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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58)화 (158/183)

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58화

영원은 오랫동안 빛을 못 본 사람처럼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허여멀건 피부와 부스스한 머리칼이 생명력 없이 가슴께에서 흐느적거렸다.

그 초췌한 모습보다도 내 눈을 사로잡은 건 그녀의 복장이었다. 흰색 가운을 입은 그녀는 마치 우리가 쫓던 연구진처럼 보였다.

그녀를 이곳에서 보게 될 수도 있다 예상하긴 했지만,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달랐다.

누군가에게 협박을 당해 억지로 진행된 연구일 거라고, 그렇기에 갇혀 있을 확률이 높을 것이라고, 가경과 작전 전에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가경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리의 추론은 모두 빗나간 듯했다.

당혹감에 미처 행동하지 못할 때,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지원이었다.

“……영원아.”

그의 부름에 괜히 내 몸이 움츠러들었다. 긴장감이 감도는 침묵 속에서 지원만이 애틋한 목소리를 내었다.

“오빠야. 영원아.”

지원이 자꾸 무어라 입을 여는데도 영원은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에 초조해진 지원의 목소리 끝이 떨렸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해 한 걸음 발을 떼는데, 그 순간 영원의 마른 입술이 열렸다.

“일어나.”

영원의 목소리는 오싹할 정도로 서늘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지원이 영원에게 다가가 조심히 손을 뻗는데 영원은 단숨에 그 손을 쳐냈다.

그건 완고한 거절의 뜻이었다.

영원의 의중을 알 수 없는 말이 누굴 향한 건진 머지않아 알 수 있었다. 우신이 다급하게 나를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양 헌터!”

바닥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던 에스퍼들에게서 다시금 강력한 에너지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손가락이 하나둘씩 꿈틀거리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한곳으로 모였다.

그 변화의 중심에 눈을 푸르게 빛내고 있는 영원이 있었다.

곧 전투가 시작되었다. 당장 옆에 있는 우신이 그 무엇보다 신경 쓰였다. 그가 옆에 있는 한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울 게 뻔했다.

고민한 끝에 먼저 우신의 손목을 잡고 안전지대로 피하려는데 그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짐이 되려고 온 게 아닙니다.”

우신은 그 말과 함께 정면으로 뛰어오는 적의 어깨를 붙들어 힘을 가했다. 그 순간 에스퍼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말로만 듣던 에스퍼의 길에 흠집을 내는 공격이었다.

“무리하면 강우신 가이드 몸에도……!”

“무리 안 해요. 그러니 옆에서 싸우게 해 줘요.”

강경한 목소리에 그를 잡아끌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가 있으면 마음 편하게 싸우기 힘들었다.

자꾸만 신경이 그에게로 가 눈앞의 적에게 집중이 안 됐으니까.

그래서 지금껏 그가 내 일에 관심을 보여도 필사적으로 모른 척하며 작전에 끼지 않았던 거다.

그러나 내 앞에서만 얌전히 집 지키는 개를 연기한 것뿐, 뒤에서는 제멋대로 움직였다.

마음 같아선 어디 깊은 곳에 가둬 두고 싶었지만, 그는 내 소유물이 아니었다.

그 당연한 전제를 자꾸만 지워 버리려 하는 욕심이 문제였다.

나는 타들어 가는 목을 매만지다 입을 열었다.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말라고요?”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우신이 뒷말을 이었다. 내가 놀란 기색을 띠자 우신은 내 요구가 만족스러운지 눈매를 접어 웃었다.

“떨어지라고 해도 붙어 있을 겁니다.”

우신은 그 말과 함께 총을 슬라이드해 사격을 시작했다.

그는 상대의 하체를 공격해 이동을 더디게 만들었다. 나도 적의 움직임을 막는 데 주력했다.

몬스터가 아닌 이상 그냥 죽일 수 없었다. 그러니 이게 최선이었다. 그러면서도 한 번씩 지원과 영원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까부터 영원의 앞에 선 채 꿈쩍도 하지 않고 있는 지원이 신경 쓰였다.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이 가는 빈도가 점점 늘어났다.

널브러져 있던 에스퍼들이 도로 힘을 되찾는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눈 감고 봐도 영원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듯했다.

그러니 모든 일의 실마리가 될 그녀를 잡아야 했다.

“지원 헌터 나오세요, 제가 이야기해 볼 테니.”

에스퍼들을 대충 처리한 뒤, 나는 그들에게 다가섰다.

내 목소리에 영원이 멍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감정 없는 묘한 눈빛이었다.

“한영원 씨, 제 말 들립니까?”

그 말과 함께 영원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녀의 피부에 닿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기 때문이다.

그 사실에 놀라 주춤하자, 지금껏 표정 변화 없던 영원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지더니 이내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아아!”

고막을 찢는 비명에 놀라 미간을 찌푸렸다.

“한영원 씨?”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어깨를 짓누르는 힘에 영원의 손목을 놓고 뒤를 돌았다.

“아프다잖아요.”

“…….”

그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공격할 듯 사나운 얼굴을 한 한지원의 것이었다.

“지원 헌터.”

“네.”

“뭐 하자는 겁니까.”

“잡지 말고 말로 하라는 겁니다.”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 그의 눈동자가 불안에 흔들렸다. 나는 슬쩍 뒤를 바라봤다.

계속해서 에스퍼들이 내 쪽으로 오려 하고 있었다. 다리를 공격하며 움직임을 제한했지만, 아까보다 더 강한 재생력으로 그들은 다시 일어났다.

우신이 지원 사격을 해 주고 있지만, 숫자가 너무 많았다.

지원군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 마당에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상황이 더 힘들어질 게 뻔했다.

“지원 헌터 눈에는 지금 한영원 씨가 대화가 통하는 상태로 보입니까?”

“…….”

나는 도로 영원을 돌아봤다.

“한영원 씨, 더 이상 협조하지 않으면 저도 제 뜻대로 행하겠습니다.”

그 말에도 영원은 대답 없이 불안한 사람처럼 어깨만 떨었다. 꼭 무언가에 겁을 먹은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영원 씨에게 묻고 싶은 게 많습니다. 그것만 대답해 주면 되니 겁먹을 거 없어요.”

“……싫어.”

두려움에 가득 찬 그녀의 두 눈동자 때문에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이 방법밖에 없었다.

“우선 저랑 센터로 가서…….”

센터라는 말에 비정상적으로 떨리던 영원의 몸이 우뚝 멈췄다. 그에 이상함을 느껴 나도 덩달아 말을 멈췄다.

“영원 씨?”

서서히 고개를 든 영원과 눈이 마주쳤다. 영원의 눈동자가 텅 비어 있었다.

방금까지 두려움에 떨던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그 눈동자에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에 섬뜩함을 느끼기도 전에 영원은 무감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살려 주세요, 잘못했어요, 살려 주세요.”

트리거가 눌린 사람처럼 영원은 살려 달라, 잘못했다는 소리만을 빠르게 반복했다.

귀를 찌르는 듯한 외침에 등 뒤가 섬뜩해졌다. 그때 지원이 다시 내게 손을 뻗었다.

영원의 비명에 상기된 듯 그의 두 눈이 번뜩였다.

“아무리 양 헌터라도 제 여동생을 공격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공격이라니, 두 눈 똑바로 뜨고 잘 봐요! 지금은 작전 수행 중이고, 한영원은 지금 제정신이 아닙니다.”

단순히 두려움에 휩싸였다고 보기에 영원의 태도는 어딘가 이상했다.

꼭 무언가에 씐 사람처럼 말이다.

지원은 내 말에도 정체 모를 고통에 몸을 옹송그리고 있는 영원을 보며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됐든 무력은 안 됩니다.”

“…….”

“무력을 사용하겠다면.”

지원의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저도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무력이고 뭐고 이 이상 영원의 행동에 휘둘렸다가는 뒤에서 시간을 끌고 있는 내 가이드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나도 곧장 칼집 위로 손을 올렸다.

“진심입니까.”

지원도 전투 자세를 취하듯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가 지금까지 왜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버티었는지, 양 헌터라면 알고 있잖아요.”

지원의 눈동자가 단단하게 빛났다.

도망가는 방법조차 알려 줘야 했던 미련한 애가 지켜야 할 것 앞에서는 처음 보는 얼굴을 해 보였다.

“윽.”

그 순간 탄창을 갈던 우신에게 에스퍼가 달려들었다. 발차기로 강하게 후려 차였지만, 잠깐이나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 역시 지원의 사정을 일일이 봐줄 때가 아니었다.

삽시간에 변하는 내 표정에 이후 이어질 동작을 예감한 듯 지원은 주먹에 에너지를 둘렀다.

그리고 그대로 맞부딪혔다.

지원은 처음부터 온 힘을 다해 공격을 퍼부었다. 생각할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박력 있게 주먹을 뻗어 댔다.

강한 일념이 엿보이는 대단한 기세였지만, 흥분했는지 동작이 지나치게 컸다.

그렇기에 몸집이 작은 나에게는 도망갈 구멍이 잔뜩 있는 허술한 공격이 되었다.

나는 그의 맹공격 속에서 몸을 낮추어 코앞으로 파고들었다.

불쑥 다가온 내 모습에 놀란 지원이 발을 헛디뎠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내 손이 그의 몸통에 닿았다.

그러고는 손안에서 에너지를 터트렸다.

폭탄처럼 터지는 에너지에 지원이 멀찍이 튕겨 나가 굴러떨어졌다.

바닥을 거칠게 쓸며 날아간 탓에 흙먼지가 일었다.

흙먼지가 걷힐 때쯤, 그 안에서 흙을 털고 일어나는 지원의 실루엣이 보였다.

지원은 영원과 꼭 빼닮은 푸른 눈동자를 번뜩이고는 다시 내게 가깝게 붙었다.

과거 지원은 에너지 운용이 서툴렀던 탓에 두드러지는 개인기를 연마할 시간이 없었다.

그랬던 그가 에너지를 운용할 수 있게 되면서, 타인의 개인기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배움이 빠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그것 외에 자신만의 것으로 보이는 건 아직 없었다.

‘그 방법이 유제이에게는 통했을지 몰라도…….’

안으로 파고들 틈을 만들어 주자 지원은 주저 없이 주먹을 뻗었다.

그의 손안에서 에너지가 폭발할 듯 차올랐다.

내 기술을 흉내 낸 것이었다. 물론 힘 자체는 절대 뒤처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내 방식을 따라 할 줄 이미 예견하고 있었기에 막는 건 아주 쉬웠다.

나는 똑같이 에너지를 폭발시켜 공격을 막아 냈다. 지원은 곧장 다음 공격을 시도했지만, 그 역시 유제이의 너클을 흉내 낸 공격에 불과했다.

모든 움직임을 읽히자, 이내 지원은 레퍼토리가 끝난 듯 주춤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나는 즉시 그의 양 손목을 강하게 붙들었다.

뿌리치려는 그를 내려다보며 낮게 읊조렸다.

“이게 개인기를 연마해야 하는 이유야.”

지원의 뺨이 붉어졌다.

이미 승부는 결정 난 거나 다름없었다. 지원도 그 사실을 직감한 듯 몸에 힘을 풀었다.

그대로 지원의 손목을 놓아주려는데, 그 순간 그의 등 뒤로 살기가 느껴졌다.

동시에 검이 날아들었다. 맨손으로 쳐냈지만, 검에 담긴 에너지에 의해 손바닥이 엉망으로 베였다.

피가 묻은 단검은 서늘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양 헌터!”

놀란 지원이 내 손을 확인하려 들었지만, 나는 그를 물러나게 하고 검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봤다.

우리가 들어온 가림막 커튼이 열리며 민지민이 걸어 들어왔다.

민지민은 놀란 척 큰 눈을 끔뻑였다.

“괜찮습니까. 양 헌터.”

나는 피가 흐르는 주먹을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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