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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49)화 (149/183)

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49화

“내가 떠난 이상 이곤은 그곳에 묶여 있을 이유가 없었겠지. 그래서 힘으로 문을 부수고 나온 거고. 내 말이 맞지.”

내 말에 윤가경이 픽 웃었다.

그의 노트에는 이미 어린 이곤이 검은 연기에 휩싸여 문을 부수고 걸어 나오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기억보다 더 완벽한 추측이네.”

윤가경의 옅은 웃음에는 피로감이 묻어났다.

“나도 처음엔 죽은 줄로만 알았어. 그렇게 어이없게.”

“……그럼 정말 나한테 말했던 게 다 사실인 거야?”

“그래, 한영원은 살아 있어.”

그렇게 답한 윤가경의 손끝이 노트의 날카로운 모서리를 매만졌다.

* * *

연구실 출신의 피해 아이들은 사고 이후 정부로부터 꾸준한 상담을 권장 받았다.

윤가경 역시 두어 번 상담을 나갔으나 S급으로 각성한 날부턴 더 이상 상담을 가지 않게 됐다.

이유는 간단했다. 모두의 시선이 변했기 때문이었다.

피해 아동으로서 상담에서 털어놓은 이야기들은 각성 후, 약점이 되어 돌아왔다.

갑작스러운 세간의 관심 속에서 윤가경은 생각했다.

각성이 이리도 쉽고 별거 아닌 거라면 한영원은 왜 죽었어야 했을까.

그 생각이 그녀를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그 뒤 윤가경은 자신의 힘을 원하는 이들의 제안을 다 제쳐 두고 고시원에 처박혀 보조금만으로 연명했다.

매일같이 찾아오는 센터 감시관의 회유에도 꿈쩍하지 않은 채 좁은 방 안에서 서서히 말라 갔다.

그때 감시관의 입에서 의외의 말을 듣게 됐다.

“윤가경 에스퍼, 오늘도 절 이렇게 밖에 세워 두기만 할 겁니까?”

“할 말 없으니 가세요.”

이어지는 정적에 가경은 그가 돌아갔겠거니 하고 벽으로 돌아누웠다. 그때 갑자기 문이 덜컹거렸다.

그 소리가 거슬려 벌떡 일어나는데 문틈을 통해 종이의 모서리가 보였다. 잠시 주저하던 가경은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감시관이 종이만 밀어 넣은 채 자리를 피한 듯했다. 구둣발 소리가 점차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가경은 문을 열고 억지로 넣었다 구겨진 종이를 들었다.

들여다보니 편지였다.

아무 생각 없이 반듯하게 쓰인 글자를 읽어 내려가던 가경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이윽고 그는 맨발인 채로 감시관을 뒤쫓아 고시원 밖으로 나갔다.

가경이 따라 나올 걸 알았다는 듯 바로 앞에서 감시관이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가경은 충혈된 눈으로 그를 뚫어지라 쳐다보며 물었다.

“이거 뭐야.”

“보이는 그대로입니다. 센터에 윤가경 에스퍼 앞으로 온 편지를 전달한 것뿐이에요.”

“……이게 거짓말이면 내가 당신 죽여 버릴 거야.”

가경이 이를 갈며 말하자 감시관은 아직 다 태우지도 않은 담배를 눌러 끄며 답했다.

“얼마든지요.”

고대하던 답을 들은 듯 감시관의 안면 가득 만족감이 피어났다.

* * *

나는 가경의 손끝에서 그려지는 검은 양복을 입은 감시관을 내려다보다 물었다.

“그게 한영원 에스퍼에게서 온 편지였다는 말이야?”

“그래.”

“그걸 곧이곧대로 믿은 이유를 물어도 될까? 감시관이 줄곧 너를 노렸다면, 별수를 다 썼을 거 같은데.”

“네, 예측대로 연구소 출신 헌터들에게 물어 나와 한영원의 관계를 예측해 편지를 위조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이런 어구가 적혀 있었거든.”

윤가경은 그 말과 함께 줄곧 그림만 그려 오던 노트에 글씨를 적어 갔다.

선이 반듯하고 유려했던 그림과 달리 글씨가 삐뚤었다.

곧 삐뚠 글자들로 문장이 만들어졌다.

[내 선택이야.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당시 한계에 다다랐던 윤가경에게 그 메시지는 한 줄기의 빛이 됐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었다.

“감시과 제안대로 아카데미는 모두 이수했지만, 결국 센터에 입사하지는 않았어.”

가경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맞춰 보란 얼굴로 나를 쳐다봤고 나는 훤한 목덜미를 매만지다 답했다.

“아마 그 이후엔 한영원으로부터 편지가 안 와서겠지. 그래서 너는 한영원과의 연결고리를 따로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거겠고.”

내 말에 윤가경이 활짝 웃었다.

“정답.”

안면 가득 재미난 일이 있는 듯 웃는 그녀와 달리 나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일들투성이라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결론은 너도 아직 한영원을 직접 만난 적이 없다는 거잖아. 그런데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어? 그녀 능력에 대한 것도…….”

나는 말끝을 흐렸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가경의 눈이 무서울 정도로 집중력 있었기 때문이다.

묘한 광기가 묻어나는 안광에 움찔 몸이 떨렸다. 윤가경은 탁상 위에 올려져 있는 에스텔을 보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오늘따라 유달리 기분이 좋아 보였다. 소름 끼칠 정도로.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가경의 입이 열렸다.

“그래. 나는 수년간 편지 하나만을 추적하며 살아왔어. 영원이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녀가 조심스레 에스텔을 들어 올렸다.

“이런 일을 하다 보면 언젠가 영원이에게 닿을 날이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얼마나 꼭꼭 숨었는지. 증거가 좀처럼 안 보이더라고. 그게 서서히 날 무너트리고 있었는데…….”

“…….”

윤가경은 에스텔을 들어 머리 위 조명에 비추어 봤다. 빛이 투과되며 안의 노란 내용물이 반짝였다.

“오늘 이렇게 찾은 거야. 한영원이 살아 있다는 완벽한 증거를.”

가경은 가져온 노트를 몇 장 넘기더니 몇 달 전 내게 처음 지난 이야기를 해 줬을 때 그렸던 그림을 보여 주었다.

402번. 그러니까 과거 한영원을 그린 그림을.

나는 어째서 그 그림을 다시 보여 주는지 의아해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윤가경은 그림을 꼼꼼히 보라는 듯 그 장을 뜯어 앞장에 그린 양하나의 초상과 나란히 내밀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행동에 미간을 좁히자, 가경이 웃었다.

“이 수많은 아이 중 양하나와 한영원만의 공통점이 있어. 그게 뭘까.”

윤가경의 말에 양하나와 한영원의 초상, 그리고 연구실 내부에 있던 다른 아이들의 형상을 그린 그림을 차례대로 살폈고 이내 눈에 띄는 것이 들어왔다.

“양하나와 한영원의 옷에 달린 이름표만 검정색이야.”

“맞아. 그게 뭘 의미하는지도 알겠어?”

가경의 눈매가 휘었다. 그 순간 이천 게이트에서 내게 고백하던 한지원의 말이 머릿속을 강하게 가로질렀다.

‘여동생도 저와 같은 에스퍼고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왜 지금까지 새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오래전 동생과 헤어졌다는 한지원이 자기 동생이 에스퍼라고 확신할 수 있던 건, 헤어지기 전부터 동생이 이미 에스퍼였기 때문일 것이다.

“……402번은 나처럼 연구실에 들어올 때부터 에스퍼였구나.”

“그래. 내가 그때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 그건 바로 7년 전 연구실에서 진행된 실험이 하나가 아니라는 거야.”

* * *

연구실의 초기 설립 의의는 민간인 각성에 있었다.

하지만 연구는 순탄치 않았고 시행착오 끝에 각성에 성공한들 대부분 이미 몸이 망가져 버린 뒤였다.

새로운 시험 대상을 구하는 것도, 미력하게나마 각성한 에스퍼를 폐기하는 것도 어느 것 하나 효율적인 것이 없었다.

그 문제를 인식한 연구원들은 이미 각성한 에스퍼를 N차 각성시키는 연구를 감행했다.

윤가경의 말을 들은 나는 주먹이 희게 질릴 정도로 꽉 쥐었다. 그녀는 그런 내 모습을 유심히 바라봤다.

“알겠지만 각성한 순간 에스퍼에게는 지문 같은 고유의 에너지가 부여돼. 그때 이미 한계와 그릇이 정해지는데 연구는 그걸 인위적으로 확장 혹은 새 에너지의 주입을 해서 키워 냈어. 당연히 이전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냈고.”

윤가경의 말에 뒤통수를 강하게 맞은 기분이었다.

이곤이나 민지민과 7년 전 이야기를 할 때면 꼭 무언가 하나씩 빠트리고 이야기하는 듯했는데 이제야 아귀가 맞았다.

그때부터 각성한 에스퍼를 두고 강화하는 연구를 해 온 것이라면, 민지민의 말마따나 에스텔은 과거 연구의 부산물이 맞았다.

약을 먹는 것만으로 이상적으로 강해지니까.

‘물론 그 끝에 참담한 최후를 맞이하지만.’

나는 숨을 길게 내뱉고는 그렇게 말했다.

“그럼 그 말이 맞네. 7년 전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는 말.”

아직 눈앞에 나란히 놓인 어린 양하나와 한영원의 초상을 보고는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까지는 전부 알겠어. 알겠는데…….”

나는 말을 흐리곤 조용히 윤가경을 바라봤다. 그녀는 내가 흐린 뒷말을 예감한 듯 답했다.

“내 눈치 볼 것 없어. 그 연구를 왜 한영원이 이어서 하고 있냐고 묻고 싶은 거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영원이 살아 있다면 7년 전부터 지금까지 의도적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다는 거다.

그렇게까지 해서 이런 끔찍한 약을 만들어 내다니. 그 의중을 알 수 없었다.

“그래.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길래…….”

가족에게 연락 한 통 없이 말이야.

차마 뒷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슬금슬금 피어나는 지원의 생각을 떨쳐 내기 위해 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마 무슨 사정이 있을 거야.”

“…….”

“적어도 내가 아는 한영원은 제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은 못 하거든.”

그 말과 함께 마지막 순간 양하나가 혼자서만 탈출했다는 말이 겹쳐 들렸다.

기억에도 없는 일인데 가경 앞에만 서면 당장 어젯밤 내가 저지른 잘못처럼 손가락 끝이 저렸다.

나는 주저하다 말을 이었다.

“조사할 때 그 점을 꼭 상기하고 임하도록 할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였다. 나는 책상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 한 마디 더 보탰다.

“말하기 어려웠을 텐데, 흔쾌히 말해 줘서 고마…….”

“고마워할 필요 없어.”

그러나 가경은 기다렸다는 듯 내 말을 잘랐다. 그러고는 따라 일어났다.

“이제부터 양 헌터도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줬으면 하거든.”

이내 가경과 눈이 마주쳤다.

이제 보니 눈이 옅은 갈색빛이었다. 조명을 받은 눈동자에 이채가 돌며 반짝였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총기 있는 눈을 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의 환한 반짝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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