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118화
핸드폰 화면 위로 <헌터 정보통>의 방송 타이틀이 떠올랐다.
곧 시그널 음악과 함께 단정한 차림의 두 사회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벌써 다음 주면 입동입니다. 기온이 뚝 떨어져 외출 시 보온에 신경 써야 할 거 같습니다.
-지난달 협회 주간의 길드전 신청이 마감됐는데, 어느덧 경기가 바로 오늘로 다가왔습니다.
-네, 맞습니다. 길드전을 앞두고 주요 토픽을 함께 짚어 보려 하는데요. 역대 최대 상금이 걸린 이번 길드전, 예상 우승팀 투표가 진행됐었죠.
화면의 오른쪽 여백 위로 길드전에 참가한 길드의 심벌들이 떠올랐다.
-바로 어제 투표가 마감되었습니다. 개표를 앞두고 예상 우승팀을 짚어 보겠습니다. 첫 번째로는 오델리아 길드입니다.
-가장 의외성 있는 길드가 아닐까 합니다. 이번 여름 약소 길드였던 오델리아가 센터와 합세해 게이트 클리어에 지대한 공을 세워 브랜드값의 그래프가 천장을 뚫었죠.
-그 기회로 이름을 알리게 됐지만, 길드장인 이필엽 헌터는 이미 오래전부터 센터에서 토대를 갈고닦은 베테랑 헌터로 무려 과거 성시현 헌터의 사수였다는 걸로 유명한데요. 생전 그녀를 이끌던 리더십으로 오델리아의 헌터를 진두지휘하고 있습니다.
-듣자 하니 신청 마감 날 접수했다고 해서 또다시 이슈가 됐죠?
-네, 접수된 멤버 중 오델리아 길드 유일의 S급 윤가경 헌터가 불참했습니다. 좀처럼 대외 활동을 하지 않는 윤가경 헌터를 뒤에 두고 신청 마감일에 접수한 심경의 변화를 내일 꼭 들어 보고 싶습니다.
-게이트에서와는 또 다른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 기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으로는 우승 예상 순위 1위를 차지한 퀸백 길드로…….
“뭐 해, 이제 마감 준비해야 하는데.”
‘스태프’ 영어가 크게 적힌 노란 조끼를 입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의 부름에 여자는 급히 보던 핸드폰을 뒤집었다.
“아직 한 팀 남았는데요.”
“10분 뒤 마감이야. 그때까지 접수 안 된 팀은 자동 탈락이니까, 가차 없이 끊어 내.”
남자의 말에 여자는 네, 하고 짧게 대답하고는 참가자 리스트를 확인했다.
당장 오늘 필드 입장을 앞두고 닷새 전부터 현장에 도착해 적응 중인 길드도 있었다. 그에 비해 마감 10분을 남긴 지금까지도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 팀도 있었다.
그 팀 탓에 퇴근이 늦어지고 있던 차였다. 여자는 그 간 큰 길드가 어딘지 확인하기 위해 리스트를 훑었다.
한 팀 한 팀의 이름을 눈으로 훑는 그때, 문이 열리며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가 뛰어왔다.
한참을 뛰어온 듯 턱 끝까지 숨이 차 있었다. 그는 겨우 접수처까지 다다라서야 숨을 골랐다.
“하아, 아직 입장 안 늦었죠.”
“10분 뒤 마감입니다. 서둘러 주세요.”
여자는 짜증이 섞인 투로 말을 이었다.
“본인 성함과 소속 말씀해 주세요.”
그 말에 남자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푹 눌러쓴 모자를 살짝 들쳐 보였다.
“오델리아의 김형도입니다.”
* * *
“뭐야, 역시 아직 시간 널널했네.”
방문을 열고 들어온 조이현이 기지개를 켰다. 그 모습에 소파에 늘어져 있던 형도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널널하긴요. 그대로 다시 돌아갈 뻔했습니다. 그러니까 출발 좀 일찍 하자니까.”
“안 늦었으면 됐지. 투덜거리기는.”
본인은 걸어온 주제에 떵떵거리는 모습이 퍽 얄미웠다. 형도는 짜증이 잔뜩 섞인 얼굴로 이를 갈았다.
“제가 죽어라 뛰어와서 안 늦은 줄이나 아세요.”
참가 신청부터 입장까지 뭐 하나 순탄한 게 없었다.
원래 서류 정리와 대외 활동은 길드장인 이필엽이 모두 담당했다.
하지만 길드전 참가가 급작스럽게 결정되며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아진 덕분에 서류 정리 같은 잔업이 온전히 형도에게 내려왔다.
입사가 저보다 빠른 조이현이나 박이설에게 갈 줄 알았더니, 두 사람 다 기계치라며 모든 일을 미뤘다.
형도 역시 서류와는 친해 본 적이 없어, 협회에서 요구하는 수많은 증빙 서류를 처리했던 지난날을 생각하며 눈물을 훔쳤다.
“나머지 분들은요.”
오늘도 기어코 형도가 짜 준 플랜을 지키지 않아 늦게 출발해 다 와서 차가 막혔다. 그나마 형도가 차에서 내려 뛰어온 덕분에 늦지 않게 접수를 완수할 수 있었다.
형도의 물음이 끝나기 무섭게 방문 앞이 시끄러워졌다.
“우와! 방문 앞에 저희 길드 이름이 적혀 있어요!”
고우주의 목소리였다.
“제발 조용히 좀 해.”
박이설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고우주는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원래도 작은 키는 아니었으나 두 달 사이에 키가 7센티미터는 더 자라 어느덧 조이현과 비슷한 키가 됐다.
그에 비해 아직 애 같은 얼굴을 한 고우주는 대기실 안을 방방 뛰어다녔다.
뒤따라 들어온 이설이 피곤하다는 듯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긴 얘가 어떻게 진정을 하겠어. 하나같이 처음인 것투성일 텐데.”
“그러게 내가 이번 길드전에는 참가시키지 말라고…….”
조이현이 울컥 목소리를 높이자, 뒤따라 들어오던 이 팀장이 대신 답했다.
“설마 고우주가 A급으로 재각성할 거라고 여기 있는 누가 알았겠어.”
그의 말에 고우주가 음흉하게 웃으며 손으로 브이를 지어 보였다.
이 팀장의 말처럼 고우주는 길드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재각성했다.
C급이 A급으로 각성하는 건 제법 특이한 이력이었다. 물리계 에스퍼가 압도적으로 부족했던 오델리아 길드의 입장에선 이보다 반가운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의 이번 길드전 참가는 불가피한 사항이기도 했다. 들떠 있던 고우주는 제게 집중된 이야기에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이게 전부 하나……. 으악!”
그의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조이현이 그의 발을 밟았다. 소리를 내지른 고우주가 조이현을 째려보자, 조이현이 매서운 표정을 지었다.
고우주는 꼬리를 말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냥 다 누나 덕분이었다고요.”
그 모습을 소파에 앉아 지켜보던 형도가 고개를 내저으며 일어났다.
“눈치만 줄 게 아니라 설명을 해 줘요. 또 걔 혼자 어디에 두고 왔어요?”
“괜히 눈에 띄어서 좋을 게 뭐 있어. 원래 비장의 카드는 아껴 두는 거니까.”
조이현은 꿍꿍이가 있는 표정을 지었다. 형도는 그게 못마땅했다. 그에게 있어 길드장님이나 조이현이나 괴짜이긴 매한가지였다.
조이현 머리에 뭐가 들었는지, 고민하는 건 그만두고 풀이 죽어 있는 고우주 앞으로 갔다.
“너는 이번 길드전이 처음일 테니까 내가 한 번 더 짚어 줄게.”
“나도 뭔지 알아요. 매년 하이라이트 영상도 봤고요.”
“그럼 설명할 수 있어?”
“……그건 아니요.”
형도는 차라리 단순한 고우주가 났다고 생각하며 작년 길드전의 필드 지도를 꺼내 들었다.
길드전은 기본적으로 매년 당일 입장 직전 지도가 공개되었다. 그렇기에 이번 길드전의 배경이 어떤 곳이 될지는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필드의 지름은 매년 유사했으나, 그 알맹이는 무엇 하나 겹치는 것이 없었다.
길드전 신청이 마감된 직후 근 5년간의 통계로 여러 추측이 난무했지만, 그다지 쓸모는 없었다.
게다가 바로 작년의 필드가 설산으로 난이도가 극악이었다.
덕분에 초반 탈락자가 많아 난이도 조정이 있을 것인가도 화두가 된 모양이었다.
형도의 설명에 우주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지리는 입장해 봐야 알 수 있다는 소리인데, 뭘 공부한다는 거예요?”
“필드의 생김새에 따라 조금씩의 변동은 있겠지만 우리 팀의 진입 방식은 아마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거든.”
“진입 방식이라면…….”
길드전의 규칙은 간단했다.
가장 마지막에 필드 중심에 위치한, ‘왕좌’라고 불리는 철탑을 거점으로 삼는 팀이 승리를 차지했다.
철탑을 중심으로 두고 필드의 밖으로 갈수록 몬스터가 들끓고 기후도 엉망이며 식량도 부족했다.
그렇기에 자연히 참여 길드원들은 중심 철탑으로 모여들 수밖에 없으니 싸움이 불가피했다.
물론 팀원 모두가 왕좌에서 버텨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참가자는 동일한 조끼를 입으며 일정 데미지를 입으면 가슴 중심에 있는 정제석이 깨졌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필드 밖으로 이동했는데, 한 명만이라도 마지막 날 철탑 꼭대기 층에 나타나는 우물에 길드 상징이 새겨진 볼을 집어넣으면 그가 속한 팀이 승리하는 식이었다.
“그럼 만약 전부 실패하면요.”
“그럼 그 해는 우승팀이 없는 거지.”
옆에서 듣던 박이설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녀의 말에 우주는 빡세네, 하며 제 턱을 매만졌다. 우주의 물음처럼 실제로 작년의 필드 난이도가 지나치게 높아 우승팀이 없었다.
덕분에 우승 상금이 쌓여 올해는 작년보다 치열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래서 진입 방식이 뭔데요? 철탑까지 빨리 들어가야 하는 거잖아요.”
우주의 재촉에 형도가 빙그레 웃었다.
“물론 곧바로 철탑으로 치고 들어도 좋지만, 우리는 외곽에서부터 천천히 파고들 거야.”
형도의 말에 우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요? 외곽에 있을수록 생존이 어렵다면서요.”
“그래. 그래서 모두 앞다퉈 중앙만 보고 달리지.”
“그러니까 우리도……!”
우주의 목소리가 커지는 그때, 대기실의 스피커를 통해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 삼십 분 후 입장 순서를 정하는 예상 우승팀 투표 개표가 시작됩니다. 각 팀의 길드장님들은 본관으로 모여 주세요.
안내 방송에 길드장을 비롯한 멤버들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조이현은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우주를 바라봤다.
“냅둬. 백 마디 설명보다 직접 보는 게 훨씬 와닿을 테니까. 왜 외곽부터 파고들자는 건지.”