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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39)화 (139/183)

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39화

우신이 헐겁게 무너트려 보여 준 기억 속에서 그는 항상 성시현의 등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엉겨 붙는 그의 진득한 기억에 내가 힘겹게 그의 손을 밀어 내며 숨을 골랐다.

뜨겁게 열이 오른 얼굴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몰아치는 기억이 버거운 탓인지 아니면 정말 ‘성시현’을 향한 그의 날것의 마음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우신은 내 손이 빠져나간 빈손을 가만히 바라보다 주먹을 꽉 쥐었다.

“저도 처음부터 제 마음을 자각한 건 아닙니다. 아카데미에 다닐 적만 해도 저같이 성시현 헌터와 일하고 싶어 센터를 지원하는 에스퍼고 가이드가 많았으니까.”

“…….”

“하지만 센터에서 다시 선배를 봤을 때, 비로소 알았습니다. 동경 같은 희멀건 감상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고.”

초봄에 들어설 무렵 집공팀 막내로 들어왔던 그를 기억한다. 나를 바라보던 강렬한 시선과 함께 자신을 소개하던 목소리까지도.

그것들을 조용히 곱씹는데 우신이 말을 이었다.

“이기적인 말이지만 선배가 오랫동안 짝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찌나 기뻤는지……. 오랫동안 비어 있던 그 옆자리를 차지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에요.”

“…….”

“그런데 실상 저는 C급 가이드였습니다.”

모든 걸 덤덤하게 설명하는 우신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그늘에서 제 이야기를 하던 우신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렇게 남의 이야기 하듯 객관적이고 절제된 목소리였는데, 그때는 그게 전부 지나간 일이라 그런 줄 알았다.

같은 얼굴과 목소리인데도 지금은 달리 보였다. 그는 그저 최대한 마음을 누르며 덤덤한 척하는 것뿐이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차례가 오길 기다리는 일뿐이었고요.”

이야기를 다 듣고 보니, 가이딩실 앞에서 제 차례를 기다렸을 그의 무력감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테이블 위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꽉 주먹 쥔 그의 손을 마주 잡아 주고 싶었다.

본능처럼 그리로 손을 뻗는데 이를 아득 물고 있던 우신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기어코 내가 선배를 죽게 했어요.”

자조적인 목소리와 함께 흘러나온 그의 말에 나는 사색이 돼서 반박했다.

“그건 사고야……!”

“알아요.”

우신이 나를 올려다봤다.

“분명 아는데, 어떤 말을 해도 누가 책임을 진다 해도 선배가 돌아오지 않는 건 사실이잖아요. 아직 아무것도 전하지 못했는데…….”

“…….”

“제가 오랫동안 품은 감정은 동경 같은 게 아니라고.”

지금까지 담담하게 잘 이야기해 오던 우신의 목소리가 떨렸다.

“선배를 아주 많이…….”

우신은 채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니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제야 내가 아주 큰 오해를 했다는 걸 알았다.

그동안엔 꿈과 야망을 품고 센터에 들어온 어린 후배에게 거대한 트라우마와 짐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그 탓에 그가 6년 전과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된 데다 어울리지 않게 센터에 묶인 거라고.

그렇기에 이곤의 말에도 쉽사리 수긍했었다. 그가 나를 증오하고 있으리라고.

“…….”

하지만 아니었다. 차라리 내가 우려했던 모습 그대로 그가 나를 증오하고 배신감에 치를 떠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몰랐다.

그건 내가 견디면 되는 문제니까…….

하지만 그의 진심을 마주하니 세상이 무너지는 거 같았다.

혼자 긴 시간을 어떤 생각과 자책으로 살았을지 나는 감히 예상할 수조차 없었다.

나는 우신의 주먹 위로 손을 올렸다.

“고개 들어요.”

“…….”

“강우신 가이드.”

“…….”

대답 없이 고개 숙이고 있는 주제에 그는 내 손이 닿자마자 슬그머니 손을 풀었다.

얼마나 주먹을 세게 쥐고 있었는지 손톱에 안쪽 살이 파여 피가 옅게 스미고 있었다. 나는 그 상처를 쓰다듬었다.

뒤이어 나직한 목소리로 그를 다시금 호명했다.

“대답 계속 안 할 겁니까?”

“…….”

“얼굴 좀 보여 줘. ……우신아.”

그는 그제야 붉어진 눈가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막상 눈이 마주치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몹시도 미안해서 무슨 말이라도 꺼냈다간 목소리가 형편없이 흔들릴 거 같았다.

내가 아무 말 없이 떨려 오는 입술을 앙다물고 있자, 그의 붉은 눈매가 살짝 휘어졌다.

“날 왜 그렇게 불러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을 거면서…….”

“…….”

우신의 과거에서 성시현이 어린 우신에게 했던 그 말.

‘약속할게.’

그건 분명 이천 게이트에서 내가 그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그때 나를 끌어안고 왜 그렇게 서럽게 울었나 했더니. 어쩌면 우신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우신의 처절한 목소리가 계속 귓가를 울렸다.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을 거고, 물어보지도 않을 테니까.’

끝없는 절망을 감당하면서까지 내 뒤를 쫓는 이 남자에게 나는 어떤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를 짓누르는 죄책감을 덜어 줄 수 있을까.

내가 아무 대답도 못 하고 있자, 우신이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을 붙여 왔다.

“괜찮다면 좀 안아도 될까요? 추워서.”

그답지 않게 끝에 붙인 핑계가 어설펐다. 나는 별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얼마든지.”

내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가 내 쪽으로 건너와 나를 안아 들었다. 깨어난 직후라 몸에 힘이 잘 안 들어갈 텐데도 그는 나를 번쩍 안아 든 채로 힘을 주었다.

그의 두 팔에 둘러싸이자 얼굴이 자연히 그의 가슴팍에 묻혔다. 막상 그가 나를 깊게 끌어안자 온기에 녹아 드는 건 나였다.

그의 체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꼭 가이딩을 받는 것처럼 마음이 진정됐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생각이 많았다. 그의 진심 앞에서도 해결해야 할 산더미 같은 현실의 문제를 떠올렸다.

그것들을 모두 해결해야만 비로소 그의 곁에 선배로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게 부질없이 느껴졌다.

나는 그의 숨소리를 가만히 듣다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사과받으려고 한 말 아니니까. 사과하지 마요. 제 마음이 모두 거절당하는 거 같으니까.”

그도 긴장이 풀렸는지 목소리가 평소와 같았다.

그의 품 안에 묻혀 있는 탓에 지금 우신이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억지로 보지 않기로 했다.

“강우신 가이드.”

“말하세요.”

“있잖아요. 나는 지금껏 살면서 사명 같은 거 벗고 그냥 누군가와 단둘이 평화롭게 살고 싶다, 그런 생각 같은 거 해 본 적 없어요.”

“그런가요? 저는 매일같이 한 생각인데.”

그가 능글맞게 미소 지었다. 방금까지 울었으면서 내가 우울한 감상에 빠져드는 건 싫은 모양이었다.

조용히 그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자 그가 고양이처럼 얼굴을 비벼 왔다.

내게 안식이 온다면 그건 죽음일 것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지난 생에서 그런 선택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온전히 집중하고 싶은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분명 좋은 일이 생기고, 그렇게 마주친 찰나의 행복이 살아갈 힘을 준대.’

어떻게든 수아를 잡기 위해 에세이집에 나올 법한 말을 흉내 냈었다.

그땐 확신 없이 한 말이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와 함께라면 평온한 안식을 꿈꿀 수 있으리라.

나는 그 모든 사족을 지운 채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까 그랬죠. 동경 같은 게 아니라고. 선배를 아주 많이…….”

“…….”

“그다음 말이 듣고 싶은데.”

그의 고요한 눈동자가 나를 담았다. 몸을 딱 붙이고 있는 탓에 우신의 심장 소리가 빨라지는 게 선명하게 들렸다.

이것마저도 귀엽게 느껴진다면 이미 그에게 푹 빠진 게 아닐까.

나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어때요. 이번에야말로 내게 그 말을 해 주는 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이러는 거죠.”

그리고 눈가만큼이나 붉은 입술에 쪽 소리 내며 입 맞췄다.

“당연히요.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늦었지만 약속 지키러 왔는데 이제는 내가 누군지 잘 알겠어요?”

내 장난스러운 물음에 우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독할 정도로요. 평생을 선배만 눈에 담았으니까.”

이 사랑스러운 남자를 위해 용기를 내기로 했다.

“지금부터 내가 할 말은 조금 길고 어쩌면 지루할 수 있는 이야기예요.”

그가 그런 것처럼.

“……그래도 들어 줄래?”

우신은 기다렸다는 듯 내 이마에 부드럽게 입맞춤하며 답했다.

“얼마든지요.”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평안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니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불안함과 초조함에 몸을 가만히 놔두지 못했는데, 우신과의 짧은 몇 마디가 안식의 파도가 되어 내 마음속에 밀려들었다.

나는 다가올 폭풍은 모른 척하며 그의 품 안에서 못다 한 이야길 꺼냈다.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멈춰 세상에 오직 그와 나 단둘만 남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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