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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57)화 (157/183)

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57화

에스퍼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내 쪽으로 걸어왔다.

유제이는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런 함정을 준비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희미하게 한쪽 입매를 슬쩍 올리자, 유제이가 어이없다는 듯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천 게이트에서도 생각한 거지만 넌 은근 곤란한 얼굴을 하면서도 즐기는 것 같더라.”

“…….”

“목숨이 간당간당한 이런 상황을.”

유제이가 내 쪽으로 총을 쏘듯 에너지를 발사했다.

그 에너지는 내가 만든 배리어에 충돌해 수증기를 남기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애초에 나를 공격할 생각으로 쏜 에너지가 아니었다. 보란 듯 힘을 쓰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게 신호탄이 되어 에스퍼들은 하나같이 비슷비슷한 에너지를 뿜어내더니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벽을 차고 올라 에스퍼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었다.

착지하기 무섭게 달라붙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봐주면서 하다가는 치명상을 면치 못할 수 있었다.

생각 끝에 나는 주저 없이 에너지를 담은 주먹을 휘둘렀다. 몸놀림이 들짐승처럼 예리하긴 했지만, 지금껏 만난 에스퍼들에는 비할 게 못 됐다.

오히려 에스퍼보다는…….

‘그래, 몬스터 같아.’

동굴이기 때문일까, 떼거리로 덤벼 대는 머릿수 때문일까? 서초 게이트의 일이 자꾸만 겹쳐 보였다.

내게 어떻게든 닿으려고 달려드는 에스퍼들의 행위는 이성으로 움직이기보다 본능에 휘둘리는 것 같았다.

아무리 힘을 줘 멀리 날려 버려도 감각이 마비된 이처럼 또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한편 유제이의 말처럼 끝도 없이 몰려드는 그들을 상대하고 있는 지금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이제 완전히 내 것처럼 에너지를 운용할 수 있었지만, 힘이 가열됨에 따라 생각이 마비되는 듯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활개 칠 수 있을지 몰랐다.

한눈을 파는 사이 쓰러져 있던 에스퍼가 눈을 번쩍 뜨더니 내 종아리에 칼을 찔러 넣었다.

나는 반대쪽 발로 그의 발목을 눌러 부러트렸다. 몸이 먼저 반응해 칼이 깊게 들어가지는 않았다.

칼을 빼내기 위해 손잡이를 잡는데 손잡이에서 방금까지 그걸 쥐고 있던 에스퍼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섬뜩할 정도로 내 것과 닮아 있는 에너지에 역한 구토감이 올라왔다. 유제이의 말뜻을 어쩐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으아악!”

그대로 달려드는 에스퍼의 팔을 붙잡았다. 한번 인식하기 시작하자 눈에 띄게 거슬렸다.

그 에너지들이 마치 내게 흡수해 달라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그 생각이 깊어지며 손아귀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내게 손목을 잡힌 에스퍼가 제 몸에 슬며시 스미는 힘에 비명을 내지르는 순간, 총성이 울렸다.

탕-

총알은 에스퍼의 허벅지를 관통했다. 힘이 빠지듯 쓰러지는 덕에 나는 자연히 감응을 그만두고 그의 팔을 놓았다.

총성이 난 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피어오르는 연기 뒤로 곧게 팔을 뻗고 있는 강우신이 보였다.

희뿌연 연기 사이로 일순 그와 눈이 마주쳤다. 우신은 주저 없이 내 주변으로 모여드는 에스퍼들의 다리를 조준했다.

여러 번의 총성이 이어졌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있던 유제이가 그 모습을 보고는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저 새끼가.”

이내 탄알이 끝난 듯 우신이 탄창을 갈았다. 그 순간을 포착한 유제이가 그를 향해 뛰었다. 달려가며 팽창되는 손을 본 나는 에스퍼들을 제치고 그 뒤를 따랐다.

한발 늦었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 강우신의 등 뒤에서 일어난 푸른 에너지가 파도처럼 유제이를 덮쳤다.

지원이었다. 그가 긴 코트를 휘날리며 강우신 앞을 막아섰다.

강우신은 예상한 일인 듯 동요 없이 탄창을 갈아 끼웠다.

반면 유제이의 낯이 한없이 구겨졌다.

“한지원, 네가 왜 여기에.”

지원은 대답 대신 유제이의 너클을 그대로 제 손 위로 형상화했다.

지난 대인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안정적인 운용이었다.

유제이는 누구에게건 제 나약한 속을 감추듯 날 서게 반응했지만, 지원 앞에서 가장 심했다.

“너 시발, 날 흉내 내는 짓은 그만두라고 했지.”

유제이는 보란 듯 너클의 모양을 더 흉측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의 너클이 맞부딪히며 굉장한 소리가 났다. 나는 그 틈에 강우신의 손목을 낚아챘다.

“뭐 해요, 여기서.”

몸에 달라붙은 검정 목티와 가죽 재킷 차림은 센터에서 보던 정장 차림의 모습과는 달랐다.

척 보아도 센터의 명령이 아닌, 사적으로 움직인 거였다. 우신은 눈매를 접어 웃어 보였다.

“늦지 않게 온 거 맞죠?”

우신은 그 말과 함께 제 손목을 쥔 내 손을 끌어다 마주 잡았다.

그 너스레에 황당해져 빤히 쳐다만 보는데, 정신을 차린 에스퍼 몇이 또다시 맹목적으로 나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을 처리하기 위해 우신의 손을 밀어 내려는데 되레 그가 힘주어 내 손을 더 꽉 잡았다.

그러곤 이쪽으로 달려오는 에스퍼들을 향해 총을 발포했다.

쏘아 올린 탄성 위로 화약 냄새가 섞여 들었다. 나는 그런 우신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한 기분이었는데, 그를 마주하고 있자 서서히 안정감이 들었다.

나름 그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이지 볼 때마다 새로운 남자였다.

그 사실을 지금처럼 훅 다가온 화약 냄새를 맡고 나서야 떠올린다.

뭐가 됐든 결코 싫지 않았다.

나는 남은 손을 뻗어 우신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탄창을 빼내던 우신은 일순 우뚝 행동을 멈췄다.

놀라는 반응에 그제야 내 행동을 자각하고 서둘러 손을 떼려는데 우신이 날 돌아봤다.

“뭔가 머리카락에 묻은 것 같아서.”

당황해서 아무런 말이나 뱉어 내자 우신이 답했다.

“그럼 마저 만져 줘요. 여기도 더 묻은 것 같은데.”

그는 되레 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그렇게 말했다. 더욱더 민망해지는 기분이었다.

“……약아서는.”

“말도 없이 와서 화낼까 걱정했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것 같아서 기분 좋네요.”

우신의 귀 끝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태연자약한 척해도 그 역시 내 반응을 하나하나 살피고 있단 증거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뒤통수로 도로 손을 뻗는데, 축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하지만, 연애는 나가서 해 주실래요?”

지원이 썩은 동태 눈을 하고는 우리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놀라 손을 내렸다.

“한지원 헌터 괜찮습니까?”

“빨리 물어 주셔서 눈물이 나네요.”

민망한 웃음을 짓는데, 지원의 등 뒤로 어느새 정제석 수갑을 찬 유제이가 보였다.

그의 입은 손수건으로 틀어막혀 있었다. 맞부딪히고 얼마가 지났다고 이렇게 빨리 승부가 날 줄이야.

나는 놀라 지원을 쳐다봤다. 지원의 에너지는 한없이 안정적이었다.

그 거대한 에너지를 이렇게 고요하게 다룰 수 있게 되다니. 섬뜩한 감각이 올라왔다.

그런 내 생각을 알아차린 듯 우신이 작게 속삭였다.

“양 헌터가 자길 피하는 이유가 자신이 짐이 되기 때문이라 생각하는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살짝 도와줬습니다.”

아무리 우신의 도움을 받았다 한들 저렇게 안정적인 운용이 가능해지려면 뼈를 깎는 고통이 있었을 것이다.

‘살짝만 운용해도 그렇게 힘들어하더니 용케도 참았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나는 유제이의 몸 곳곳에 난 붉은 주먹 자국을 내려다봤다.

“유제이의 너클을 그대로 돌려줬나 보네요.”

“네, 본인이 가장 자신 있어 하던 기술이니까요.”

“의미는 알겠지만, 개인기도 연마해요.”

뜬금없는 조언에 지원은 내 반응이 본인이 생각한 것이 아니었는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괜찮습니다. 보다시피 충분해서요.”

지원은 유제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는 기절한 듯 고개가 푹 꺼져 꿈쩍없었다. 당분간은 깨어나지 못할 거 같았다.

지원의 얼굴에는 흡족함이 묻어났다. 유제이를 이겼으니 그걸로 실력을 충분히 증명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무어라 더 말하려다 그대로 삼켰다.

대신 손수건이 물려 있는 유제이를 보며 말을 이었다.

“입 안에 있던 건요.”

“이거 말하는 거죠?”

지원이 알약을 집어 보여 줬다. 유제이의 입에 있던 게 맞았다.

“……용케도 그걸 입 안에서 빼낼 생각을 했네요.”

내 말에 지원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지원은 제 여동생을 오랫동안 찾고 있었으니, 영원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 그에게 에스텔은 조금 다른 의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가경에게 에스텔이 한영원이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되어 준 것처럼.

나는 고개를 돌려 주변에 쓰러져 있는 에스퍼들을 훑었다. 고통에 무감해 보이더니 힘을 다한 듯 바닥에 널브러진 채 꼼짝도 못 했다.

정말 좀비처럼 재생력이 뛰어나면 곤란할 뻔했는데 다행이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며 입을 열었다.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팀원들 호출할 거니 이만 두 사람은 먼저 빠져나가 봐요.”

센터에서도 마약반이라는 명목하에 남모르게 움직인 작전이었다.

민지민이 이 두 사람을 여기서 봤다가는 또 어떤 지적을 할지 몰랐다. 그러니 두 사람을 먼저 보내는 게 맞았다.

“사양하겠습니다.”

당연히 순순히 자리를 비키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의외였다.

지원은 두 눈을 부릅뜨고 동굴의 더 깊은 쪽을 살폈다. 검은 천에 둘러싸인 비닐하우스와 캡슐들까지. 그의 눈에 투기가 서려 있었다.

“한지원 헌터?”

“오랜만에 만나 이런 말 하기 죄송하지만, 저도 여기에 온 목적이 있어서요. 그걸 확인받기 전까지는 못 나갑니다.”

단호한 말씨에 우신을 쳐다보자, 우신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갑자기 이는 두통에 이마를 짚었다.

“그럼 두 사람은 제 호출로 온 겁니다. 그렇게라도 해야지 명분이 생기니 제 말에 입 맞춰 주세요.”

“물론이죠.”

우신이 살갑게 웃었다. 어쩐지 우신의 뜻대로 된 것 같았다.

곧바로 가경에게 문자를 넣는데, 지원이 대답 대신 먼저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게 보였다.

나는 급히 그를 불렀다.

“지원 헌터 더 깊이는 가지 말아요, 정비해서 같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지원의 정면에 있던 비닐하우스의 입구가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다. 나는 곧장 홀스터에서 단검을 빼 들었다.

트럭이 아니더라도 이 내부에 그들과 비슷한 에스퍼가 더 숨어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앞서 있던 지원의 반응이 이상했다. 지원은 전투 자세를 취하기는커녕 놀라 경직된 채였다.

그 모습에 불안함을 느낀 내가 지원을 다시금 부르는데, 그림자 속에 있던 누군가가 한 걸음 걸어 나왔다.

천막 밖으로 나온 이는 여자였다.

‘한영원’의 모습은 13살 무렵 가경이 그려 준 그림으로 본 것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나는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 나타난 이가 한지원과 꼭 닮은 그의 여동생 한영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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