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40화
나는 종잇장을 한 장씩 넘기며 거침없이 형광펜을 그었다.
한 단계씩 하향된 박희민 가이드와 임태용, 반소희까지 모두 긋고 나서 명부를 반대편에 앉은 민지민 쪽으로 툭 던졌다.
“원래대로 돌려놔요.”
내 건조한 말에 민지민은 명부를 펴 보지도 않고 답했다.
“명령 불복종에 상사에게 상해를 입혀서 그건 좀 힘들겠는데.”
민지민은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되지도 않는 증거로 타겟팅 명령을 내린 건 그쪽이잖아요.”
“실수건 아니건 상부에서 명령이 떨어지면 그에 따라야죠. 까라면 까야 하는 거 양 헌터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않나?”
말꼬리를 잡고 빙빙 늘리는 행동에 나는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감이네요. 그럼 저도 제가 꼴리는 대로 그쪽 일에 협조하겠습니다.”
문을 향해 몸을 틀자 민지민은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되돌리는 건 어렵지 않지만, 안에서 생겨나는 텃세까진 모르는 일입니다.”
“언제부터 그걸 걱정했다고.”
민지민이 대답 없이 명부를 챙기는 모습에 나는 문 앞에 선 채 말을 이었다.
“하나 더. 길드전에서…….”
“왜 이렇게 급할까. 나도 원하는 건 받아야지. 홀라당 벗겨 먹고 저번처럼 도망가면 어떡해.”
상기된 그의 말에 표정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말씀하세요.”
지민은 기다렸다는 듯 테이블 위에 엎어 둔 전화기를 들어 누군가를 호출했다.
“지금 데리고 갈 겁니다. 말한 거 준비해 놔주세요.”
할 말 다 하고 유유히 전화를 끊는 모습에 저절로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말한 걸 준비하라니. 뭐죠?”
“왜 모르는 척이죠? 재검받을 겁니다.”
민지민은 내 등 뒤의 문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로 했죠?”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해도 웃음기가 지워지지 않더니 전부 이유가 있었다.
나는 별수 없는 상황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민지민과의 딜에서 재검사를 하겠다 나선 건 그게 바로 그가 가장 원하는 일인 걸 알아서였다.
계속해서 그가 내 주변을 맴도는 이유. 내 힘에 대해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 듯했다.
그의 의도를 알면서도 재검사에 응해 주며 적당히 장단만 맞춰 줄 생각이었다.
‘그렇다 한들 결과는 지난번과 다르지 않을 테지만.’
연구원들의 지시에 따라 순차적으로 검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민지민이 다시금 나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또 무슨 트집을 잡으려는지 짓궂은 미소가 깃든 얼굴에 나는 삐딱하게 서서 통창 너머로 그를 바라봤다.
“또 무슨 일이죠. 원하는 대로 재검사 끝냈는데.”
내 말에 민지민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건 양 헌터가 원하는 대로 한 검사죠. 이번에는 내가 원하는 대로 받아 줘야죠.”
“네?”
의중을 알 수 없는 말에 되묻자, 민지민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을 이었다.
“뭐 하세요? 어서 감응하지 않고.”
“……누구와 말이죠.”
“그건 본인이 더 잘 알 거 아닌가? 나는 잘 모르지.”
“…….”
눈을 가늘게 뜬 민지민은 연구진들은 볼 수 없게 입가 옆에 손바닥으로 벽을 세우고는 입 모양을 뻐끔거렸다.
‘그 황금색 에너지를 누구한테서 감응한 건지.’
재검사 하나에 허리 숙이고 들어올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지금껏 자기 입맛대로 나를 이리저리 굴리며 재던 민지민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거다.
생중계되는 길드전에 나서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 각오한 상황이긴 했으나 생각보다 더 본격적이었다.
지난번 재각성 검사에서는 원래 양하나의 등급인 C급이 떴다.
하지만 정신 감응을 사용한 채 등급 검사를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불길했다.
“…….”
나는 이 근방의 에너지에 집중했다. 감응 가능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눈앞에 있는 민지민밖에 없었다.
일부러 이 건물에 에스퍼를 남겨 두지 않은 거다. 왜 이렇게 아침 이른 시간에 불러냈나 했더니 작정한 모양이었다.
민지민의 능력을 감응했다가는 저 여우가 분명 알아챌 거였다. 피할 구멍이 없었다.
모든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기 무섭게 민지민은 제 승리를 예감한 듯 씩 입매를 올려 웃었다.
“뭐 하세요? 어서 재검사하지 않고? 참고로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얼마든지 재검사할 테니 수 쓸 생각은 마시고요.”
“……미친 새끼.”
“칭찬 고맙네요. 양 후배.”
* * *
사복으로 갈아입고 탈의실로 나오자 민지민이 붙여 둔 직원 둘이 서 있었다.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도망이라도 갈까 신경이 곤두선 모양이었다. 나는 얌전히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뒤를 따랐다.
안내 끝에 도착한 방에는 민지민 혼자였다. 내가 방 안에 들어와서도 선뜻 앉지 않자, 민지민이 입을 열었다.
“양 헌터 위해 만든 자리인데 앉죠. 나한테 더 확인하고 싶은 게 있던 거 아닌가요.”
뜻대로 움직여 주니 말을 들어 줄 마음이 생긴 모양이었다.
참 단순했다.
나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찻잔 안에 막 우린 찻잎이 보였지만, 시선만 줄 뿐 바로 입을 열었다.
“길드전에서 봤습니다.”
민지민은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고는 되물었다.
“뭘 말이죠.”
“피를 토하며 즉사하던 에스퍼요. 정확히는 성은 길드의 당신과 연결되어 있던 에스퍼들이죠.”
몸 안의 장기가 파열된 듯 그들의 입 안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었다. 그전까지 아무런 징조도 없다가 말이다.
이후 타인의 장기에 손상을 줄 수 있는 능력자가 있는지 확인해 봤지만 그런 능력자는 없었다.
“그 길드가 저와 연결되어 있다고 벌써 확신한 겁니까.”
“당연하죠. 이곤 헌터와 강우신 가이드를 그곳에 넣은 것도 당신이니까.”
주저 없는 대답에 민지민이 픽 웃었다.
“근거도 없이 더럽게 당당하네요.”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겁니까.”
당황하는 기색이라도 내비칠 줄 알았는데, 지민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찻잔을 내려놓으며 답했다.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저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
“감시과의 최강혁 감시관을 알고 있죠.”
“모를 수가요.”
민지민과 페어를 이뤄 꼬투리 잡을 일만 생기면 귀신같이 냄새를 맡고 나타나는 남자였다. 그의 이름에 내 미간이 저절로 좁혀졌다.
“최강혁과 제가 주축이 돼 조사하고 있는 사건이 있습니다.”
대화의 방향이 미묘하게 다른 곳으로 기울어졌다. 나는 잠시 그 점을 지적할까 했지만, 검지로 탁상을 몇 번 두드리다 순순히 답했다.
“뭐죠.”
“7년 전 겨울, 게이트 브레이크에 휩쓸려 화재가 난 연구실.”
익숙한 이력에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지금 그 일을 다시 조사하고 있다는 겁니까?”
나 역시 지금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이 그 일의 반동이지 않을까 오래 의심해 왔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배후와 민지민이 연결돼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했다. 확인되기 전까지 먼저 패를 보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화제가 민지민의 입에서 먼저 나올 줄이야. 그것도 조사 중인 사건이라는 명목으로 말이다.
“화재로 인해 당시 연구 자료는 모두 소실됐지만, 실제 화재가 나기 한 달 전 이미 연구 중단 및 자료 폐기 처분을 받았습니다.”
“센터로부터요.”
“맞아요. 에스퍼 강화 증진 훈련이란 이름으로 인권 유린 문제가 드러나 폐지됐다고 하죠.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는요.”
“…….”
민지민은 비밀 이야기를 하듯 몸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실상은 그곳에서 인위적으로 에스퍼를 만드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
모두 이곤과 윤가경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2차 성징 전의 아이들이 각성할 확률이 높다는 통계를 바탕으로, 어린아이들이 피험자로 착취되는 등 반인류적인 실험이……. 별로 안 놀라네요?”
민지민은 말끝을 흐리다 내리깐 시선을 들어 나를 바라봤다.
“우리 툭 까 놓고 말해 보죠. 자료에는 쏙 빠져 있지만 양하나 헌터 역시 게이트 연구원의 자녀인 동시에 피해자 아니던가요.”
나는 최대한 덤덤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게 지금 길드전에서 일어난 일과 관계가 있는 건가요.”
“말이 통해서 좋네요. 길드전에서 문제를 일으킨 두 사람은 일 년 사이 능력이 비상식적인 속도로 급성장한 에스퍼들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중심에 신마약이 있다 보고요.”
마약이라는 말에 내 표정이 딱딱하게 굳자, 그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니 제가 양 헌터를 의심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양 헌터 역시 이 몇 달 사이 급성장을 보였으니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민지민이 말한 신마약과 과거 실험의 연관성은 조사해 볼 필요가 있어 보였다.
“두 헌터 모두 약물 중독 의심인 상황으로 길드전 이후 조사할 예정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됐네요.”
“…….”
“가장 가까이에서 본 양 헌터라면 알겠죠? 아주 위험한 약물이 지금 시중에 돌고…….”
“그래서요.”
답지 않게 말꼬리가 길어지는 걸 보니 끝에 폭탄을 터뜨릴 작정인 듯했다. 나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그의 말을 잘라 물었다.
“본론이 뭡니까.”
민지민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저는 누군가 7년 전 그 연구를 이어 진행하고 있다고 추측합니다. 그 산물이 신마약이고요.”
충분히 가능성을 열어 둘 만한 이야기인 동시에 내가 민지민을 의심하고 있던 문제들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답변이었다.
마치 내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단 것을 안다는 듯.
“감시과에서 이 사안을 아주 중대하게 보고 있어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함부로 의심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결과도 조작…….”
질책하듯 말하다 보니 놓치고 있던 게 떠올랐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그를 쳐다봤다.
“나를 의심한 이유가 비약적인 성장 때문만이 아니군요.”
내 대답에 민지민이 방긋 웃었다.
“자료도 없는 7년 전 연구를 이어서 진행할 만한 사람. 과거 연구와 관련된 사람이어야 당위성이 있겠죠.”
그의 가늘어진 시선에 나는 이를 아득 물었다.
“설마 지금 저를…….”
“고인이 된 자기 부모의 연구를 완성시킨다, 이 얼마나 시나리오가 턱턱 맞습니까.”
민지민은 내 말을 툭 자르고서는 말을 이었다.
“아니라면 직접 증명하세요. 마침 관심도 많은 거 같은데.”
나는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언론에는 어떻게 보도할 겁니까? 뉴스에서 딸랑 지운다고 지워질 문제가 아니던데요. 이미 본 눈이 많은지라.”
“그건 내일 직접 확인하세요. 그걸 보면 양 헌터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뭘지도 쉽게 알 수 있을 겁니다.”
말을 마친 지민은 한쪽 눈을 깜빡이며 윙크했다.
얄미운 새끼, 판이 제 뜻대로 돌아가는지 아주 신나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