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38화
우신의 혼잣말에 시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내 굳게 다물어져 있던 입술이 열렸다.
“별님?”
시현의 되물음에 우신은 그제야 제 동생이 붙인 별칭으로 그녀를 불렀다는 사실을 깨닫곤 두 뺨을 붉혔다.
“내, 내려 주세요.”
당황한 채 말하자 곧바로 바닥에 두 다리가 닿도록 내려 주었다.
두 발을 딛고 선 우신은 그제야 눈앞의 여자를 온전히 볼 수 있었다.
몸에 달라붙는 검은 작업복과 방검 조끼까지 착용한 그녀는 그림자 같은 차림과는 달리 눈에 띄는 머리 색을 지녔다.
이내 가슴께에 박힌 자수가 보였다. ‘성시현’이라는 이름 석 자였다.
우신이 조용히 시현을 살피자, 시현 역시 우신의 이곳저곳을 눈대중으로 살피더니 이어셋을 통해 무전했다.
-B구역에서 생존자 발견했습니다.
“…….”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중학생이에요.”
우신이 단번에 반박하자 시현은 잠시 그를 내려다보다 말을 정정했다.
-아, 음. 중학생 남자아이로 발목에 경미한 부상이 있는 듯합니다. 직접 이송 불가피하니 지원팀 보내 주세요.
자신의 어디가 초등학생으로 보인다는 건지, 정말 눈썰미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기 무섭게 제 발목 부상에 대해서는 정확히 꿰뚫고 있어 놀라웠다.
그녀의 말처럼 아주 가벼운 정도라 티도 안 났을 텐데 말이다.
‘바닥에 내려 줄 때 발목이 시큰거려서 움찔했는데 그걸 본 건가.’
눈썰미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런 시답지 않는 생각을 하던 중, 우신은 더 이상 손이 떨리지도 속이 매스껍지도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작 저 헌터가 곁에 있는 것뿐인데 말이다.
우신은 어쩐지 이상한 기분에 그녀를 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쪽이 성시현 헌터예요?”
우신의 말에 시현은 시선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알고 있나 보네.”
“이름 정도만요.”
우신은 괜히 뾰로통한 얼굴로 답했다. 시현은 개의치 않은 듯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우신은 어째서인지 그 얼굴이 눈에 밟혔다.
수빈의 말을 전부 귀담아들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제가 오후에 봤던 뮤지컬 속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히어로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오히려 이쪽이 더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적어도 유치하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에 젖어 들 때, 주위를 살피던 시현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괜찮다면 다시 안아도 될까. 지원팀이 올 때까지 있으려고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거든.”
시현의 불친절한 설명을 가만히 듣던 우신의 눈매가 가느다래졌다.
그녀가 어딘지 모르게 지쳐 보였기 때문이다. 평범한 중학생인 제 눈에도 지친 게 보일 정도라면 아마 무리한 게 아닐까.
“큰일이 아니라면 지원팀이라는 거 기다릴게요.”
우신의 말에 시현은 곤란한 듯 제 아래턱을 긁적였다.
“그게 말이지…….”
고민 끝에 부연 설명을 붙이려는 그때, 시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러고는 빠르게 우신의 둥근 머리통을 감싸고는 테이블 뒤에 몸을 숨겼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맹수처럼 날쌘 움직임이었다. 상황 파악하지 못하는 우신을 시현이 제 쪽으로 끌어안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가만히.”
시현의 말이 끝맺기 무섭게 그녀가 걸어온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시현이 걸어올 때와는 사뭇 달랐다. 사람의 발걸음이 아닌 거대한 물체가 바닥을 쓸고 다니는 듯 무게감이 느껴지는 소리였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게이트 브레이크로 튀어나온 몬스터였다.
몬스터가 가까워짐에 따라 숨을 내쉴 때마다 입김이 뿌옇게 번졌다. 주변이 추워지고 있었다.
-B구역 살무사 출현.
몇 번 더 이어셋을 통해 상황을 알리던 시현은 이어셋에 문제가 있는지 그것을 툭툭 치다 또 이러네, 라며 귀에서 빼 버렸다.
그 모습에 우신이 불안한 눈초리를 보이자 시현의 눈이 잠시 커졌다 돌아왔다.
“이제야 지 또래 같은 얼굴을 하네.”
알 수 없는 말을 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있어 볼래. 아까처럼 여기 가만히 있으면 돼, 어렵지 않지?”
달래듯 말한 시현은 허리춤의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려 했다.
그 순간 우신이 시현의 옷깃을 잡았다. 시현뿐만 아니라 옷깃을 잡은 우신마저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도 모르게 손이 먼저 나간 것인지 우신이 당황해서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시현은 검 손잡이에 손을 가만히 올리고는 행동을 멈췄다.
그제야 우신의 안색이 급격히 질려 가는 게 보였다.
침착한 얼굴이라 겁에 질린 건지도 몰랐다. 하긴 이런 상황에 두려움에 떨지 않을 애가 어디 있을까. 당장 우신의 마음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잘 알 것이었다.
게이트 브레이크로 혼자 남아 무력감에 떠는 마음을 말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괜히 자신과 아이가 겹쳐 보였다.
그 당시 자신은 오롯이 홀몸으로 그 시간을 견뎌야 했지만 이 아이는 그러지 않아도 됐다.
왜냐하면 지금 이 아이 옆에는 그녀가 있으니까.
시현은 살무사가 육중한 몸을 움직이며 건물 복도를 지날 때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는 서둘러 우신을 불러 세웠다.
“꼬마야.”
살무사가 가까워지는 듯 꼬리로 물건을 부수는 소리가 근접한 곳에서 들려왔다.
엄습하는 공포감에 우신의 안색이 퍼렇게 질렸다.
시현은 가까워지는 소리에도 동요 없이 우신에게 집중했다. 우신이 대답이 없자 그녀는 무릎을 구부려 앉아 우신과 시선을 마주했다.
“나를 알고 있다고 했지? 그럼 내가 얼마나 대단한 에스퍼인지도 알고 있겠지.”
“……동생에게 들어 이름 정도밖에 몰라요.”
겁에 질린 와중에도 솔직하게 할 말을 다 하는 모습이 어딘가 귀여웠다. 시현은 픽 웃고는 다시금 우신에게 말을 붙였다.
“네 이름은 뭐야.”
우신은 옅게 떨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답했다.
“……강우신이요.”
“우신아. 날 봐.”
그렇게 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신이 겨우 눈을 맞춰 왔다. 시현과 눈을 마주하니 일순 걷잡을 수 없을 것 같던 떨림이 멈췄다.
사진으로 볼 때는 몰랐는데, 머리카락뿐이 아니었다. 눈동자 역시 밤하늘의 별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시현은 그런 우신의 생각을 들여다보듯 말을 이었다.
“내가 누군지 잘 모른다고 했지? 지금부터 누나한테만 집중해. 다른 건 아무것도 보지 말고. 그럼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보여 줄게.”
“…….”
시현이 옅게 웃고는 다시 검에 손을 올렸다.
“내가 다시 네 앞에 왔을 땐 모든 게 괜찮아져 있을 거야.”
옅게 빛나던 머리칼의 색이 더 환해졌다.
눈앞에서 강한 힘을 내뿜는 에스퍼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단순히 ‘강함’만을 강조하던 매스컴 보도들과는 달랐다.
그들의 힘은 강한 동시에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우신의 짧은 인생에서 본 그 무엇보다도 말이다.
우신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어쩌면 제 눈앞에 있는 이 헌터만 다른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할게.”
그리 말한 뒤, 시현은 주저 없이 사무실로 들어선 살무사에게로 튀어 나갔다.
큰 키인데도 가벼운 몸체가 날렵하게 움직여 살무사의 등 뒤로 향했다.
아가리를 벌리고 날카로운 이로 독을 뿜어내는 살무사의 공격에도 시현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는 장검으로 단번에 저를 공격해 오는 살무사의 꼬리를 순식간에 도려 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괴물을 상대하면서도 눈의 이채를 더해 갔다.
오히려 제 앞에 있을 때보다 몬스터와 싸우는 지금이 더 생기 있어 보였다.
“…….”
우신은 그 모든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봤다.
티브이에서 처음 봤을 때만 해도 그녀의 환한 머리칼이 생존에 짐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렇지 않았다.
우신의 예측은 틀렸다. 아니, 전제부터 잘못됐었다. 시현은 애초에 모습을 감출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강했다.
덕분에 그녀의 전투는 생존이 아닌 길잡이가 되었다.
뮤지컬에서의 가짜 가발과는 감히 비교도 안 되는 빛나는 머리칼이 어둠 속에서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덕분에 우신은 눈으로 시현을 쉽게 좇을 수 있었다.
그 빛은 거짓말처럼 더 이상 어둠을 무섭지 않게 만들어 줬다.
아까까지 불안함에 질식할 거 같았는데, 존재만으로 안심이 되었다.
아마 그때부터일 것이다. 에스퍼가 아닌 가이드를 꿈꾼 것이.
저런 강함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고 싶다고, 우신은 뛰는 가슴을 한 손으로 누르며 그렇게 꿈을 품었다.
* * *
우신이 던진 말이 파문을 일으킴과 동시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게이트 브레이크 현장에서 만났던 어린 남자아이. 그가 우신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때가 생각날 것도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번뜩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때는 아직 공격 1팀이 만들어지고 1년도 채 지나지 않던 시점이다.
오래전 일이긴 했지만, 기억 못 할 일도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깜깜한지.
혼란한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데 우신이 말을 이었다.
“그 한 번의 만남이 제 평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겁니다.”
“…….”
“매 계절 각성 센터를 조급한 마음으로 찾았고, 센터 취직을 위해 공부와 운동 어느 것 하나 게을리하지 않았어요.”
내 손을 잡은 우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왜겠습니까? 단지 팬이라서? 글쎄요. 저는 그 사람의 옆에 섰을 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 생각 하나로 선배의 뒤를 쫓아온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