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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44)화 (144/183)

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44화

인파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자 비로소 그들이 열광하는 무대가 보였다.

무대는 사각의 링으로 한 발자국만 크게 나아가도 서로에게 닿을 정도로 비좁았다.

도망갈 곳 없는 그 좁은 무대에서 두 사람이 짐승처럼 싸우고 있었다.

머지않아 나는 그들이 에스퍼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엎치락뒤치락할 때마다 희미하게나마 빛나는 안광과 어설프게 링의 모서리마다 달린 정제석이 그 단서였다.

여기가 바로 불법 에스퍼 투기장인 듯했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벽면에는 방음벽이 갖춰져 있었다.

‘지하에서 이런 짓을 하고 있다니.’

일반인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힘과 신체를 지닌 에스퍼의 맨손 싸움은 눈요깃감으로 인기가 좋았다.

그래서인지 센터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불법 투기장이 꾸준히 생겨났다.

나는 주로 게이트를 전전했기에 이런 일에 파견된 적은 없었는데, 척 보아도 최대 규모로 손꼽힐 만한 곳이었다.

생각을 마친 나는 링 안에서 주먹다짐을 하는 두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승부는 거의 끝나 갔다. 푸른 스포츠 하의를 입은 에스퍼가 좀처럼 저항을 못 했다. 힘이 다 빠진 모양이었다.

두 에스퍼는 모두 잘 쳐 줘야 C급으로 보였다.

‘선수들이 맥을 못 추리는군.’

말이 투기장이지 위험하다고 여겨질 만큼의 수위는 아니었다. 집공팀의 대인전에 비하면 애들 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이내 이런 귀찮은 일은 민지민에게 넘겨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그러나 금방 우뚝 멈춰 섰다.

애초에 이곳 주소를 준 게 민지민이었다. 민지민이 이 광경을 몰랐을 리가 없다.

‘심각한 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한 건가.’

찝찝한 마음에 선 자리에서 생각을 거듭하고 있는데, 링 건너편에서 양복을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머리를 깔끔하게 올린 채 스리피스 정장을 갖춰 입은 남자는 왼쪽 가슴에 골드 버튼을 달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투기장의 관리자인 듯했다.

그가 내 시선을 잡아끈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는 다른 이들과 달리 링 안의 싸움에는 관심 없는지 전혀 들끓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때 남자가 호주머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내 링 안으로 던졌다.

마치 선수들이 힘이 빠지기만을 기다린 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이내 유리병이 두 사람 근처에 떨어졌다. 그걸 먼저 발견한 지고 있던 선수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마치 벼랑 끝에서 동아줄이라도 발견한 얼굴이었다. 곧장 그는 제 몸통 위에 올라선 남자를 걷어찼다.

그리곤 유리병을 낚아채 열곤 안에 있는 알약을 입 안에 쏟아 넣었다.

직후 벌어진 광경은 보고도 못 믿을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수의 눈이 갑자기 노란색을 띠며 형형하게 빛나더니 제게 달려오는 상대를 단숨에 깔아뭉갰다.

그가 힘을 사용하자 불길한 에너지가 내 팔뚝을 따라 소름 끼치게 달라붙었다.

더 보지 않아도 확실했다. 선수가 먹은 약이 내가 찾는 에스텔이었다.

흥분감에 인파를 파고들어 링으로 다가가 펜스를 잡았는데, 건너편의 관리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나를 발견한 관리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공간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보고 수상쩍어하는 눈이었다.

한편 링 안 선수의 발악에 현장 분위기는 점점 고조돼 갔다. 그 안에서 나와 관리자만이 소리를 지운 듯 숨을 죽인 채 서로를 응시했다.

그 침묵 속에서 먼저 등을 진 건 나였다.

내가 재빨리 들어왔던 출입문을 향해 달리자 남자도 서둘러 어딘가에 무전을 쳤다.

최대한 몸을 낮추고 인파를 뚫고 빠져나왔을 때는 이미 입구로 경비원들이 들어섰다.

지하에 대한 조사가 없던 터라 이 안의 구조를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결국 나는 모자를 더 깊이 눌러쓰고 되레 경비원들 쪽으로 과감히 다가갔다. 그러면서 최대한 여유롭고 느긋한 발걸음을 유지했다.

인상착의를 전달받지 못한 듯 경비원들은 나를 앞에 두고도 몰랐다.

그대로 빠져나가려는데 옆을 스치던 경비원의 인 이어를 통해 커다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 검정색 캡 모자를 눌러쓴 어린 여자애라고 몇 번을 말해!

고막을 뚫을 듯한 고함을 엿들은 동시에 경비원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는 본능적으로 들고 있던 야구 배트를 치켜들었다. 평범한 배트가 아니었다.

건물 앞을 지키던 경비원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에스퍼였다. 배트가 에너지에 감응해 이내 푸른 빛을 띠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수그려 공격을 피했다. 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간 배트는 그대로 무대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관중을 가격했다.

“으악!”

충분히 표적을 확인하고 제어할 수 있음에도 경비원은 눈앞에 보이는 사람을 무작위로 때려잡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시선으로는 끈질기게 인파 속에 도로 숨어든 나를 좇았다. 그의 눈이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 같았다.

이 무고한 희생이 모두 너 하나 때문이야 라고.

나는 혀를 차면서 아까 관리자가 있던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새 어디로 갔는지 관리자는 보이지 않았다.

어느덧 경기도 끝나 있었다. 당연하게도 후반에 약을 먹은 에스퍼의 승리였다. 무력했던 상대 에스퍼는 피 칠갑이 된 상태로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경비원들을 피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관리자가 있던 링 건너편까지 오게 됐는데, 무언가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내가 들어왔던 쪽의 출입구와는 다르게 생긴 문이었다.

붉은 페인트칠이 된 철문은 공간과 어울리지 않았다. 평소엔 암막 커튼을 쳐 놓는지 커튼이 문의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난 은밀히 주변을 살폈다. 아직 뒤에서 헤매고 있는지 경비원들이 보이지 않았다. 주저 없이 철문으로 다가가 문손잡이를 돌리려는 그때 내 손목을 누군가 낚아챘다.

상대는 순식간에 내 모자를 벗기더니 벽으로 몰아세웠다.

가깝게 밀착한 몸에 당황해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상황을 잊고 무어라 쏘아붙이려 했으나 얼굴을 확인하고 나니 입술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곤.”

“조용.”

그는 낮게 경고하며 고개를 내 쪽으로 깊게 숙였다.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에 인상을 찌푸리는데 문이 열리며 경비원이 나왔다.

경비원의 시선은 대번에 우리 쪽으로 꽂혔다. 하지만 조명도 꺼진 이런 구석진 곳에선 눈을 피해 붙어먹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곤과 나는 딱 그런 방만한 남녀로 보일 듯했다.

“아직도 못 찾았어?!”

이내 뒤따라 나온 다른 경비원에 의해 그는 시선을 갈무리했다.

“그런 인상착의를 한 여자애는…….”

“말대꾸할 시간에 움직여! 위층에 올라간 걸 수도 있으니 쥐 잡듯이 잡아!”

짧은 대화 뒤 경비원은 도로 암막 커튼을 치곤 위로 향했다.

경비원들이 완전히 사라지고서야 나는 이곤을 밀어 냈다.

“이만 떨어져.”

“…….”

이곤은 별 저항 없이 물러났다. 그가 뺏어 간 모자를 다시 꾹 눌러썼다.

그는 검정 항공 점퍼와 벙거지를 쓴 차림이었다. 도박장보다는 지하의 불법 투기장에 어울리긴 했다.

그 말인즉슨 나와 달리 애초부터 투기장의 존재를 알고 왔다는 뜻이다.

눈 감고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민지민이 보내겠다는 그의 대리인이 이곤이라는 걸.

“이제 완전히 민지민의 사람이 되기로 했나 보지.”

내 말에 이곤이 가늘어진 눈으로 대답했다.

“이럴 때는 고맙다는 인사가 먼저 아닌가. 방금 내가 위험 속에서 구해 준 거 같은데.”

“혼자서도 충분했어.”

“글쎄.”

묘한 신경전이 유치한 자존심 싸움으로 번져 가는 그때 옆에서 작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미안하지만, 저도 있거든요.”

고개를 돌리자 남색 캡 모자를 눌러쓰고 검정 마스크까지 쓴 남자가 보였다.

과한 차림에 내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리자 상대가 마스크를 내렸다.

“왜 얼굴을 찌푸리고 그래요, 사람 상처받게. 저에요. 희민이.”

곧장 드러난 박희민의 둥근 이목구비에 이곤을 봤을 때와는 달리 화들짝 놀랐다.

왜 박희민 가이드가 여기서 나와요, 라는 눈초리를 하자 박희민은 민망함에 헛기침했다.

“돈이 되는 일은 뭐든 하자 주의라서 일이 이렇게 된 거긴 합니다만, 설마 양 헌터를 마주칠 줄은 몰랐네요.”

그 말에 내가 이곤을 째려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박희민은 우리 둘 사이에서 다시 스파크가 튀자 달래듯 말을 이었다.

“제 복귀 도와줬다는 말 들었어요. 양 헌터. 고마워요.”

“……고맙다는 인사는 제가 먼저 해야 하는 걸요.”

박희민은 그제야 게이트 브레이크 현장에서의 일이 생각난 듯 얄궂게 미소 지었다.

“하긴 그때 저 좀 끝내주게 멋지긴 했죠.”

자존감이 높은 건 여전했다. 물론 잔뜩 기죽어 있는 것보다는 이편이 나았다. 한참 콧대 높게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던 박희민이 주변을 살폈다.

“그것보다 양 헌터도 같이 철수하는 게 어때요.”

“철수요? 하지만 아까…….”

“저희는 이만 철수할 생각이었거든요. 보다시피 단순 불법 에스퍼 투기장 같아서요.”

그의 말에 나는 하려던 말을 삼켰다. 아무래도 마지막 무대 위의 상황을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희민은 정리되고 있는 무대를 가리키며 말을 맺었다.

“아무리 봐도 애들 장난 수준의 격투고요.”

나 역시 그 장면을 보지 않았다면 희민과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에스퍼가 먹은 약이 마음에 걸렸다. 그 약을 먹은 기점으로 다 죽어 가던 에스퍼의 에너지가 비약적으로 폭발했다.

하지만 그건 박희민만의 생각인지 그의 말과 달리 이곤의 눈은 아직도 이 경기장의 모든 것을 경계하듯 예의 주시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곤만큼은 에스텔에 예민할 것이다. 그 역시 양하나와 마찬가지로 7년 전 연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니 말이다.

그때 이곤의 눈동자가 무언가를 포착하더니 조용히 따라갔다.

그 시선의 끝에는 조금 전 경기에서 이긴 에스퍼가 있었다.

그 에스퍼는 가운을 입고 지상으로 이어진 출입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직도 에너지가 감당되지 않는 듯 날이 선 채였다. 그 에너지가 살갗에 닿았다.

아무래도 이건…….

“따라가 봐야겠어.”

내가 할 말을 이곤이 먼저 뱉었다. 나는 그를 힐끗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이야.”

우리의 말에 박희민은 동감하지 못한다는 듯 기겁했다.

“설마 두 사람 지금 저 에스퍼를 따라가겠다는 건 아니죠?”

“아니면 여기 다른 사람이라도 있나?”

“죄송하지만 이제 곧 저희는 근무 시간도 끝나고 퇴근할 때 됐거든요? 야근 수당도 안 나오는데 도대체 왜.”

박희민이 이해할 수 없다며 투덜거렸지만 더 이상 들어 줄 수 없었다. 이미 에스퍼가 출입문을 열고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와 이곤은 걸음을 서둘렀다 그 모습에 박희민이 뒤에서 가만히 선 채 곤란하다는 듯 제 머리를 헝클이고 있자, 이곤이 이어셋을 통해 무전했다.

-박희민 가이드는 먼저 입구를 통해 나가 있으세요. 저것만 확인하고 양 헌터 데리고 나갈 테니.

페어로 온 두 사람 사이에는 무전기가 있던 모양이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누굴 짐짝 취급해. 나는 내가 알아서 해.”

“어련하시겠어.”

말싸움이 늘어질라 나는 입 다물고 빠르게 에스퍼의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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