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23화
보다 못한 내가 고우주의 팔목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럼 정신 똑바로 차려. 여기가 게이트 안이었으면 조이현은 네 눈앞에서 죽었을 수도 있으니까.”
“…….”
그렇게 말한 뒤 저장고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김형도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말을 붙였다.
“너무 매몰찬 거 아니에요? 데뷔전이라 들떠 있던 앤데.”
“그러니까 더 필요하죠. 일정 대미지를 입으면 아웃 된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특정 부위에 한해서예요.”
잔인한 룰이었다. 누적 대미지가 쌓이는 곳은 오직 흉통을 감싼 조끼 부분이었다.
조끼와 멀어질수록 대미지는 미미하게 쌓일 뿐이었다. 그건 달리 말해 트라우마가 남을 정도의 고문이 가능하다는 소리였다.
신경 쓸 게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중 가장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건 나 스스로였다.
길드전에 참가한 이상 끝까지 버텨야 했다.
중간에 어설프게 아웃 됐다가는 그대로 이송될 테니 말이다.
그 때문에 옆에서 매정하다고 하는 김형도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보다 유성우 길드라면 예상 우승 순위 4위를 기록할 정도로 강한 길드 아니었나요. 왜 중앙 전투에서 박살 난 거죠?”
내 물음에 이 팀장이 답했다.
“그거라면 성은 길드 때문일 겁니다.”
“성은? 처음 듣는 이름인데요.”
“느닷없이 개표 1위 한 그 길드 말하는 거죠?”
형도가 아는 체하며 끼어들었다.
“멤버 대부분이 베일에 싸인, 길드전 신청을 위해 급조된 팀. 상금을 노린 헌터들이 합세한 팀이거나 S급 헌터가 독립해 만든 팀이라고 소문만 무성하던데요.”
“그런 소문까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왕좌를 먹은 모양이야.”
이 팀장의 말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벌써요?”
아직 이튿날 오전이다. 그런데 벌써 중앙 철탑을 먹었다는 건 한 가지를 뜻했다.
“어제 중앙 전투에서 유성우를 비롯한 길드를 쓸어 버린 길드가 바로 거기인가 보네요.”
내 말에 이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저녁이 돼 보면 확실해지겠죠.”
* * *
유성우 길드와 짧은 전투를 치른 뒤 그가 사라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팀장의 예상이 맞은 건지 아니면 단순히 우연의 일치인 건지 해가 지도록 다른 길드와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강과 맞닿아 있는 야영지에 진을 치는데, 각자 앞에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화면이 흔들리더니 이내 헌터 정보통의 시그널 음악이 흘러나왔다.
-협회 주관 길드전 중개를 맡은 사회자 주한나입니다. 오늘은 중개를 도와주실 특별 MC 한 분을 모셨는데요, 시청자 여러분께 인사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이공팔입니다.
“우와! 헌터 행사 전문 MC 이공팔이에요.”
고우주가 가장 크게 반응했다.
저녁이 되면 확실해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했더니, 이걸 말한 모양이었다.
“중계방송을 참가자한테도 보여 주리라곤 상상도 못 했네요.”
“4일째에 접어들면 원할 때마다 볼 수도 있는걸요.”
“그럼 숨는 게 의미가 있나요? 위치가 노출될 텐데.”
“의미 없죠. 하지만 5일쯤엔 중앙 철탑을 먹어야 하니 모두가 향할 곳은 예정된 거나 다름없어요. 그러니 그때부터는 속도 싸움이죠.”
이 팀장의 말과 동시에 이공팔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금일 하이라이트 영상 보시죠!
잠시 암전된 화면 위로 무인도의 지도가 떠올랐다.
그러고는 전투 후 아웃 된 헌터가 있는 지점마다 빨간 가위표가 그어졌다. 고우주는 그 아래로 흘러가는 자막을 소리 내 읽었다.
“첫날 중간 점검 30 길드 중…… 14 길드 탈락?”
“많은 수죠?”
내 물음에 이필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압도적으로요.”
지도 위 가위표가 그어진 곳이 확대되더니 그곳에서 일어난 전투 상황이 하이라이트 영상처럼 편집되어 흘러나왔다.
예상대로 유성우 길드는 성은 길드로 보이는 팀에 의해 박살 났다.
영상 속 모습만으로는 염동력자에 지나지 않아 보였는데, 아무래도 여러 길드가 섞인 대규모 전투이기에 대상 파악이 정확히 되지 않았다.
그때 화면이 전환되더니, 익숙한 배경이 나타났다. 오전에 있던 보급품 창고였다.
조이현은 자신과 홍고의 전투 장면에 고개를 돌리며 혀를 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이가 나타났다.
검은 로브를 입고 홍고를 일격에 아웃시킨 내 모습이었다.
로브가 벗겨지자 실시간 채팅이 폭주했다.
->ㅁㅊ 양하나 아님?
->맞네, 죽은 거 아니냐는 말도 많았는데.
->아니 언니가 왜 거기서 나와
->근데 진짜 마약 빤 거 맞나 본데 저게 무슨 정신계 헌터 움직임이냐.
->ㅋㅋ 다른 건 모르겠고 우리 홍고 쪽팔리겠네
김형도는 채팅을 훑어보다 멋쩍게 웃었다.
“하하, 채팅 반응이 영 생각한 거랑은 다르네요.”
재검사를 받기 위해서는 다수의 여론이 필요했고, 그러려면 대중의 반응이 따라 줘야 했다.
그런데 내가 봐도 지금 이 장면은 센터 입장에 확신을 심어 주는 거나 다름없었다.
내가 기가 팍 죽은 얼굴을 하자 김형도가 수습하듯 말을 이었다.
“원래 처음에야 그렇겠죠. 이걸 예상해서 우리 작전이 ‘최대한 오래 살아남아 아무런 문제 없이 여전히 강한 양하나 헌터 보여 주기 작전’, 뭐 그런 거 아니었어요?”
“작전 이름이 너무 후진데.”
박이설의 말에 형도가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초 치지 말라고 속삭였다.
“걱정 마요. 저도 처음에는 이럴 거라는 거 예상했어요.”
내 말에 형도는 그랬냐며 민망한 얼굴이 됐다. 조용히 실시간 채팅을 훑던 이 팀장도 한마디 얹었다.
“당장 바깥 상황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아마 예상대로 참가자 외 센터 사람이 들어올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럴까요.”
“그럼요, 이미 양 헌터의 얼굴은 낮에 매스컴을 탔을 겁니다. 그럼에도 해가 지고 하이라이트 영상이 나오기까지 아무런 일도 없지 않습니까. 그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어요.”
길드전은 협회 주관의 가장 권위 있는 연례행사였다.
‘경기 중 참가자가 아닌 사람은 들어갈 수 없다.’라는 대원칙을 몇 년이고 지켜 왔는데, 감히 그 원칙을 깨트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 우리는 작전대로 하면 됩니다. 경기에 참여한 이상 우승하면 좋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양 헌터는 자신의 생존을 항상 최우선으로 하세요.”
“…….”
이 팀장의 단호한 말에 김형도와 박이설도 나서서 한마디씩 덧붙였다.
“가능한 경기 마지막 날까지 살아남아 보여 줍시다. 약발 같은 게 아니라는 걸.”
“그래요, 언니가 얼마나 대단한데!”
조이현도 눈치를 보다 그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이 무색할 정도로 긍정적인 사람들이었다. 그 덕분에 길드전을 준비하는 동안 딴생각이 안 든 것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크게 웃은 나는 짧게 답했다.
“고마워요.”
내 입장에선 길드전 제안을 거절하는 건 배부른 소리였다. 너무 과분한 호의에 그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내 머리칼이 타오르는 장작의 빛을 머금고 환한 색을 띠었다. 이 팀장은 그 모습을 빤히 보다 답했다.
“나도 양 헌터를 이용하는 겁니다. 그러니 어떤 마음의 짐도 필요 없죠.”
이 팀장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은 본격적으로 이동할 테니, 딴짓하지 말고들 자요.”
나는 불침번을 선 박이설과 얼마간 더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들었다.
* * *
어젯밤 본 중계 영상은 우리가 그랬듯이 섬에 생존해 있는 헌터라면 모두가 봤을 거다.
수많은 전투 하이라이트 영상 속 단연 요주의 인물로 떠오른 건 누굴까. 아침 세수를 하고 온 내게 이 팀장이 물었다.
“양 헌터라면 어제 그걸 보고 누굴 가장 경계할 거 같습니까?”
나는 밤사이 쌀쌀해진 날씨에 목까지 올린 지퍼를 살짝 내리며 답했다.
“글쎄요.”
고민하는 사이 고우주가 답했다.
“미지의 상대가 가장 무섭지 않을까요? 성은 길드. 거기 소문만 무성하잖아요.”
나는 고우주를 위아래로 훑었다.
“하루 사이에 좋아 보이네.”
“언제까지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잖아요.”
당당하게 말하는 걸 보니 정말 회복된 거 같았다.
무슨 일이든 금방 털어 내는 게 고우주의 장점이었다.
나는 머리칼의 물기를 대충 닦았다. 어깨선을 넘어간 머리칼이 조금 지저분해 보였다.
‘그사이에 머리카락이 더 자랐나.’
그때 팔짱을 끼고 이야기를 엿듣던 조이현이 한마디 거들었다.
“하긴 분발해야겠더라. 어제 하이라이트 영상에 너는 코빼기도 안 보였으니 말이야.”
그의 말에 고우주가 가늘어진 눈으로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런 말 하기에는 선배님도 내빼는 모습밖에 안 보이던데요.”
“뭐? 너 이 자식이.”
“저도 곧 누나 못지않게 멋진 하이라이트 영상을 뽑아낼 거니 걱정은 됐네요!”
고우주는 밟힐수록 도리어 투지가 솟아올랐다. 조이현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참가를 가장 반대하면서도 항상 제일 큰 원동력을 심어 줬다.
그 모습에 내가 어처구니없는 눈을 하니 김형도도 따라 웃었다.
다들 하나같이 단순했고, 그게 퍽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때 한 걸음 떨어져 있던 이 팀장이 제 물음에 대한 답을 이었다.
“만약 제가 타 길드원이라면 가장 경계 되는 대상은 단연 양 헌터일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