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27화
“무슨 일이죠.”
“박이설 헌터가 시간을 벌어 주고 있는 지금 최대한 멀리 떨어져요.”
내 말에 이 팀장은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도망가자는 뜻인가요? 양 헌터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차라지 한 마리일 때 태워 죽이는 게 낫다고.”
“알고는 있지만…….”
그의 말처럼 흑호의 움직임이 제한된 지금 처리하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흑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이 에너지가 자꾸만 나를 그쪽으로 잡아당기는 거 같았다.
난생처음 보는 저 몬스터의 에너지가 오랫동안 함께한 친구처럼 느껴지다니 불길하기 그지없었다.
“…….”
하지만 이 팀장을 설득할 만한 이유가 필요했다. 나는 잠시 머리를 굴리다 입술을 떼었다.
“……불길합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직감이요.”
타당한 이유 같은 건 없었다.
자신감 없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이 팀장이 손을 높게 치켜들더니 철수 명령을 외쳤다.
“빠르게 이 지역을 빠져나간다.”
이 팀장의 오더에 오델리아의 멤버들은 주저 없이 무기를 집어넣고 짐을 챙겨 들었다.
원래 진행 방향으로 빠르게 뻗어 나가려는 그때 누군가 시야에 들어왔다. 수풀 속에 갈색 로브를 깊게 눌러쓴 남자가 우뚝 서 있었다.
움직임이 전혀 없던 탓에 사람이라고 인지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급히 다리에 힘을 주고 걸음을 멈췄다.
이 팀장은 이어셋을 통해 소리쳤다.
-양 헌터 전방에 타 길드원 발견. 모두 자리 유지해!
오델리아의 멤버들은 일사불란하게 로브를 쓴 이를 둘러싸듯 자리를 잡았다.
그때까지도 그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멤버들이 각자의 위치에 안착한 걸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당신이 저 언데드를 소환한 에스퍼입니까.”
내 물음에 그는 대답 대신 태연한 움직임으로 쓰고 있던 로브의 후드를 벗었다. 그 행동에 나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갈색 로브를 본 순간 단번에 성은 길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성은 길드의 상징과도 같은 갈색 로브.
그들은 길드전 시작과 동시에 철탑을 거점으로 차지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형세는 마지막 날까지 유지되고 있었다.
길드전이 열린 이래 유례에 없던 행보였다.
그들은 강박적으로 모습으로 내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상대는 자연스럽게 후드를 벗어 내렸다. 예기치 못한 행동에 몸이 일순 굳었다. 자연히 로브 안의 얼굴을 유제이로 겹쳐 보았는데…….
“……우리 초면이군요.”
거기에는 전혀 모르는 앳된 얼굴의 남자가 있었다. 크고 둥근 눈의 초점이 묘하게 어긋나 보였다.
내 반응에 남자가 불쾌한 듯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누굴 기대한 건지, 실망한 표정이 너무 역력한 거 아니에요? 난 이렇게 만나게 돼서 좋은데.”
“…….”
“사진보다 실물이 더 어려 보이네요.”
묘한 긴장감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어지는 침묵이 지루했는지 목소리 한 번 듣기 어렵다고 투덜거렸다. 그러고 나서 제 입 주변으로 확성기처럼 양손을 모으더니 크게 소리쳤다.
“뭡니까. 기껏 판을 다 만들어 놨는데 도망이나 가려고 하고 실망입니다.”
그는 정말 실망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마른침을 넘기고 입술을 뗐다.
“다시 묻겠습니다. 그쪽이 흑호를 우리 쪽에 보낸 소환사입니까?”
“아까부터 흑호, 흑호. 저 몬스터 말하는 건가요? 그게 뭐 중요하다고 내 질문에는 대답 하나도 안 하고.”
“혼자 온 이유는 뭐죠. 팀 분열이라도 났나요.”
“아, 내가 왜 혼자 왔는지 궁금해요?”
그는 그제야 구미가 당기는지 어깨를 들썩였다.
한편 내가 상대와 질문을 주고받는 틈을 타, 다른 오델리아 길드원끼리 신호를 주고받았다.
신호 끝에 남자의 바로 등 뒤에 자리 잡은 고우주가 보조 무기로 들고 있던 총을 빼 들었다.
그러고는 누군가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남자의 가슴께를 조준했다.
방아쇠에 손을 올리는 데 언제 넝쿨에서 풀려났는지 흑호가 바람 같은 속도로 날아와 고우주를 물어 챘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박이설이 비명을 질렀다.
넝쿨이 풀렸다면 가장 먼저 박이설이 알았을 텐데,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무슨 짓을 한 게 분명했다.
흑호는 주저 없이 고우주를 물고 철탑이 있는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경악한 길드원들이 눈앞에 있는 남자와 흑호를 두고 갈팡질팡했다. 오직 이 팀장만이 차분함을 유지한 채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고우주가 먼저다! 선발부터 빠르게 몬스터를 쫓아!
번개처럼 떨어진 명령에 주저하던 오델리아의 길드원들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나도 몸을 돌려 따라 달려가는데 남자가 바짝 따라붙었다.
그대로 속력을 줄이지 않고 공중에서 몸을 돌려 단검을 휘둘렀다.
매끄러운 동작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남자가 단검의 반경에 들어오기 직전 멈춰 섰다.
그는 큰 소리로 숨을 내쉬었다.
“위험하게.”
“그러라고 휘두른 겁니다.”
“너무하네.”
그는 나를 두고 멀어지는 길드원들을 힐끔 보며 혀를 찼다.
“약한 용병을 버리고 가다니. 이래서 용병은 서러워서 못한다니까.”
“여기 약한 용병이 어디 있지.”
내 단정적인 어투에 그는 도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려 이죽거렸다.
“그러네. 그쪽 말이 맞네. 파트너가 없어서 이제 슬슬 맥 못 추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멀쩡하네요.”
‘파트너’란 단어에 힘을 주어 말하는 걸 보니 무언가 알고 있는 듯했다. 나는 눈에 힘을 주고는 그를 쏘아붙였다.
“당신이 뭔데 내 파트너에 대해 지껄여.”
“알 만큼은 알죠. 아까 실망한 것도 파트너가 아니라서 아닌가?”
“……길드전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신생 성은 길드. 설마 배후에 센터를 두고 있는 겁니까?”
나라를 이 잡듯 뒤지던 센터가 내가 이 안에 있는 걸 뻔히 알고 있는데 가만히 손을 놓고 있다니.
그것보단 누군가를 이곳에 미리 심어 놓았다는 편이 훨씬 어울렸다.
내가 아는 센터는 그랬다.
“설마 뒤에 민지민이 있는 거냐고 묻는 겁니다.”
질문을 거듭할수록 남자의 미소가 선명해졌다. 그는 비로소 찾아온 적막함에 만족한 듯 숨을 깊게 들이켜고는 답했다.
“글쎄, 한 번 확인해 볼까.”
그 말과 함께 남자의 몸에서 불길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흑호에게서 느껴지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렬한 힘에 동요한 몸이 일순 굳었다.
남자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나를 스쳐 모두가 향한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어쩐지 나를 그곳으로 유인하는 것 같았다.
그 의도를 알고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빠르게 그의 뒤를 쫓았다.
철탑에 닿기 위해서는 성벽과 작은 마을을 차례로 지나야 했다. 철탑은 사방이 열려 있었기에, 먼저 철탑을 차지한 길드가 방어하기 용이하도록 짜인 구조였다.
그렇기에 마지막 날쯤 되면 성벽의 도개교가 올라가 있었다.
오델리아는 박이설의 넝쿨을 이용해 몰래 잠입할 작전을 세우고 있었는데…….
“다리가 내려와 있잖아?”
지키는 이조차 없단 사실에 의구심을 갖기 무섭게 남자가 그 안으로 들어갔다.
도통 잡힐 기미가 안 보였다.
“아, 아 제 말 들립니까?”
-…….
남자를 쫓으며 길드원들에게 대화를 시도해 보았으나 응답은 없었다. 응답 없는 팀원을 두고 먼저 성벽 안쪽으로 들어가는 게 께름칙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며 머뭇거리고 있는데 안쪽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나는 혀를 차고 곧장 도개교를 건넜다.
* * *
철탑을 앞둔 성벽의 마을.
우뚝 선 철탑 아래로 벽돌집이 엄폐물 역할을 했다.
이곳에서 이번 길드전의 마지막 전투가 펼쳐지리란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입장 전 시가전을 대비해 만발의 준비를 해 두었는데, 눈앞에 펼쳐진 참담한 모습에 입이 다물리지 않았다.
“…….”
어차피 가상으로 만들어진 마을이고 사는 주민도 없다지만, 불바다가 된 광경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집들은 모두 무너지고 나무는 앙상한 뼈대만 남긴 채 타오르고 있으며 여기저기 선혈이 낭자했다.
곳곳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은 모두 길드전에 참가한 에스퍼들이었다.
“이게 무슨…….”
그때 마을의 초입에 홀로 우뚝 선 사람이 보였다. 조이현이었다. 나는 그쪽으로 뛰어갔다.
“조이현 헌터.”
그는 숨을 고르며 뒤를 돌아보더니, 나를 발견하자마자 손목을 잡아채 벽 뒤로 숨게 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우주는요?”
“오자마자 흑호는 모습을 감췄어.”
“그럼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다른 팀원들은 어디 두고.”
조이현은 고개를 살짝 내밀어 타오르는 길거리를 내다보며 나직하게 답했다.
“완전히 유인당했어. 성은 길드. 그놈들 이런 식으로 남은 팀들을 모두 여기에 모았어.”
오늘 새벽을 기점으로 이제 남은 팀은 다섯 팀이었다.
일찍이 철탑을 차지한 성은 길드를 두고, 남은 네 팀은 성벽 안에 진입할 타이밍을 보는 형국이었는데 성은 길드가 먼저 선수를 쳐 모두를 불러모아 싸움을 붙인 거였다.
“덕분에 흑호가 문제가 아니게 됐어. 오자마자 길드원들 잃고 눈깔 제대로 돌아간 다른 길드원들 때문에 찢어졌어.”
조이현 역시 몸을 숨기는 과정에서 상처를 입었는지 어깨 부근의 옷 가죽이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경계하듯 내 뒤를 보며 말을 이었다.
“아직 분명 다른 팀 놈들이 남아 있어. 머리를 노리는 거 같으니까 최대한 몸을 숨기고 때를…….”
말을 하던 조이현이 말끝을 흐렸다. 그의 낯이 창백해졌다. 나는 그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무너지지 않은 지붕 위에 흑호가 있었다.
여전히 고우주를 입에 문 채 말이다. 흑호에게 물린 고우주가 축 늘어져 있었다.
생사 확인이 불가한 모습에 조이현은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놀란 나는 그의 팔뚝을 강하게 붙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