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22화
심상치 않은 기세에 홍고는 본능적으로 자세를 잡았다. 누군지 몰라도 풍기는 분위기가 고압적이었다.
언제든 자신에게 달려들 것이라 생각하며 긴장의 끈을 붙드는데, 예상과 달리 그는 들어 올렸던 검을 내리며 찬찬히 뒤를 돌아봤다.
그러고는 고우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몇 번을 말해. 일단 침착하라고.”
굳어 있던 홍고는 거대한 에너지와는 달리 로브 안에서 나오는 미성에 당황했다.
“뭐야. 계집애?”
그의 말에 로브를 깊게 눌러쓴 여자가 홍고에게 시선을 돌렸다.
“엄한 곳에 화풀이 말고 가는 게 어때.”
“……개소리.”
홍고가 코웃음을 쳤다. 뒤에서 저를 보조하는 유성우가 있는 이상 자신은 무적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어그로를 끄는 탱커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이란 바로 등 뒤의 아군을 믿는 것이었다.
홍고는 그것 하나만큼은 무척이나 잘했다.
여자는 그의 답을 예상한 듯 손에 든 검을 이리저리 살폈다.
헌터용 무기인 그것은 헌터의 에너지에 반응했다. 그녀는 진득하니 색을 뿜는 장검의 끝으로 홍고를 노리며 말을 이었다.
“후회할 텐데.”
“…….”
정적 끝에 두 사람은 동시에 부딪쳤다.
맞붙은 순간 홍고는 흠칫 놀랐다. 먼발치에서 볼 때만 해도 키가 크고 뼈대가 자신과 비슷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그녀의 존재감이 대단했는데 가까이서 마주하고 보니, 자신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안심할 순 없었다. 제 대검에 부딪히는 그녀의 장검이 굉장히 무거웠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힘이야.’
놀란 홍고의 두꺼운 팔뚝 위로 핏줄이 솟구쳤다. 그런데도 그녀는 흔들림이 없었다.
제 반절도 안 되는 여자에게 힘으로 밀린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무참히 구겨졌다.
그 분노에 힘입어 무리해서 검을 밀어 넣는데, 그 순간 여자가 힘을 풀며 미끄러지듯 몸을 피했다.
덕분에 사정없이 힘을 쏟던 홍고의 무게중심이 깨져 앞으로 꼬꾸라졌다.
몸이 쏠리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여자는 홍고의 허벅지를 발 받침 삼아 그의 몸 위로 날아들었다.
그러고는 칼날을 이용해 정확히 옷 안의 조끼에 강한 충격을 주었다.
삐이이-
시끄러운 사이렌이 홍고의 탈락을 알렸다. 홍고의 얼굴이 땅에 처박혔다.
그는 곧장 아픔도 잊고 일어나 얼굴에 묻은 흙을 털어 내더니 등 뒤에 선 여자를 쳐다봤다.
그가 오델리아의 헌터들에게 한 것처럼 고통을 줄 수 있었음에도 그녀는 상처 하나 내지 않고 자신을 탈락시켰다.
홍고는 이를 아득 갈았다.
“감히 날 봐주다니…….”
“…….”
“후회할 거야. 아직 유성우는 남아 있고 네 팀은 유성우를 찾아낼 수 없어. 내가 저주할 테니까.”
동시에 홍고의 몸체가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아웃 처리됨에 따라 필드 밖으로 이송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점차 희미해지는 홍고를 내려다보며 답했다.
“그래.”
무어라 떠들든 전혀 관심 없어 보이는 투였다.
그 모습을 눈에 담고 있으니 그녀가 누군지 알 듯 말 듯 했다. 작은 몸체와 달리 압도적인 에너지를 두른 에스퍼.
“오델리아에 너 같은 에스퍼가 있다는 건 못 들었어……. 누구야, 넌.”
“…….”
수풀에 숨은 유성우의 공격을 눈치채지 못하게끔 시선을 끌려는 의도이기도 했지만, 홍고는 진심으로 로브 안의 얼굴이 궁금했다.
묵묵히 그녀의 답을 기다리는데 그 순간 수풀에서 때를 기다리던 화살이 커다란 파장과 함께 쏘아 올려졌다.
화살은 매서운 속도로 여자에게 날아들었다. 그 공격에 바람이 실려 여자가 쓰고 있던 후드가 벗겨졌다.
머리칼이 날리며 안에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
상대를 확인한 홍고의 눈이 커졌다.
제 상상보다 더 어린 여자는 품에서 단검을 뽑아 들더니 주저 없이 날렸다.
황금으로 빛나는 단검이 유성처럼 날아들어 공중에서 활과 부딪혔다.
여자는 사라지기 직전인 홍고를 바라보며 답했다.
“구원 투수.”
먼발치에 있던 조이현과 고우주 역시 화사한 금색의 에너지를 두른 양하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 *
나는 로브의 앞섶을 풀었다. 그러자 로브가 몸을 훑고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하필 필드가 무인도인 탓에 내내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 곤욕이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그리 중얼거리고선 어깨를 이리저리 돌려 가며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는 화살과 부딪혀 땅으로 떨어진 단검 쪽으로 다가가, 허리를 굽혀 주워 들었다.
에너지를 머금은 화살과 정면충돌해 괜히 상한 건 아닐까 했는데 실금은커녕 갈아 낸 그대로 날이 살아 있었다.
그간 잡히는 대로 사용하던 것들과 달리 이번 것은 손에 착 감겨 기분이 좋았다. 전의 것들은 손잡이 길이가 길어 날에 손을 자주 베였는데, 이건 달랐다.
날과 손잡이 사이에 지지대가 있어 검을 더 강하게 그러잡을 수 있게 했다.
얼마 전 이 팀장이 준 것이었다.
“작지만 선물입니다.”
고우주와의 훈련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이 팀장이 그렇게 말하며 상자를 내밀었다.
나는 수건으로 대충 목둘레의 땀을 닦고는 상자를 들추어 봤다.
상자 안에는 가죽 검집에 든 단검이 있었다. 에너지가 느껴지는 게 헌터용 무기였다. 나는 뚜껑을 닫고 되물었다.
“새삼스럽게 무슨 선물입니까.”
“길드전도 그렇고 고우주 헌터를 봐 주는 것도 그렇고 고마운 일에는 보답하는 편이라서요.”
길드전 참가를 결정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가경은 어떠한 확답도 주지 않았고, 수배령은 국경을 넘어 해외까지 퍼졌다.
집 밖으로 나가기조차 쉽지 않은 상황 속 고우주와 훈련을 시작한 건 단순히 몸이 근질거렸기 때문이었다.
센터에 있을 때만 해도 병원 신세를 지는 게 아니고서야 이틀 이상 가만히 있던 적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오델리아 길드의 가옥에 앉아 한가로이 정원을 보고 있는 건 좀이 쑤셨다.
게다가 앞서 한지원을 가르치며 누군가를 가르치는 방면에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 으쓱하던 참이었다.
그 자신감에 힘입어 고우주에게 올바른 에너지 운용을 가르쳤고, 타이밍 좋게도 그가 재각성하며 길드전에 따라 들어오게 됐다.
다시 생각해도 얼렁뚱땅 벌어진 상황이었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센터에 돌아가야 한다는 건 변함이 없었다.
내 사람들은 모두 거기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건 오델리아 팀을 위한 게 아닌 나를 위한 거였다.
“선물 받을 이유 없습니다.”
단호하게 답하며 상자를 이 팀장 쪽으로 밀었다. 이 팀장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정 불편하다면 길드전에서만 사용하고 돌려줘도 됩니다.”
상자에 붙은 태그를 보니 개인 제작사에 맡겨 만들어 온 검인 듯했다.
내가 그것을 빤히 보고 있자 웃음을 머금은 이 팀장이 말을 이었다.
“분명 사용해 보면 마음이 달라질 겁니다. 좋은 무기에게도 그만한 주인이 필요할 테니까요.”
지난 대화를 떠올린 나는 단검을 가볍게 회전시키며 손장난을 쳤다.
“좋은 무기라더니 말뿐인 건 아니네.”
“그거 그렇게 사용하라고 준 거 아닐 텐데.”
불쑥 조이현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어딘가 단단히 화가 난 얼굴이었다. 나는 그를 쓱 쳐다보다 단검을 허리에 채워진 검집에 넣었다.
단검 말고도 보조 무기로 권총집이 하나 더 있었다.
“어떻게 쓰든, 중요한 건 제가 구해 준 거 아닌가요? 조이현 씨.”
조이현 씨, 라는 호칭에 일순 그의 이맛살이 찌푸려졌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돌려 수풀 쪽을 바라봤다.
“도망갔겠군. 너라면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왜 놔줬어.”
못마땅해하는 물음에 답하려는데 뒤통수에서 대신 답이 들려왔다.
“내가 놔주라고 그랬거든.”
이 팀장과 박형도였다. 어찌나 숨 가쁘게 뛰어왔는지 우리가 보이자마자 형도는 제 무릎을 짚고 헛구역질을 했다.
“야영지는요.”
“이설이가 남아서 정리 중이고 유성우는 내가 놔주라고 그랬어. 이미 격차를 실감했을 테니, 혼자 풀어 두면 주변 경계하며 사냥개 노릇을 하지 않을까 해서 말이야.”
그들의 말에 입술이 뾰로통하게 나온 조이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홍고에게 밀린 게 어지간히 자존심 상한 모양이었다.
“언제 온 거야. 원래 점심 지나서 온다면서.”
“빨리도 물어봐 주시네요. 서둘렀어요. 이 팀장님이 두 사람 위급하다고 하길래.”
“……별로 위급한 편도 아니었는데, 뭐.”
길드전에 용병으로 참가해 달라며 반색할 때는 언제고, 고우주의 각성 이후 그는 어딘가 날이 서 있었다.
오델리아 길드의 유일한 공격 전력이었다가, 나와 고우주의 합류에 조바심을 느낀 것일지, 정확히 알 길이 없었다.
나는 반대 손에 쥐고 있던 장검을 들고 여전히 주저앉아 있는 고우주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장검을 감싸고 있던 청록색 빛은 가신 지 오래였다.
내가 단검을 받은 시기에 고우주도 정식 입단하면서 이 장검을 받았다.
첫 헌터 무기라며 방방 뛰며 좋아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심상한 꼴이었다.
나는 고우주 앞에 멈춰 서서 검을 그의 앞에 떨어트렸다.
“이름까지 지어 주던 정성에 비해 너무 맥없이 버린 거 아니야?”
내 말에 고우주는 땅바닥에 처박고 있던 시선을 들어 답했다.
“……버린 적 없어요.”
시작도 전에 기세가 단단히 눌려 있었다.
한지원을 가르쳐 본 감각으로 이 아이를 대한 게 오히려 독이 된 듯했다.
이제 보니 내가 가르치는 것에 재능이 있는 게 아니었다.
한지원이 괴물 같은 습득력을 지녔었더란 사실이 비로소 실감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