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26화
“제 위치를 다른 사람한테 흘린 적 있습니까?”
“설마요.”
“…….”
이 팀장이 거짓말할 이유도 내 위치를 흘려 좋을 이유도 없었다.
‘그럼 어떻게…….’
생각이 많아지는데 이 팀장이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소포와 함께 바깥 상황에 대해서도 전달받았습니다.”
이 팀장은 바지 주머니에서 쪽지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나직하게 소리 내 읽었다.
“여론이 많이 기울어 센터의 판단을 의심하는 중입니다. 낮은 등급의 에스퍼들 사이에서는 이 틈에 인권위를 열려는 움직임도 있다고 하고요, 곧 뜻대로 될 거 같네요.”
이 팀장의 목소리 위로 가경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전혀 관심 없는 척하더니 밖에서 계속 분위기를 주의 깊게 살피고 있던 모양이다. 이 팀장은 손에 든 종이를 태워 버리며 말을 이었다.
“이제 사흘 남았죠.”
“그러네요.”
“흐름은 우리 쪽으로 왔어요, 그러니 남은 사흘도 잘 마무리해요. 아마 편히 잘 수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 일찍 쉬고요.”
그리고는 함께 돌아가자는 듯 내 걸음에 맞춰 천천히 발을 옮겼다.
* * *
누구나 생중계를 통해 필드 위 플레이어들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게 되며 자연히 움직임이 더뎌졌다.
중간 지점부터 몬스터의 위협으로부터는 벗어났지만, 빗줄기가 거세지며 마지막 날 오전이 돼서야 철탑 인근 숲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선두로 가던 이 팀장이 걸음을 멈췄다.
“쉬어 가는 거로 하죠.”
그의 말에 형도와 우주는 지친 듯 쓰러져 있는 나목에 걸터앉았다.
“솔직히 더 걸었다가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지 뭡니까.”
우주의 솔직한 말에 형도도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하나둘씩 목구멍에 물을 털어 넣으며 무거운 몸을 풀고 있는데, 이 팀장만이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서 있었다.
열두 시간 넘게 이어진 산행에도 지친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는 게 대단한 동시에 징글징글했다.
때마침 이 팀장이 입을 열었다.
“잠시 주목하죠. 지금이 아니면 타이밍이 없을 거 같아서요. 외부에서 전달받은 성은 길드에 대한 정보입니다.”
윤가경 헌터에게 소포와 함께 받은 정보인 모양이었다.
필드에 들어오기 전에도 사전 조사를 했지만, 베일에 싸인 듯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후속 조사를 가경이 맡아 준 모양이었다.
“S급 헌터 한 명을 주축으로 모인 신생 길드라는 건 모두가 예상하였죠.”
“네.”
“중계 화면에도 팀원의 얼굴이 노출된 적은 없다고 합니다. 로브로 모습을 감춘 모양이에요. 참가 인원은 총 다섯.”
가만히 듣고 있던 조이현이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S급 헌터가 한 명, 가이드가 한 명, 남은 셋 모두 A급 이상의 실력자겠죠.”
이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 외 신분은 불확실해요.”
물통에 든 물을 다 마신 나는 빈 통을 털며 낮은 콧김을 내쉬었다.
‘아직도 미지수인 부분이 더 커.’
그런 내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던 형도가 새 물통을 건넸다.
“컨디션 괜찮아 보이네요.”
“아, 네. 확실히 훨씬 좋아졌어요.”
두 달 넘게 오델리아에서 생활하며 형도는 몇 번이나 내 몸 상태를 확인했다.
그때마다 한 번도 속 시원하게 대답해 준 적이 없었다. 그런 내 긍정에 형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나는 고맙다는 의미에서 물통을 흔들어 보였다.
“좋다고요.”
내 대답에 눈을 끔뻑이던 형도의 얼굴이 밝아졌다.
“역시 제가 뭐랬어요. 1차라도 가이딩 받으면 좋을 거라고 했잖아요.”
“…….”
호수에서 말씨름한 그 날 밤. 형도의 말에 못 이겨 가이딩을 받았다. 그러나 장담하건대 지금 컨디션이 좋아진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김형도는 그런 내 표정이 보이지 않는지 활기차게 웃으며 혼잣말을 이었다.
“혹시 모르는 거 아닙니까, 저희 적합도가 낮지 않을지도. 이참에 나가면 저랑도 매칭 테스트를……!”
그의 옆에 있던 박이설이 도저히 못 들어 주겠다는 얼굴로 형도의 입을 막고는 끌고 갔다.
나는 물통을 가방 옆구리에 넣었다. 그때 터틀넥 안으로 숨겨 둔 목걸이가 느껴졌다.
옷 위로 두드러진 목걸이를 한 번 쓸어 만졌다.
‘아무래도 컨디션이 좋아진 건 이것 때문이지 않을까.’
어젯밤 악몽을 꾸지 않고 오랜만에 깊은 잠자리에 들었던 걸 떠올리자 자연히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 등 뒤로 소름 끼치는 시선이 느껴졌다. 강렬한 에너지에 주저 없이 단검을 뽑아 들었다.
나만 느낀 건 아닌지, 이 팀장과 조이현, 박이설까지 각자 자세를 고쳐 잡고 무기를 꺼내 들었다.
뒤늦게 고우주가 무슨 일이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에너지가 흘러나오는 수풀을 보고 섰다.
수풀의 잎들이 흔들리더니 인기척이 가까워졌다. 검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데, 수풀 밖으로 나온 건 작은 흰 뭉텅이…….
“토끼?”
토끼였다.
중얼거린 고우주가 기운 빠진다는 듯 픽 웃었다.
“뭐예요, 다들 갑자기 말하다 말고 무서운 얼굴을 해서 나는 또 적이라도 나타난 줄…….”
그가 말을 채 다 잇기도 전에 토끼의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검은 호랑이가 거대한 이를 드러내더니 걸어 나왔다.
그 모습에 고우주가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악!”
발톱과 이빨이 기이하게 발달한 동물형 몬스터였다. 나는 인상을 구겼다.
“분명 중심부부터는 몬스터가 출몰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요.”
내 물음에 조이현이 에너지를 모은 주먹을 꽉 쥐고는 답했다.
“그렇게 안내받긴 했지. 근데 눈앞에 나타난 이상 일단 잡는 것 말고 다른 수가 있겠어.”
조이현은 그 말과 동시에 달려들더니 거대한 힘으로 흑호를 내리찍었다.
땅바닥이 팰 정도의 강렬한 힘에 사방으로 피가 터졌다.
나는 혀를 차며 발아래로 튀긴 피를 바라봤다.
“과해요.”
“힘을 조절해서 쓰다 보니까 그러네.”
조이현이 미안하다며 곤죽이 돼 쓰러진 몬스터에게서 떨어졌다. 그 순간 몇 걸음 떨어져 있던 고우주가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어?”
당혹감이 들어찬 그의 눈빛을 따라 도로 고개를 돌렸다.
조이현 역시 섬뜩한 느낌에 고개를 돌리는데, 분명 조금 전 힘없이 바닥에 고개를 박고 있던 흑호의 거대한 앞발이 공중을 가르며 내려오고 있었다.
순식간이었다. 조이현은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막아 봤지만 강렬한 힘에 몸이 튕겨 나왔다.
내 쪽으로 밀린 탓에 그와 엉켜 나무에 강하게 부딪혔다.
조이현이야 나를 쿠션 삼았다지만, 그의 무게를 더해 온몸으로 들이받은 나는 무릎 꿇고 신음했다.
“윽.”
“괜찮아?”
당황한 조이현이 내 상태를 살피려 했으나, 나는 턱으로 흑호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봐요.”
조이현의 공격이 먹히지 않은 게 아니다.
흑호는 검은 털 가득 피를 묻힌 채 흥분한 듯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언데드예요.”
언데드가 아니면 설명되지 않았다. 후두부가 박살 나고도 어떤 대미지도 없이 움직임이 능수능란했다.
흑호는 주저 없이 쓰러진 나와 조이현에게로 날아들었다. 조이현이 다시금 주먹을 에너지로 감싸는데 흑호가 아가리를 활짝 여는 게 조금 더 빨랐다.
일순 머릿속에 조이현의 팔이 잘려 나가는 형상이 스쳤다.
나는 발로 내 앞을 가로막고 선 그를 걷어찼다.
균형을 잃은 조이현의 몸이 앞으로 쏠리고, 원래 그의 머리가 있던 자리에서 흑호의 입이 다물렸다.
단단한 이빨이 부딪히며 매서운 소리가 났다.
“이게 무슨……!
사색이 된 조이현이 바닥을 짚고 뒤돌아보았다. 나는 여전히 흑호의 주둥아리 바로 아래에 쓰러져 있었다.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흑호의 날카로운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다문 입가를 타고 침이 흘러 얼굴 위로 떨어졌다. 그 기분 나쁜 끈적함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 순간 흑호가 앞발을 휘둘렀다. 나는 곧장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그 앞발에 찔러 넣었다.
흑호는 포효 한 번 없이 칼에 찔린 앞발을 그대로 휘두르며 공격을 퍼부었다.
피하기에는 늦었다. 최대한 가드를 올리고 몸을 웅크리는데, 나무를 휘감고 있던 작은 덩굴이 재빠르게 자라나더니 흑호의 몸을 뒤덮었다.
나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몸을 굴려 옆으로 피했다.
흑호는 거친 숨을 내쉬며 우리를 노려봤다. 나는 몸을 피하고 나서야 마른 입술에 침을 축였다.
“미친.”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박이설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마워요.”
그 말과 함께 떨어진 내 단검을 주웠다. 고우주는 호들갑을 떨며 소곤거렸다.
“언데드라니요. 난도가 말도 안 되게 높아진 거 아니에요?”
“그래, 사전에 약속 안 된 몬스터지.”
이 팀장이 입술을 짓씹으며 답했다. 경기 종료 이후 이의 신청을 최대한 막기 위해서라도 정해진 규칙은 반드시 지켰다.
“그러면 답은 하나밖에 없는 거 아닌가요?”
나는 몸에 묻은 흙을 털며 말을 이었다.
“소환사가 있다고 볼 수밖에.”
내가 말하기 전부터 어느 정도 예감한 듯 놀라는 이는 없었다.
가까이 갔을 때 느꼈다. 흑호를 감싼 아주 강렬하고 익숙한 에너지를.
흑호와 눈이 마주쳤을 땐 대번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유제이?”
에너지에서 느껴지는 기시감 때문이었다. 유제이의 에너지와 상당 부분 닮아 있었다.
다만 내가 알기로 그는 소환사가 아니었을뿐더러 센터 소속의 헌터라 길드전에 참가할 수 없었다.
저절로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어떻게 된 일이지.’
의아스러운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어째서 혼자 들이닥친 걸까.
제 팀원과 연계해 덮쳐 왔다면 우리 중 분명 부상자가 생겼을 것이다.
흑호는 고민할 시간을 오래 주지 않으려는 듯 넝쿨에 엉킨 몸을 계속해서 움직이며 식물을 헤쳤다.
박이설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오래는 못 버텨요. 판단을 내려야 해요.”
긴박한 그녀의 말에 이 팀장이 공격 명령을 내리려는 그때 내가 그의 소매를 잡았다.
“잠깐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