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52화
모든 말을 쏟아 내자 놀라울 정도로 개운했다. 그저 말한 것뿐인데,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다.
이야기를 마친 나는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들어 줘서 고마워요. 답답했는데 말하고 나니 조금 정리되는 것도 같네요.”
“그랬다면 다행이에요.”
그런데 어쩐지 우신이 무언가 골똘히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제 이야기 중 걸리는 거라도 있나요?”
“걸리는 거라기보다는 궁금한 게 조금 있어서요.”
“뭔지 말해 줘요.”
우신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그 에스텔을 발견했을 때 그 안에 든 게 에너지 농축액이라는 걸 바로 느꼈다는 거죠?”
곧바로 끄덕이자 우신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요?”
“네?”
“에스텔에 대해선, 에스퍼 능력을 각성시키는 신 마약이라고만 알고 있었다면서요. 유례가 없으니, 에너지를 농축했다고 생각하기 어려웠을 텐데.”
우신의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거야 일전에 비슷한 에너지를 본 적이 있어서…….”
“언제요?”
우신의 물음에 나는 서서히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가장 최근에 느낀 건 길드전 한정우 헌터였다. 하지만 돌이켜 보니 그 이전부터 이와 비슷한 에너지를 느꼈던 것이 기억났다.
“……유제이.”
나도 모르게 그 이름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사색이 된 채 우신의 앞에서 옴짝달싹 못 하다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고, 고마워요. 내가 곧 연락할게요. 지금은 확인해 볼 게 생겨서.”
다급한 몸짓으로 방을 나가려는데 우신이 놀란 듯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요.”
우신의 목소리에 나는 곧장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봤다. 그는 막상 내가 멈춰 서자 잠시 주저하다 말을 이었다.
“아까 한 말 진심이에요. 언제든지 제 도움이 필요하면 불러요. 달려갈 테니까.”
“고마워요.”
그리 말하고서도 우신은 할 말이 더 남은 얼굴이었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자 우신이 말을 이었다.
“그게 가이딩 말입니다. 1차 접촉으로는 겉돌 수가 있어서…….”
“…….”
말끝을 흐리는 우신의 목덜미가 서서히 붉어졌다.
“그러니까 포…….”
우신이 입술을 오물거리며 말을 이으려는 찰나, 나는 불쑥 그의 양어깨에 손을 올려 허리를 굽히게 하고는 입술에 쪽 소리가 나게 부딪혔다.
“이 정도로 충분해요.”
나는 그렇게 말한 뒤 걸음을 재촉했다.
* * *
강우신은 하나가 방을 떠나고도 얼마간 더 허리를 구부린 채 굳어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를 얼굴로 있던 그는 한참 뒤에야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조금 전 대화 도중 무언가 퍼즐이 맞춰진 듯 눈을 댕그랗게 뜬 그녀는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
그 와중에도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는 모습이 귀여워 가이딩을 핑계로 포옹이라도 하려던 것뿐이었는데, 다른 걸 떠올린 모양이었다.
우신은 어느새 귀 끝까지 붉어져서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여태까진 위급한 상황이었거나 제가 졸라서 한 접촉이 전부였다. 처음으로 맨정신에 먼저 다가온 그녀의 모습은 생각보다 더 자극적이었다.
우신은 얼마간 더 멀대같이 서서는 방을 떠나지 못하다가 시간을 확인한 뒤에야 걸음을 옮겼다.
넓은 보폭으로 도서관을 빠져나온 우신은 정문 쪽으로 향하다 불시에 멈춰 섰다. 산책로에 낯익은 얼굴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를 가만히 응시하던 우신은 이내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상대가 곧장 우신의 뒤로 따라붙었다. 그 기척을 느끼며 우신은 닫고 있던 재킷의 버튼을 풀고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내가 안에서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신의 물음에 상대는 뾰로통한 얼굴로 답했다.
“양 헌터랑 만나는 거면 저도 좀 보고 싶었는데.”
그의 말에 우신은 걸음을 멈추고 상대를 돌아봤다. 우신의 따가운 눈총을 맞고 곧장 눈을 돌리는 이는 한지원이었다.
지원이 시선을 피하면서 딴짓을 하자 우신은 낮게 한숨을 쉬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그럼 따라 들어오지 그랬어.”
우신의 물음에 지원은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듯한 얼굴로 답했다.
“두 사람 분위기가 딱 그거였거든요. 지금 들어가면 눈치 없는 놈 소리 들을 분위기.”
지원은 괜히 따라 들어갔다가 눈총 맞아 죽을 일 있냐, 라는 말을 덧붙이려다 애써 삼켰다.
우신은 그 대답에 멍청하지는 않네, 하고 읊조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함께 돌아온 곳은 지원의 숙소였다. 지원은 급히 소파에 아무렇게나 벗어 둔 잠옷을 치웠다.
우신은 개의치 않은 듯 식탁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자연스럽게 상의 재킷을 벗는 우신에게 지원은 능숙하게 물 한 잔을 내놓고는 자신이 마실 콜라를 가져왔다.
그 두 사람의 모습은 전보다 일상적이고 안정적으로 보였다. 모두 양하나가 공개 수배돼 쫓기던 2개월 사이의 일 덕분이었다.
한지원이 양하나가 실종되기 전, 마지막에 함께 있던 사람 중 하나였기에 우신은 지원에게 몇 번이고 하나의 그 날 상태에 대해 캐물었다.
하지만 지원 역시 전투 후유증으로 쉬던 참이었고, 아는 게 없었다.
그럼에도 우신은 하루가 멀다 하고 지원을 찾아와 그를 닦달했다.
그리고 수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늘 초연한 얼굴로 지원의 에너지 길을 만져 줬다.
지원은 왜 하나도 없는데 자신을 도와줬냐고 물었고 우신은 당연한 걸 왜 묻냐는 얼굴로 답했다.
“약속했으니까.”
하나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한지원의 상태가 나빠져 미움 사고 싶지 않던 것뿐이지만 우신은 그런 사족은 다 자르고 요점만 답했다.
그게 의도치 않게 지원의 마음에 와닿았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원은 우신에게 작은 정제석 하나를 선물했다.
밤낮으로 하나를 찾으러 다니느라 수면이 부족했던 그는 지원의 의도를 알 수 없는 선물에 미간을 팍 구겼다.
하지만 정제석과 함께 온 짧은 편지를 보고는 곧장 눈을 키웠다.
‘그걸 며칠 쥐고 있다가 오델리아 길드의 윤가경 헌터에게 보내세요. 양하나 헌터에게 전달해 달라고. 그러면 적어도 걱정이 조금은 덜어질 겁니다.’
우신에게 가경의 우체부 사업을 알려 준 게 바로 그였다.
그 일을 기점으로 두 사람 사이가 예전보다는 아주 살짝 가까워졌다.
새삼 자신들의 관계를 곱씹은 지원은 콜라를 벌컥벌컥 마시곤 입을 열었다.
“저는 왜 보자고 한 건데요.”
양하나가 의도치 않게 지원과의 만남을 미루면서 지원은 약간 심통이 난 상태였다. 그 모습에 우신은 옅은 실소를 짓고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양 헌터가 이번에 새로 들어간 마약반에 대해 알고 있지.”
“물론이요. 특수 마약사범들을 잡는 특수반이라죠.”
심드렁한 척하면서 양하나 소식이라면 다 주워들은 듯했다. 우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우리도 그 일에 합류할 거다.”
“아, 우리도 합류를…… 네? 저랑 강우신 헌터가 뭐에 합류를 해요?”
“마약반에서는 이틀 뒤 본격적으로 움직일 모양이야. 그러니 우리는…….”
“아니, 잠깐 잠깐만요.”
지원은 두 손을 휘저으며 멈춰 보라는 듯 우신의 말을 막았다.
“뭐가 이렇게 깜빡이도 없이 들어옵니까? 신 마약 조사를 왜 우리 둘이 합니까? 저는 위에서 받은 지시도 없는데?”
“당연히 없겠지. 단독으로 움직이는 거니까.”
지원은 우신의 뻔뻔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원래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기는 했지만, 이제는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했다.
지원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누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걸 왜 저희가 단독으로…….”
지원의 말이 채 이어지기 전에 우신은 낮게 한숨을 내쉬더니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곧 그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나름 보답인데.”
“네?”
“저번 우체부 일의 보답.”
지원은 저도 모르게 어떤 사람이 보답을 이딴 식으로 하냐고 따져 물을 뻔했지만, 우신은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신 마약이 7년 전 연구소 사건과 관련 있다고 하더군.”
“…….”
“이제 의욕이 조금 생겨?”
그의 말에 지원의 눈빛이 일순 변했다.
지원은 의욕이 생기기만 할 뿐인가요, 하고 작게 답했다.
마른 가지에 불이 옮겨붙듯 눈 깜빡한 사이에 지원은 우신과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우신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정보를 말하기 전 먼저 듣고 싶은 게 있는데, 지원 헌터가 에너지의 길을 억지로 넓히면서까지 공격팀에 붙어 있는 이유. 그것도 여동생이랑 관계있는 건가?”
우신의 입에서 여동생까지 거론되자 지원은 잠시 현기증을 느꼈다.
“도대체 남의 뒷조사를 어디까지 한 겁니까? 제가 왜 공격팀에 붙어 있는지까지는 못 알아냈나 보죠?”
“아쉽게도.”
지원은 옅게 미소 짓는 우신을 보며 뻔뻔하다고 혀를 찼다.
‘도대체 양 헌터는 이런 남자 어디가 좋다고. 남자 보는 눈도 없지.’
지원은 살짝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그 우체부에겐 저도 동생의 행방을 찾다 알게 돼 의뢰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동생에게 보낸 의뢰는 센터로 돌아왔고요”
지원의 말에 우신의 눈이 좁아 들었다.
“센터로 다시 돌아왔다고요?”
“물론 수신자를 찾지 못하면 물건을 반송하는 때도 있다고 하니, 그 경우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 덕분에 새로운 게 보이더라고요.”
“…….”
“당시 공격 1팀에 말도 안 되는 급성장세를 보이는 에스퍼들 사이에서 모조 에너지라는 말이 도는 걸 들었습니다. 그게 꼭 무슨 보조제 역할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하던데. 그 말 제가 동생 능력을 가리켜 했던 말이거든요.”
우신 역시 공격 1팀에 있었기에 그가 말하는 상황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입니다. 그저 감일 뿐이지만, 단서도 그뿐이니 악착같이 붙어 있을 수밖에요.”
지원의 말에 우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이해했어. 말해 줘서 고마워.”
지원은 작게 코웃음 쳤다. 불한당 같은 얼굴로 물을 때는 언제고 끝에는 제 일처럼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양하나와 셋이 만날 때까지만 해도 지원은 강우신이 다른 공격 1팀의 사람들과 비슷하면 비슷했지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 여겼는데 아니었다.
지원은 잠시 다리를 떨다 되물었다.
“설마 강우신 가이드와 저 둘이서만입니까?”
지원의 물음에 우신이 픽 웃었다.
“왜요, 자신 없나요?”
“그럴 리가요. 길드전에서 보니 양 헌터는 저 없어도 훨훨 날아다니던데. 저도 그동안 재활만 한 게 아니거든요!”
도리어 큰 소리 내는 지원의 모습에 우신은 어린 막냇동생 보듯 웃었다. 지원은 머쓱해하며 뒷머리를 긁적이고 물었다.
“그래서 언제 움직인다고요?”
“이틀 뒤가 디데이니. 우리는 더 부지런히 움직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