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21화
조이현은 제 손바닥을 곁눈질했다. 화살을 뽑아낸 자리 위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분명 손바닥에 에너지를 집중시켰는데 뚫고 들어왔다.
그건 저 작은 화살에 담긴 에너지의 양이 상당하다는 뜻이었다.
홍고는 콧김을 뿜어내더니 등 뒤에 짊어지고 온 대검을 뽑아 들었다. 척 보기에도 굉장한 무게일 텐데 아주 가볍게 휘둘렀다.
고우주는 뒤로 물러나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홍고라면 유성우 길드의 홍고요?”
“그래.”
유성우 길드는 강한 탱커를 여럿 보유한 길드로 오델리아 길드가 아니었다면 분명 3위를 차지했을 길드였다.
필드 입장 당시 바로 뒷자리에서 뜨거운 시선을 보내던 모습들이 떠올랐다.
“찌질하게 4위로 밀렸다고 우리한테 앙금이라도 남은 건가요?”
고우주가 아주 직설적으로 물었다. 조이현에게 한 말이었지만 목소리가 큰 탓에 홍고에게까지 닿았다.
그 말에 단단히 열받은 듯 홍고의 표정이 구겨졌다. 홍고는 금방이라도 달려들 태세를 갖췄다.
“한 놈만 걸려라 했는데, 오델리아 쥐새끼들이라니 만찬으로 딱이군.”
“마지막 만찬으로 말인가?”
조이현은 도발적인 말과 달리 냉정한 눈을 하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더니 고우주에게만 들릴 법한 목소리로 속닥였다.
“내가 말했지. 중앙 싸움에서 이기면 단번에 중앙을 먹을 수 있겠지만, 자칫 패배하면 시작하자마자 박살 나는 거라고. 지고 모두 깔끔히 아웃 되면 다행인데 몇 명만 살아남으면 어떨까?”
고우주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돼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굳이 그럴 이유가 있을까요? 경기 중후반부도 아니고 시작부터 대패를 했는데 고작 몇 명 살아남는 게 무슨 의미라고…….”
“…….”
“뭡니까, 지금 유성우 길드의 홍고가 팀원들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거예요? 팀워크가 전부인 것처럼 홍보하던 길드가?”
호들갑을 떠는 고우주의 말에 조이현이 슬쩍 그를 쳐다봤다. 사람 속 긁는 말을 눈치도 없이 잘 했다.
홍고는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우렁차게 소리쳤다.
“누구 때문인데! 너희가 우리 자리를 빼앗지만 않았어도 보상을 받아서 전부 죽여 버릴 수 있었는데…… 그런데, 그런데!”
“보상이요?”
고우주가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기웃거리자, 조이현이 보급 창고에서 들고나온 총을 쥐었다.
총을 쥔 조이현의 손바닥이 깨끗했다. 그새 상처가 거의 아물어 있었다.
고우주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조이현이 묻기도 전에 답했다.
“3등 팀 보상이 바로 첫 대미지를 입은 즉시 1분간 회복력이 무적이 되는 거였지.”
조이현은 온몸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짐에도 침착하게 상황을 살폈다.
1분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었다. 그 기회를 이렇게 날린 건 뼈 아프지만,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회복력만 믿고 무작정 달려들 수는 없었다.
‘달려든 순간 화살의 타겟이 고우주로 변할 테니까.’
조이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어차피 그런 것에 기댈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홍고는 완벽히 아문 조이현의 손을 쳐다보며 이를 갈았다.
“그래, 잘 알고 있네.”
“팀의 탱커로서 뼈 아픈가 보지. 그래서 버리고 도망 나왔나? 홍고.”
“조이현, 너는 밖에서도 거슬렸어. 찢어발겨 주마.”
홍고의 검이 거무죽죽하게 물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때마침 이어셋을 통해 이필엽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참 나이스한 타이밍이네요. 중앙 전투에서 떨어져 나온 팀과 마주쳤습니다. 수는 적어 보이는데…… 하필 유성우네요.”
-최대한 버텨요. 바로 합류할 테니.
이필엽의 말과 동시에 홍고가 힘찬 기합과 함께 거리를 좁혔다.
“미안하지만 그건 힘들지도 모르겠네요.”
조이현은 총구를 들어 올려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연사 총알이 빠르게 홍고에게 향했지만, 그는 거대한 대검을 방패 삼아 총알을 어렵지 않게 막아 냈다.
아무런 에너지도 실리지 않은 총알은 홍고의 검을 뚫지 못했다.
탄두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지고 조이현은 연사 총을 바닥에 내던졌다.
“무기는 역시 손에 안 맞아.”
홍고는 커다란 몸집에 비해 몸짓이 날랬다. 그가 빠르게 따라붙는 만큼 조이현 역시 안전거리를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홍고의 대검이 너무나도 컸다. 그가 한번 검을 휘두르면 거리를 벌린 게 무의미해졌다.
웬만한 사정거리를 전부 커버하는 덕에 조이현은 계속해서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게 고작이었다.
“가벼운 입처럼 쥐새끼처럼 피하는 게 전부인가 보지?”
홍고는 거친 숨을 내쉬면서도 입을 쉬지 않았다.
피해만 다니는 건 적성에 안 맞았다. 조이현이 무리해서 붙으려는 순간 화살이 날아들었다.
처음 막아 냈던 화살보다는 공격력이 약했지만, 속도가 상당했다.
조이현은 숨을 몰아쉬며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홍고는 이미 승리를 직감한 듯 억지로 몰아붙이지 않았다.
그게 조이현을 더 열받게 했다.
유성우 길드와는 밖에서부터 자주 부딪혀 왔다. 그럴 때마다 조이현은 본능처럼 유성우 길드와 자신의 상성이 아주 좋지 못하다는 걸 알았다.
다인 조로 움직이는 유성우는 커버 범위가 넓은 탱커와 은신 후 화살을 쏘는 장거리 공격수를 주력으로 하는 공격 스타일을 가졌다.
근거리에서 빠른 템포의 공격을 즐기는 조이현에게는 최악의 상대들이었다.
‘저 활 때문에 혼자서는 도무지 안 돼.’
생각 끝에 고우주를 돌아보는데, 그는 장검을 들고서는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제 생각처럼 배운 게 안 되는지 제자리에서 엄한 검을 허공에 휘두르는 꼴에 한숨이 나왔다.
‘그 여자가 없으니까 아무것도 못 하네.’
“한눈팔기에는 본인 코가 석 자 아닌가.”
홍고는 그 말과 함께 다시 한번 대검을 휘둘렀다.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려 놨다고 생각했는데, 검이 코앞에 닿았다.
“그 거리에서도 닿는 건 반칙 아닌가.”
조이현이 어처구니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홍고도 따라 쾌활하게 웃었다.
“칭찬은 고맙지만, 그렇다고 봐줄 생각은 없다…….”
홍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이현은 오른발 가득 힘을 실어 홍고의 복부를 걷어찼다.
급하게 검으로 막긴 했으나, 사레 걸린 듯 기침이 쏟아졌다.
“이 새끼가.”
“입가에 흐른 침이나 좀 닦지.”
여유로운 척해 보았지만, 몸이 워낙 단단한 놈인지라 균형이 조금 흐트러졌을 뿐 큰 타격은 없어 보였다.
저놈이 분신처럼 사용하는 검을 부셔야 승산이 보일 거 같은데.
“고우주!”
조이현은 큰 소리로 고우주를 불렀다.
“도대체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생각이지? 여기서 어이없이 탈락하기 싫으면 정신 차려, 이 새끼야!”
“그게 밖에서 했던 것처럼 에너지가 안 뭉쳐져서.”
“답답한 새끼. 그건 양하…….”
말을 채 잇기도 전에 화살이 날아들어 정확히 허벅지를 관통했다.
“윽!”
“선배!”
놀란 고우주는 아직 에너지도 씌우지 못한 장검을 들고 홍고에게 달려들었다.
홍고는 비웃음 치듯 거무죽죽한 대검으로 우주의 장검을 쉽사리 날려 버렸다. 고우주의 장검이 커다란 구를 그리며 멀찍이 떨어져 바닥에 꽂혔다.
사색이 된 고우주는 맨몸으로 홍고를 마주하게 됐다.
놀란 조이현이 고우주를 부르는데, 홍고가 그보다 더 크게 소리쳤다.
“어흥!”
공간이 울리는 커다란 소리에 고우주가 놀라 뒤로 자빠졌다. 그 모습에 홍고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언제부터 오델리아가 개그 콤비팀이 됐지? 왜 길드전을 나왔어. 개그 프로그램에나 나가시지.”
조이현은 서둘러 고우주의 뒷덜미를 잡아채 뒤로 날렸다.
“이 멍청아, 그렇다고 무작정 달려들어?!”
화가 머리끝까지 난 조이현이 제 머리칼을 헝클였다.
“재각성은 개뿔. 이러니까 실전 경험 없는 놈은 안 된다니까.”
그의 말에 주눅 든 고우주가 손가락을 덜덜 떠는데, 조이현의 등 뒤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저 자식은 너부터 보내고 따라 보내 줄 테니 걱정 말라고.”
홍고의 목소리와 함께 바람을 가르고 검날이 내리쳐졌다. 조이현은 그 일격을 온몸으로 막아 냈다.
트럭에 부딪힌 것 같은 충격이었다. 거대한 힘에 조이현의 몸이 공중으로 떴다.
뒤따라 이어지는 홍고의 공격에 의해 점점 사방이 가로막힌 곳으로 내몰렸다.
유성우 길드가 즐기는 공격 방식이었다. 탱커인 홍고가 나서서 상대를 몰아붙이면 화살이 유성처럼 쏟아진다.
그 덕에 ‘유성우 길드’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 의미를 실현하듯 수풀에서 수십의 화살이 하늘을 향해 쏘아 올려졌다.
끝장을 볼 생각인 듯했다.
하늘로 향한 화살이 머지않아 조이현의 머리 위로 장대비처럼 쏟아졌다.
다급해진 조이현이 땅바닥의 흙으로 벽을 치려 하는데 홍고가 움직임을 방해했다.
가까스로 홍고의 공격을 막아 낸 조이현이 소리쳤다.
“너까지 저걸 맞을 생각인 거냐?”
“재수 없는 너 하나 데리고 갈 수만 있다면 말이야. 오델리아의 주력원을 데리고 가면 방송은 좀 타겠지. 네놈이 일찍이 탈락하면 너희 팀의 미래야 뻔하잖아.”
홍고가 괴이하게 웃으며 떠드는 말에, 그의 대검을 힘겹게 받아 내던 조이현이 미세하게 미소 지었다.
“누가 우리 팀 주력원이 나뿐이래.”
“허세는.”
그 말과 함께 홍고가 조이현을 강하게 밀쳤다. 조이현이 밀쳐진 바로 머리 위로 화살 무더기가 떨어졌다.
그가 눈을 질끈 감는 순간 청록색 배리어가 쳐졌다.
‘고우주의 에너지색!’
조이현이 반가운 얼굴로 고우주를 바라봤다.
그 답답한 놈이 드디어 한 건 하는 건가 반색하며 시선을 돌렸는데, 고우주는 여전히 얼빠진 얼굴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제 등 뒤를 말이다.
돌아보니 시커먼 로브를 뒤집어쓴 이가 제 머리 위로 배리어를 치고 있었다.
화살 세례를 받은 배리어가 크게 울렁거렸다. 하지만 절대 깨지진 않았다.
로브를 쓴 이는 곧장 바닥에 꽂혀 있던 고우주의 장검을 뽑아 들며 홍고를 마주 보고 섰다.
홍고가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뭐야, 넌.”
“…….”
로브를 쓴 이가 장검을 한 번 허공에서 휘두르자, 검날을 타고 청록의 에너지가 넘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