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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25)화 (125/183)

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25화

“저녁 먹기 전에 간단하게 상태 점검해야 하니 한 분씩 텐트 안으로 들어와 주세요.”

형도는 그렇게 말하고는 텐트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에 고우주는 자신이 가장 먼저 가이딩 받겠다며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조이현은 수프를 데울 장작불에 불쏘시개를 넣었다.

“다음 차례에 양하나 네가…….”

“아니요. 저는 마지막에 들어갈게요.”

내 단호한 말에 조이현은 그러라며 무심히 대답했다.

얼마간 순서대로 돌아가며 가이딩을 받기 시작했다.

무인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며 자연히 가이딩 시간도 늘어났다.

오델리아 멤버들이 모두 가이딩을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쯤 형도가 텐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양 헌터는요?”

그의 물음에 박이설이 주변을 둘러봤다.

“제 다음인 거 같아서 물어봤는데, 아까 받으셨다고.”

그녀의 말에 조이현이 혀를 찼다.

“거짓말이잖아.”

그가 골칫거리를 맡았다는 듯 못마땅한 얼굴로 양하나를 찾으러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김형도가 그를 말리며 직접 나섰다.

“아니에요, 어차피 가이딩은 해야 하니 제가 찾으러 갈게요.”

“괜찮아? 연속 가이딩이라 컨디션 꽝이잖아.”

“아직 괜찮아요. 사흘 내내 여러분 뒤에서 자리만 지켰으니 저도 제 일은 해야죠.”

형도는 그렇게 말하고는 수풀 속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조이현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자, 박이설이 그의 등을 툭툭 쳤다.

“알아서 하겠죠. 내버려 둬요.”

그때 수프의 간을 보던 고우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했다.

“그런데 이 팀장님은 어디 가셨지?”

* * *

전투 시 최대한 고우주에게 감응한 힘을 사용하려 했다. 그게 조금이라도 몸의 부담을 줄여 주었으니까.

하지만 대놓고 활약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니 몸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손에 딱 맞는 무기와 익숙한 분위기, 가벼운 몸까지.

나는 낮에 조끼 위 남자의 가슴을 검으로 갈랐던 감각을 떠올렸다. 조금만 더 힘을 줬다가는 크게 다쳤을 수도 있었다.

조이현은 허세 부리지 말라며 마치 내가 그들을 약하게 보고 힘 조절을 한 줄 알지만, 오히려 반대였다.

전투가 이어질수록 몬스터를 사냥할 때처럼 몸이 거침없이 움직였다.

힘을 사용하는 그 순간에는 아무런 잡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 현 상황을 잊고 전투에만 몰입했다.

‘위험해.’

그 생각과 함께 호숫가의 물을 손으로 퍼 세수했다.

찬물에 정신이 좀 들었다. 에너지를 모두 소비하고 나면 언제 잊고 있었냐는 듯 섬뜩한 기분이 됐다.

흔들리는 물의 잔상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비쳤다. 그림자가 울렁이기를 반복하더니 이내 누군가가 보였다.

‘정말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겁니까, 아니면 애초에 과거의 기억이 없는 겁니까.’

상상만으로 온몸에 닭살이 돋아났다.

“양하나 헌터?”

나를 부르는 소리에 물 위의 잔상을 손으로 지우고 고개를 번뜩 들었다.

어느덧 가깝게 다가온 형도가 두 눈을 끔뻑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낮은 숨을 내쉬고는 머리칼을 흐트러트렸다.

“……가이딩 하고 있던 거 아닌가요. 여기까지는 무슨 일입니까. 늦은 시간에 위험하게.”

“그걸 아는 사람이 왜 차례도 건너뛰고 이런 곳에 있어요.”

“바람 좀 쐬고 싶어서요.”

“컨디션이 안 좋습니까?”

대충 돌려보낼 생각이었는데 끈질기게 물어 왔다. 나는 이미 잔상이 모두 사라진 호수를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죠.”

형도를 스쳐 지나가려는데 그가 몸으로 내 앞을 막아섰다. 그러고는 뚱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확인해야겠습니다.”

고집을 부리는 모습에 계속해서 익숙한 얼굴이 따라붙었다. 그 때문인지 울컥 신경질이 올라왔다.

“확인해서 뭘 할 수 있다고요. 알고 있잖아요. 적합도 까다롭고 1차 접촉 가이딩으로는 제대로 가이딩이 안 된다는 거.”

“그러면……!”

“나랑 여기서 자기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호숫가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침묵 속 바람에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만 가득했다. 무슨 의미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니었다.

끈질기게 가이딩을 해야겠다며 달라붙는 그의 모습에 자꾸만 강우신의 얼굴이 겹쳐 보여 울컥해 한 말이었다.

말 그대로 내게는 1차 접촉 이후의 가이딩이 필요했으니까.

이렇게 말하면 그의 성격상 꼬리를 말고 돌아갈 거라고 생각한 거였는데.

형도는 단단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필요하다면요.”

“뭐?”

당혹감에 물음이 툭 튀어나왔다. 반면 형도는 주저 없이 말을 이었다.

“에스퍼에게 가이딩 거절은 당연한 권리지만 비상시에는 가이드의 판단하에 시도는 해 봐야 한다는 거 알고 계시겠죠? 정 싫으시면 받은 후에 거절하세요.”

입력된 값을 산출하듯 망설임 없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필요하다면 저는 그게 뭐든 준비돼 있습니다. 말했잖아요. 그때 이후로 후회할 일은 만들지 않기로 했다고.”

그의 말에 언젠가 김형도가 한 말이 겹쳐 들렸다.

‘강우신 가이드 말을 듣고 욕심이 났거든요. 아,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가이딩에 집중해 보고 싶다고요.’

“…….”

덤덤하게 말하지만, 귀 끝이 피가 쏠린 듯 시뻘겠다. 어처구니없어 웃음이 났다.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제야 각목처럼 서 있는 그가 온전히 보였다.

누굴 흉내 내는 줄 알았더니, 눈앞에는 단순히 제 역할을 하고 싶어 하는 가이드만 서 있을 뿐이었다.

날것 그대로 내뱉은 말이 후회됐다. 나는 그대로 그의 이마에 꿀밤을 놨다.

“아!”

“말실수예요. 잊어요. 그러니 헛소리 말고 텐트로 돌아가 보조제 준비해 둬요. 1차 가이딩 받고 보조제 먹을 테니까.”

그제야 형도는 부끄러움에 볼까지 붉히고는 빨리 안 따라오면 다시 찾아올 거라며 수풀 쪽으로 몸을 돌렸다.

형도의 발소리가 서서히 멀어져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될 때쯤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거예요.”

내 말만 허공에서 사라졌다. 긴 침묵이 이어지자 나는 몸의 방향을 틀었다.

“안 나올 거면 저도 가고요.”

그렇게 말하고 한 걸음 내딛는데, 형도가 사라진 수풀의 반대 방향에서 이 팀장이 걸어 나왔다.

“나름대로 은신에 소질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던가요?”

“은신하려면 망할 향수를 뿌리지 말던가요. 바람 불 때마다 훅 냄새가 끼칩니다.”

“화가 잔뜩 나 있네요.”

“별로요.”

이 팀장은 안경을 추켜올리고는 너스레 떨듯 형도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씻었는지 머리가 이마에 내려앉아 있었다.

“어차피 임시 전담 아니던가요. 누구 말처럼 자는 건 아니더라도 치료 목적의 접촉은 괜찮을 거 같은데.”

“처음부터 다 듣고 있었나 봐요. 음침하게.”

열 받아 말끝에 힘을 줘 봤지만, 이 팀장은 개의치 않은 듯 웃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힘이 쫙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런 말장난 할 기분 아닌 거 알잖아요. 왜 기다렸는데요, 김형도 가이드가 자리를 비킬 때까지.”

나는 그의 의도를 다 알고 있다는 듯 물었다.

내 말에 잠시 고민에 빠진 듯 입술을 다물고 있던 그는 이내 품에서 손바닥 크기의 소포를 불쑥 꺼내 내 쪽으로 던졌다.

갑자기 날아온 탓에 반사적으로 잡아챘다.

“양 헌터한테 온 소포입니다.”

보급품 창고에서는 협회 측에서 준비한 물품 말고도 필드 밖에서 ‘무엇이든’ 전달받을 수 있었다.

오늘 낮 굳이 보급품 창고 쪽으로 루트를 잡아 의아했더니, 받을 소포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게 저한테 온 거라고요?”

내 물음에 이 팀장은 풀어 보라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아무리 살펴봐도 보낸 이의 이름 같은 건 없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소포의 포장을 풀었다. 종이봉투가 흰 끈에 여러 번 감겨 있었다.

거칠게 종이를 뜯어내자 손바닥 위로 무언가 툭 떨어졌다.

“목걸이?”

손톱 크기의 물방울 모양 은색 참이 달린 목걸이였다. 밤중에도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은한 빛깔에 시선이 갔다.

그걸 엄지로 쓸자 묘하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이거 가경 헌터의 작품인가요?”

“맞아요.”

가경은 오델리아 소속 헌터지만 개인 외주를 받아 에너지를 응축한 액세서리를 팔고 있었다. 아주 비싸고 비정기적으로 일하는 탓에 그녀의 물건을 받아 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조이현의 말에 따르면 같은 팀원인 그들조차 예약 따내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했다.

그런데 이건 이천 게이트에서 김형도가 하고 있던 것과 달리 표면이 굉장히 매끄럽고 정돈된 것이 척 보기에도 오랜 시간 가공한 것 같았다.

의아심에 저절로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이걸 왜.”

“저는 중간 배달책이라서 모릅니다. 가경 헌터에게 개인 의뢰가 들어온 모양이더라고요. 양하나 헌터에게 완성품을 전해 달라는 메모와 함께 말이에요. 가경 헌터는 시기와 시급만 맞으면 움직이니 더 이상은 저도 모릅니다.”

그의 말에 나는 물방울 모양의 보석을 엄지손가락으로 매만졌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형도가 차고 있던 것처럼 은신의 힘을 가진 것도, 그렇다고 어떤 폭발적인 능력을 가진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목걸이를 가까이하니 손의 떨림이 서서히 잦아졌다.

누적된 피로에 빠르게 뛰던 심장도 서서히 고요해졌다.

그러니까 이건 마치 가이딩을 받는 기분이었다. 연약하지만 내 몸에 알맞은 가이딩을 말이다.

“설마…….”

그 순간 우신의 얼굴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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