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54화
“쥐새끼다!”
경비원들은 주민호를 발견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구타하기 시작했다.
둔탁하고 소름 끼치는 소리가 이어진 뒤, 에스퍼들을 실은 끌 것이 하나둘씩 기름칠 안 된 바퀴 소리를 내며 밖으로 나갔다.
완전한 정적이 찾아오자 나는 사색이 된 얼굴로 커튼을 거두었다.
철창이 빠져나간 방 안은 나무 상자와 커튼 외에 텅 비어 있었다. 주민호를 구타한 흔적인 듯 바닥에 붉은 핏물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머지않아 유제이 역시 상자 밖으로 나왔다.
“이게 무슨 일이냐.”
유제이가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이어셋 너머에서 가경이 입을 열었다.
-비상계단 쪽이 시끄러운데 무슨 일이에요?
아무 대답도 못 하는 사이 이곤의 음성이 들려왔다.
-뒤쪽 야외 주차장에 화물 트럭 들어왔습니다.
“에스퍼들을 모조리 옮겼어.”
내 말에 가경이 당황해서는 되물었다.
-뭐라고? 그럼 어떻게 할 건데.
가경이 다급히 묻자 나는 피 묻은 바닥에 깨진 채 뒹구는 안경알을 바라보며 답했다.
“따라가야지.”
* * *
불법 투기장이 엉망이 된 것에 비해 도박장은 여전히 활기 넘쳤다.
로비로 올라가자 곧장 윤가경이 보였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키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조이현은 밖으로 끌려 나갔어.’
때마침 이어셋을 통해 민지민이 운을 뗐다.
-유제이는 남아 상황 수습을 하고, 양 헌터는……?
“뒤따라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자신 있게 말했지만 나는 면허가 없었다.
대부분 남이 모는 차를 타고 다녔고 급할 때면 날아다녔기에 면허를 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건물 밖으로 빠져나온 나는 윤가경을 힐끔 쳐다봤다.
의뢰 건 때문에 주로 사옥에만 머물던 그녀의 사정 또한 나와 별반 사정 다르지 않지 않을까.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경비원들에게 엉망으로 끌려다닌 듯 먼지투성이가 된 조이현이 옷을 탈탈 털고 나오는 게 보였다.
“조이현 씨 차 어디에…….”
그에게 운전을 맡기려 했는데, 가경이 보란 듯 차 키를 꺼내 들었다.
“뭐 해. 빨리 서둘러야지.”
가경은 눈빛에 날을 세운 채 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키를 누르자 차체가 낮은 붉은 스포츠카의 전조등이 번쩍였다.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자 가경이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내 컨셉이 돈 방탕하게 쓰고 갈 재벌 3세라며.”
그 말과 함께 그녀는 제 가죽 바지를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운전석에 올라탔다.
지독한 콘셉트 이해도에 혀를 내두르며 보조석에 앉았다. 조이현이 뒷좌석에 올라타기 무섭게 가경이 액셀을 밟았다.
차는 미끄러지듯 주차장을 빠져나가 도로 위에 올라섰다.
곧장 시내로 향하려는데 불쑥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반대쪽으로 향했습니다.
민지민이 나직한 목소리로 트럭이 향한 동선을 설명했다.
CCTV로 모든 상황을 지켜본 그만이 트럭이 향한 방향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가 말한 게 우리가 가려던 시내와는 반대편 동선이라 마음에 걸렸다. 나는 내비게이션의 지도를 손가락을 축소시키며 되물었다.
“반대쪽은 계량산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이 온통 산인데 트럭이 그곳으로 향했다고요?”
-네, 분명 그 방향으로 빠져나갔습니다. 서두르지 않으면 놓칠 수 있어요.
시내 쪽으로 해서 외부로 빠질 줄 알았더니, 되레 도박장을 등진 산 쪽으로 향하다니.
내비게이션 지도로만 보아도 산맥이 꽤 길었다. 에스퍼들을 실은 차가 그쪽으로 갔다는 건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스스로 독 안의 쥐를 자처하려 한다는 것. 그 뒤에 더 큰 흑막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것.
“먼저 출발합니다.”
내가 선택을 내리지 못하는 탓에 가경이 핸들만 쥐고 멈춰 있자, 그 곁으로 민지민 일행이 탄 차가 스쳤다. 그들의 차에서 핸들을 쥐고 있는 건 이곤이었다.
어쩐지 이곤의 안색이 나빠 보였다. 멍하니 앞서가는 차를 바라보는데 곁눈으로 가경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뒤를 따르죠.”
우리는 빠르게 민지민 차량을 따랐다.
조금 전까지 여유롭던 가경도 어딘가 긴장한 빛이 역력한 눈빛이었다. 일이 이렇게 급작스럽게 진행될 줄 몰랐기에 꽤 당혹스러운 모양이었다.
도박장을 완전히 벗어나자 잠시 논과 밭이 이어졌다. 그 끝에 계량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참 속도를 올려 봐도 트럭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초조함에 생각이 많아지는 찰나, 뒷자리에 앉아 있던 조이현이 입을 열었다.
“어디에 쓰려는 걸까.”
철창 안에 갇혀 있던 에스퍼들을 가리킨 말인 듯했다. 그의 물음처럼 그 인원을 다 어디로 데려가서 무얼 하려는 건지 쉽사리 예상되지 않았다.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하나같이 불길한 것들뿐이었다.
가경은 민지민의 차량 뒤꽁무니를 따라가는 상황이 마음에 안 든 듯 검지로 핸들을 톡톡 치며 되물었다.
“너라면 어떨 거 같은데요.”
가경의 물음에 조이현은 제 아래턱을 매만지며 앓는 소리를 냈다.
“음, 만약 처리가 목적이라면 산에 생매장할 거 같기도 하고.”
그의 말에 나는 어이없는 탄식을 뱉어 냈다.
“생각보다 삼류 악당처럼 현실적인 답변이네요.”
“그렇잖아. 필요 없어져서 가둬 뒀다가 갑자기 다 산으로 이동시키는 거면 그런 이유밖에 없지 않나.”
“…….”
그의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그 방에 갇혀 있던 이들은 모두 경기에서 진 에스퍼들이었다.
그랬기에 나도 처음에는 그들이 약체로 분류되어 독방으로 끌려갔다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마주한 그들은 대부분이 이미 에스텔을 복용한 적이 있던 에스퍼들이었다.
체내에 약이 남아 있어 살려 뒀던 것이라면 왜 벌써 외부로 빼는 것일까.
조이현의 말처럼 이제 와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라기엔 비효율적이라고 느껴졌다.
내가 도박장 관리자였다면 차라리 계속해서 약을 투여해 더 극적인 경기를 만들어 낼 것 같았다.
그게 더 효율적인 방향일 테니까.
생각이 깊어지는 그때, 가경이 입을 열었다.
“보인다. 흰 트럭.”
추적하던 트럭의 꼬리가 드디어 보였다. 이곤도 차량을 발견하고는 급작스럽게 속도를 올렸다.
가경 역시 지지 않고 바짝 속도를 냈다.
그러나 계량산 초입에 접어들며 도로가 서서히 좁아져서 위험했다.
그때 트럭의 오른쪽 차창 밖으로 누군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의 얼굴을 주시하기도 전에 손에 들린 권총이 눈에 들어왔다. 놀란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숙여”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총성이 울렸다.
탕탕탕-
연발로 쏘아진 탄알은 우리를 향한 게 아니었다. 측면에서 앞서가던 민지민네 차의 앞바퀴가 터지며 차체가 중심을 잃고 격하게 흔들렸다.
곧 머지않아 차축이 뒤틀릴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가깝게 붙은 우리 차와 충돌할 게 뻔했다.
그때 가경이 망설임 없이 브레이크를 밟더니 핸들을 도로 밖으로 돌려 냅다 돌진했다.
차가 가드레일을 치며 한쪽 바퀴가 포장도로 밖으로 나갔다.
울퉁불퉁한 땅에 닿으며 차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 순간 예상대로 민지민 일행의 차가 축을 잃고 회전하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대로 가드레일을 받더니 보닛에서 연기가 나는 채로 멈춰 섰다.
가경은 민지민이 빠져나가며 비게 된 자리로 주저 없이 파고 들어갔다. 그녀의 빠른 판단 덕분에 사고는 모면했다.
내 시선이 그 차량으로 향해 있는 걸 보고는 가경이 속도를 줄였다.
“태워서 갈 거야?”
그녀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는 사이, 차 문을 발로 차고 나오는 이곤이 보였다. 그가 멀쩡한 것을 확인한 나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아니, 추적을 계속하자.”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경은 그새 사라진 트럭을 쫓아 속도를 올렸다.
* * *
차가 가드레일에 부딪힐 때 빠르게 에너지로 몸을 감쌌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충격이 컸을 것이다.
이곤은 침음을 뱉으며 허리춤에 찬 단검으로 에어백을 찔러 바람을 뺀 다음 밖으로 걸어 나왔다.
도로를 따라 양하나가 탄 차가 트럭을 쫓아 다시 속도를 올리는 게 보였다.
이곤은 숨을 몰아 내쉬면서 고개를 돌렸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민지민도 멀쩡한 얼굴로 차 문을 열고 나왔다.
그를 확인한 이곤이 입을 열었다.
“바로 대기조한테 연락하겠습니다.”
이곤이 핸드폰을 꺼내 들자, 민지민이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천천히 하죠.”
“네?”
문제 차량을 추적하는 상황이었다.
공조 중인 오델리아와 양하나가 탄 차량이 바짝 그 뒤를 쫓고 있고, 그런데 그에 반해 민지민의 태도는 너무나도 느긋해 보였다.
민지민은 차체에 기댄 채 재킷 바지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이곤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민지민은 담배 끝에 불을 붙이고는 턱짓했다.
“보면 모르나, 놀란 심신 안정 중인 거.”
옅은 실소가 흘러났다.
“저한테 했던 말과 다르지 않습니까?”
“무슨 말.”
“분명 하나 몸에는 손가락 까닥하지 않기로 했던 거 말입니다. 이제 와서 모른 척하자는…….”
이곤이 표정을 구기며 몰아붙이는 그때 그들이 온 방향에서부터 커다란 엔진 소리를 내며 오토바이 한 대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오토바이는 빠르게 두 사람을 지나치더니 양하나가 떠난 방향을 쫓았다. 이곤의 시선이 자연히 오토바이의 꽁무니로 향했다.
검정 헬멧을 쓰고 있어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스쳐 지나가는 찰나 옷차림을 통해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이곤은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민지민을 돌아봤다.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는 겁니까.”
이곤의 물음에 민지민은 희멀건 연기를 뭉텅 내뿜으며 태연히 답했다.
“글쎄.”
그가 뱉어 낸 연기만큼이나 무용한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