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42화
8. 기원의 밤
-그래서 지금은 어디 있는 겁니까?
“방 밖으로는 한 걸음도 못 나가고 있어요. 아마 특수 마약반인지 그 일 처리 전까지는 여기 머물 거 같네요.”
재각성을 알린 방송 직후 센터 앞으로 몰려든 기자들을 피해 방에만 머물고 있었다.
내 넋두리에 수화기 너머로 이 팀장의 웃음이 흘렀다. 그의 웃음이 제법 호탕해 나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되물었다.
“뭡니까. 제 상황이 상당히 이 팀장님께 유쾌함을 준 거 같은데.”
-아니라고 부정은 않겠습니다. 새로운 S급 에스퍼의 출몰로 바깥은 어수선한데 정작 양 헌터는 남의 일처럼 한가한 게, 본인답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제가 한가한 것처럼 보이나요.”
내 물음에 잠시 수화기 너머가 조용하다 답이 이어졌다.
-나쁜 의미는 아닙니다. 그저 혹여라도 센터로 돌아갔다가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고 오델리아 전원이 양 헌터를 걱정했거든요.
수화기 너머 이 팀장의 목소리 뒤로 조이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걱정은 무슨 누가, 읍읍.
-제발 이럴 때는 조용히 하세요.
소란스러운 분위기 하나는 여전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 짓다 웃음기를 지우고 말을 이었다.
“박이설 헌터와 고우주는요.”
-이설 헌터는 컨디션 회복이 원래 더딘 편이라 요양 중이고 우주 역시 그제 퇴원했습니다. 두 사람 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
이 팀장의 말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수많은 말이 떠올랐지만 그 어떤 말도 뱉을 수 없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할지, 미안하다는 사과를 해야 할지 잘 모를 만큼 신세를 지고 말았다.
그 생각에 마른 입술을 지그시 무는데, 이 팀장이 나보다 한발 빨랐다.
-고마워할 것도 미안해할 것도 없습니다. 알고 있겠죠?
“그런가요.”
-양 헌터를 길드전에 끌어들인 건 어디까지나 우리 팀의 선택이었고 그에 따라 모두 ‘헌터’로서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거예요.
그의 말에도 내가 마음이 이토록 불편한 건 마지막 내 선택 때문일 것이다.
길드전에 참여한 이상 나 역시 오델리아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내가 내린 선택은 오델리아가 아닌 나를 위한 것이었다.
그 마음까지도 알아차린 것인지 이 팀장이 연달아 말을 보탰다.
-이런 말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저는 양 헌터의 그런 태도가 제법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
-자기 결정을 밀고 나갈 줄 아는 거.
“욕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요.”
내 말에 이 팀장은 쿡, 하고 웃었다.
-저는 그게 순수하게 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헌터 중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늘 정신 차려 보면 전 그 사람을 돕고 있었습니다. 꼼수나 편법이 없는 강함에 본능적으로 끌린 모양이죠.
“…….”
이 팀장의 높낮이 없는 목소리는 이따금 영혼 없이 무심하게 들릴 때가 있었다.
워낙 기준이 높아 칭찬에 박한데 가끔 하는 칭찬마저 이런 투이니, 어릴 땐 그가 참 멋없고 딱딱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고저 없이 건네는 모든 말이 진실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건 제법 외로운 일이라는 것도 압니다. 아무도 모르게 몸이 상하고 마음이 죽을 수도 있고요.
그의 목소리 위로 과거의 말이 겹쳐 들렸다.
‘네가 있어서 센터가 이만큼 발전한 거겠지만 그래도 가끔은…….’
그때나 지금이나 주저 없이 내게 손을 내미는 사람이 있단 사실에 가슴 언저리가 뜨거워졌다.
-언제든 우리가 필요해지면 오세요. 오델리아로. 양하나 헌터라면 늘 환영이니.
그의 한마디가 한마디가 진심이란 걸 이제 잘 알았다.
“……말뿐이라도 감사하나 사양하겠습니다.”
-…….
“대신 일이 끝나면 꼭 다시 찾아뵐게요. 그러니까 다들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계세요.”
말을 끝내자마자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놀라 뒤를 돌아 보니 눈을 끔뻑이고 선 강우신이 있었다.
“언제 왔어요?”
나는 거실 중앙에 걸린 벽시계를 쳐다봤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습니까?”
내 말에 우신이 멋쩍은 듯 제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답했다.
“미안해요. 노크했는데 대답이 없어서.”
그의 손에는 내가 건네준 내 방 복사키가 들려 있었다. 우신의 목소리가 들렸는지 이 팀장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다 괜찮지만 양 헌터는 그 가이드 앞에서 조금 물러지는 경향이 있는 거 같습니다. 앞에서 웃는다고 속까지 하얀 건 아니니 방심하지 말고요.
“다 들립니다.”
우신에게도 그의 말이 들렸는지 뾰로통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는 이 팀장에게 또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기 무섭게 우신이 가깝게 다가왔다.
“오델리아의 이필엽 헌터입니까?”
“잘 알고 있나 봅니다.”
“모른다면 거짓말이겠죠.”
우신은 이 팀장의 이야기를 별로 길게 하고 싶지 않다는 듯 내 어깨를 감싸고는 소파 쪽으로 이끌었다.
민지민은 약속을 지켰다.
하향된 에스퍼들을 원 상태로 복구시켰고 우신 역시 조사인 병실로 옮기지 않고 치료를 마칠 수 있도록 했다.
실상 치료 없이도 강우신은 괴물 같은 체력으로 곧장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가끔 보면 누가 이 남잘 가이드로 볼까 싶었다.
생각의 꼬리가 이어질 때쯤 소파에 나란히 앉은 우신이 내 얼굴 가까이로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놀란 몸을 굳히자 그가 심드렁하게 나를 바라봤다.
“오랜만에 보는데 대놓고 딴생각입니까.”
“오랜만이라기에는 사흘도 지나지 않은걸요.”
내 말에 우신은 서운하다는 듯 입매를 내렸다. 나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한 손을 내밀었다. 우신은 자연히 내 손을 맞잡았다.
우신에게 모든 걸 털어놓은 그 날, 해가 저물고 밤이 깊어질 때까지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내 말을 묵묵히 들어 줬다.
서초 게이트에서 끝내 그를 혼자 두고 갈 수밖에 없었던 선택에 대한 사과를 건넸을 때 우신은 태연히 답했다.
‘돌아와 준 것만으로 감사해요. 아주 오랫동안 보고 싶었어요, 선배.’
그날 이후 크게 변한 건 없었다.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분명히 남아 있었으니까.
다만 한 가지 확연하게 달라진 게 있었다.
‘지나치게 노골적이란 말이지.’
나는 내 손을 쥐고 가이딩하는 눈앞의 강우신을 조용히 살폈다.
그는 내 손가락 마디 깊숙이 깍지를 낀 채 꽉 쥐고 있었다. 작은 손이 그의 커다란 손에 잡아먹힐 듯 감싸졌다.
권총을 오래 쥔 듯 손바닥의 굳은살이 느껴졌다. 그 촉감이 거칠 법도 한데 당장은 따뜻한 온기만이 전해졌다.
한참 가이딩하던 우신은 내 길을 살피곤 괜찮네요, 라며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평소 가이딩도 만만치 않게 끈적였는데 이젠 숨길 생각도 없는지 전보다도 더 신경을 건드려 왔다.
꼭 어서 자길 건드려 달라고 말하는 듯했다.
나는 불손한 생각을 떨쳐 내려 고개를 저으면서 우신의 손을 놓았다.
“끝난 거죠?”
내 물음에 우신은 아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딩이 끝나자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시계 초침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의 고요함에 목이 절로 탔다.
정말이지 곤란했다.
나는 급히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리모컨을 집었다. 바로 티브이를 켰는데 마침 특수 마약반에 대한 재방이 방영되고 있었다.
나는 바로 티브이를 끄고 모르는 척하려 했다. 그 모습에 우신이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저거 때문에 사흘 동안 만나 주지 않고 기다리라고 한 거예요?”
정곡을 찔려 그대로 얼어붙었다. 투명한 내 반응에 우신이 미소 지었다.
“이럴 때는 거짓말 해도 되는데…….”
“……깜짝 선물이에요. 방송 보고 놀랐어요?”
“…….”
우신이 표정 변화 없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 시선에 민망해져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농담이에요. 웃어요.”
민망함에 붉어진 얼굴을 가리려 손을 올리는데 우신이 덥석 손을 잡았다.
“민망해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입 맞추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
갑작스러운 요청에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빤히 올려다봤다.
“……농담은 그런 식으로 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죠? 역시 강우신 가이드한테는 못 당하겠네요.”
머쓱해하며 그렇게 둘러대자 우신이 눈매를 예쁘게 접어 웃으며 답했다.
“농담 아닌데.”
내가 대답 없이 고개를 푹 숙이자 우신은 뭐가 그리 웃긴지 소리 내 웃더니 쥔 손등에 입술을 맞췄다.
“상태는 괜찮지만 항상 힘 사용 전에는 컨디션 확인하고 사용 후에는 저한테…….”
우신이 무어라 말을 이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그저 입술이 닿은 부분부터 몸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나는 힐끗 시선을 들어 우신을 쳐다봤다. 그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번 길드전 이후 조금 더 피부가 탄 듯했다. 결 좋은 머리칼을 타고 시선을 내리자 아래로 내리깐 속눈썹이 보였다.
생각보다 속눈썹이 길었다. 한 번씩 눈을 끔뻑일 때면 눈썹이 예쁘게 팔랑거렸다.
시선을 옮겨 반듯하게 높은 콧날과 시원하게 큰 입매까지. 입술이 오늘따라 유독 붉어 보였다.
이제 보니 어디 하나 모난 구석이 없었다.
아니 모나기는커녕 자꾸만 눈이 갔다.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올리는데 언제부터 나를 보고 있었는지 우신과 눈이 딱 마주쳤다.
“제 말 듣고 있어요?”
우신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럼요.”
“제가 뭐라고 했는데요.”
되묻는 말에 아무 말도 못 하자 우신이 조심스럽게 손을 놓아주었다.
“저도 그날 못다 한 말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