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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20)화 (120/183)

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20화

길드전이 이어지는 일주일간 저장고에 주기적으로 식량과 구급 약품, 무기 등 생존에 필요한 물품이 조달됐다.

물론 팀 대부분이 길드전을 앞두고 생존에 필요한 물품을 진작에 준비했기에 실제로 보급품을 필요로 하는 팀은 많지 않았다.

주로 시작부터 큰 전투를 치른 팀이나 예상 밖의 사고를 당한 팀 등이 이용했다.

몬스터에게 물품을 도둑맞아 방문하기도 했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었다.

“그런 드문 일을 선배가 해낸 거네요.”

조이현의 뒤를 바짝 쫓던 고우주가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큰 보폭으로 걸어가던 조이현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무슨 말을 해도 답 한 번 안 하던 사람이 불쑥 멈춰 서자 고우주도 두 걸음 뒤에 멈췄다.

획 째려보는 시선에는 매서운 살기가 묻어났다. 고우주는 반사적으로 나무 뒤에 쏙 몸을 숨겼다.

그 모습에 조이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혼자면 충분하다니까 저걸 왜 붙여 줘서.”

그는 작게 칭얼거리며 다시 앞으로 걸어 나갔다.

고우주는 조이현이 멀어지자, 다시 쫄랑쫄랑 그 뒤를 따라붙었다.

저장고가 있음에도 길드마다 각자 생존 물품을 챙겨 오는 이유는 단순했다.

저장고 위치가 지도 위에 공공연히 표시되어 있기에. 모두에게 공개된 정보였고, 그건 다시 말해 누군가 함정을 파고 기다리기에 십상이라는 거다.

“뭐라도 보이세요?”

보급품 창고에 다다라 조이현이 멈춰 주변 경계를 하자, 고우주가 다가와 귓속말로 물었다.

조이현은 제 귀를 털어 내며 답했다.

“대기 중인 팀이 있을 수 있으니까 조심해야 해.”

조이현의 말에 고우주는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창고 주변은 조용했다.

보급품 창고는 생각보다 크기가 크지 않았고 문짝도 없어 내부가 훤히 보였다.

그 안에는 안내받은 대로 식량과 구급 약품이 잔뜩 쌓여 있었다.

“아무래도 저희가 일등인 거 같죠.”

“…….”

“하긴 시작과 동시에 물품 도둑맞는 게 흔한 일도 아니고.”

고우주의 혼잣말에 조이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고우주는 눈치껏 다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어제 시작 지점에서 큰 싸움 났잖아요.”

오델리아 팀이 야영지를 찾은 시간, 해가 질 때까지 제법 큰 폭발음이 여러 번 이어졌다.

그럴 때마다 조이현은 소리가 나는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한편 고우주로서는 계속 도망만 다니는 선배들의 태도가 못마땅했다.

그에게는 이 길드전이 데뷔전이나 다름없었다.

전 세계로 생중계되는 경기로 데뷔전을 치를 수 있는 것만큼 운 좋은 경우가 어디 있을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더 활약해 제 능력을 뽐내고 싶은데 상황이 좀처럼 만들어지지 않았다.

고우주는 기지개를 켜며 말을 이었다.

“이미 거기서 이긴 팀이 다 휩쓸고 중앙으로 달렸을 테니 조용한 게 아닐까요? 저희야 싸우는 곳에서 최대한 멀리 왔으니 이런 곳에 아직 사람이 남아 있을 리도 없고.”

고우주의 말을 가만히 듣던 조이현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중앙을 선점하면 좋지.”

“네?”

주변이 조용한 걸 확인하고야 조이현이 수풀을 헤치고 조심히 보급품 창고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고우주는 그의 뒤를 바싹 따라붙으며 되물었다.

“좋은 거 모르는 사람이 여기 있습니까?”

“내 옆에 있는 후배가 좋은 점만 알고 그 뒤를 못 보고 있는 거 같아서.”

“…….”

“이 길드전의 최종 목표는 마지막 철탑에 나타나는 우물에 볼을 골인시키는 거지.”

“그래서 철탑을 미리 먹어 두려는 거잖아요.”

고우주가 그걸 누가 몰라서 묻냐는 얼굴을 하자 조이현이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래, 초반에 자리를 잡으면 포지션을 갖추고 방어하기에 유리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실력이 압도적일 때의 이야기야.”

조이현의 말에 고우주는 철탑을 선점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오른 순간에는 끝내주게 멋지겠지만 아마 머지않아 피떡이 될 게 뻔했다.

“이 인원으로 장시간 방어하다 보면 지쳐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어. 그러니 우리 같은 약소 길드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고우주의 낯이 창백해지자 그는 이제야 알겠냐는 듯 고개를 작게 주억거렸다.

‘우리는 외곽에서부터 천천히 파고들 거야.’

그가 왜 그런 작전을 짰는지, 이제야 알 거 같은 기분이었다.

조이현은 고우주가 조용해진 걸 확인하고야 창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넌 거기서 대기.”

혼자서 충분하다는데도 이필엽은 끝까지 고우주를 데려가라고 했다.

김형도까지 나서서 2인 1조가 기본이라며 수칙을 따지고 들었다.

그럼 차라리 김형도나 박이설을 데려가겠다 했지만, 같은 물리계인 고우주가 분명 조이현에게서 보고 배우는 게 있을 거라며 기어코 그를 붙여 줬다.

‘거짓말쟁이들 말만 번지르르하지. 그냥 귀찮은 거면서.’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번 길드전에 고우주가 합류하는 걸 반대했다. 실전 경험이 하나도 없는 그에게 길드전은 위험했다.

‘하필 걔가 고우주를 재각성 시키지만 않았어도 말이야.’

생각을 거듭하며 조이현은 물품을 확인했다.

도둑맞은 생수와 함께 쓸 만한 약품을 챙기는데 등 뒤에서 불쑥 낯선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어서 오세요.

조이현은 챙겨 든 물건을 놓고 재빨리 보급품 사이에 놓인 연사 총을 집어 들었다.

가벼운 방아쇠 위에 손가락을 올리고 뒤를 확인하는데 길드전 스태프 옷을 입은 여자가 나타나 말을 이었다.

-몸도 마음도 지친 헌터분들을 돕는 길드전 마스코트 차밍입니다.

말끝마다 조금씩 잔상이 흔들렸다. 그 여자 앞에는 고우주가 멍한 얼굴로 서 있었다.

“고우주, 뭐 하는 짓이야.”

“아, 이게 말을 해서요.”

조이현 역시 눈이 있기에 알 수 있었다.

찬찬히 뜯어보니 저장고에 배정된 홀로그램인 듯했다. 날을 세웠던 조이현은 그제야 어깨에 힘을 빼고 총구를 내렸다.

“한눈팔지 말고 앞에 가만히 서 있으라고 했잖아.”

조이현의 나무람에도 고우주는 홀로그램이 신기한 듯 그것을 요목조목 살피며 답했다.

“한눈 안 팔았어요. 갑자기 자기 멋대로 말을 시작해서 놀라서 다가간 것뿐이에요.”

물건을 챙겨 나오던 조이현이 걸음을 멈췄다.

“멋대로 말을 시작했다고?”

어쩐지 불쾌한 감각에 그는 홀로그램이 뿜어져 나오는 본체 기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계가 놓인 주변 땅이 엉망으로 헤집어져 있었다.

홀로그램에는 인식기가 있어 반경 안에 사람이 와야 작동했다. 그리고 제가 고우주를 세워 둔 자리는 기계가 인식하지 못할 위치였다.

그러면 저게 혼자 켜졌다는 건가?

‘그럴 리가 없잖아.’

생각이 거기까지 닿은 순간 엉망이던 땅이 움푹하게 솟아나더니 무언가 튀어나왔다.

홀로그램에 넋이 나가 있던 고우주가 놀라 뒤로 자빠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고우주는 엉덩이가 아프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튀어나온 것의 정체를 확인했다.

“유리 조각?”

긴 줄에 아무렇게나 엮인 건 유리 조각들이었다. 그것들은 땅 위로 튀어 오르며 가까이 있던 고우주의 다리에 얽혔다.

유리 조각의 끝이 날카롭지 않아 바지를 뚫고 상처를 내지는 못했다.

고우주는 그제야 멋쩍게 웃었다.

“깜작이야. 괜히 쫄았네.”

정신을 차린 고우주가 그걸 벗겨 내려 했다. 유리 조각이 수많은 탓에 살짝 움직인 것만으로도 빛이 사방으로 반사돼 어지럽게 번쩍였다.

구조 신호라도 보내듯 반사광이 굉장했다. 조이현은 사방으로 퍼지는 빛에 인상을 찌푸렸다.

“건들지 마, 고우주. 멀리서도 보이겠…….”

그 순간 조이현은 순간 유리 조각이 엉킨 줄이 평범한 줄이 아닌 활줄이라는 걸 깨달았다.

깨닫기 무섭게 수풀에서부터 찰나의 순간 빛보다 빠른 속도로 화살이 날아왔다.

화살은 정확히 고우주가 넘어진 방향을 향했다. 곧바로 사방에 피가 터졌다.

“…….”

고우주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두 눈을 끔뻑였다. 상황을 인지하기 무섭게 제 옷으로 피가 떨어졌다.

원래라면 제 얼굴로 날아왔어야 할 화살이 지금 제 눈앞을 가로막은 커다란 손에 맞고 말았다.

“건들지 말라고 했지. 뭘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어.”

조이현이었다. 알아차린 게 고작인 저와 달리 화살을 그가 막아 낸 거다.

정확히는, 대신 화살을 맞는 방식으로 말이다.

“선배. 피가…….”

“알고 있으니까 일어나 더 큰 게 올 거니까.”

조이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화살이 날아든 방향에서부터 2m가 훌쩍 넘어 보이는 거구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육중한 남자는 자기 몸집만 한 대검을 등에 지고 있었다.

“설치하면서도 반신반의했는데. 저딴 걸 어떤 멍청이가 걸릴까 하고 말이야. 근데 있네. 그런 멍청이가.”

조이현은 제 손바닥에 꽂힌 화살을 뽑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누가 이런 허접스러운 걸 함정이라고 설치했나 했더니, 너구나. 홍고.”

유리 조각이 엉킨 줄이 활줄이라는 걸 안 순간 수풀에서 강한 살기가 느껴졌다.

그것이 거대한 에너지가 되어 날아들기까지 채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놀란 탓에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공격을 막을 수 있던 건 눈앞에서 하얗게 질린 고우주의 표정 덕이었다.

그 얼빠진 얼굴을 보자 머리보다 손이 먼저 뻗어 나갔다.

‘허세를 부렸지만 아슬아슬했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막내 얼굴에 그대로 구멍이 생길 뻔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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