 알아야지. 혼자만 지독한 외로움 속에 갇히지 않을 수 있었다.

하나를 고독 속에서 꺼내 준 것이 바로 타인의 생각을 읽게 된 후니까 말이다.

그날 그 상황에서 하나가 읽은 아버지의 생각은 무척이나 충격적이었다.

‘어떻게든 연구를 마무리해야 해. 다 왔는데 중단하라니, 이 멍청한 것들 때문에 내 인생의 걸작이 사라질 수는 없어.’

불길 속에서 죽음을 앞둔 이의 두려움도, 아내나 딸에 대한 걱정도 아닌 연구에 대한 지독한 집착, 미련.

그런 것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두려움에 몸을 떠는 순간, 아버지의 독기에 찬 눈과 마주쳤다.

아버지의 눈동자에 화염이 반사된 탓에 더욱더 표독스러워 보였다. 뒤이어 아버지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네가 조금 더 확실하고 쓸모있는 존재로 각성하기만 했더라도.’

그 말만큼은 하나가 정말 아버지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아니면 표정을 보고 망상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분명한 건 그 말을 끝으로 하나가 아버지의 손을 놓쳤다는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손을 밀치듯 놓고 그 화염 속에 그를 버려둔 채 미친 듯이 도망쳤다.

부모님도 연구실 동기들도 이곤마저도 버려두고 지독한 공포감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뛰고 또 뛰었다.

매섭게 일어나는 불길에 살갗이 익는 것만 같았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비명과 폭발음이 섞여 들렸다. 하나는 필사적으로 연구실을 등지고 달렸다.

화재를 피해 도망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를 둘러싼 울타리가 완전히 산산조각 나는 것을 느끼며 밖으로 튕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맨발이 데고 쓸려 피가 나는지도 모르고 뛰었다.

하나가 곧게 걸어가는 방향은 연구실 주위를 메우고 있는 숲 쪽이었다.

나는 이다음 장면을 알고 있었다.

양하나가 비틀거리며 걷다 다릿심이 풀려 이내 툭 하고 쓰러지는 순간, 맞은편에서부터 인기척이 났다.

하나는 그게 몬스터든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듯 다 죽은 눈으로 정면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미 일전에 보았던 것처럼 내가 서 있었다.

검은 복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환한 얼굴이 연구실을 뒤덮은 불꽃처럼 사위를 밝혔다. 하나는 일순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그토록 바라 왔을 때는 오지 않던 천사가 이제야 자신을 데리러 온 것인가 하고.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건 천사 따위가 아니었다.

그게 나와 양하나의 첫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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